▲ 김종필 총재와 함께
노여움이 지나쳐…

그럭저럭 나 혼자 속 끓이고 말면 끝나는 일은 그런대로 견딜만 했다. 정작 더 큰 문제는 숨길래야 술길 수 없는 일이 터질 때였다. 분명 '대표에게 보고를 안한 일'들이 아침이면 신문에 막 나올 때는 정말 속수무책이었다.

어쩔 때는 기사가 난 신문을 슬쩍 숨겨보기도 하고, 또 신문 보실 시간에 엉뚱한 일을 핑계 삼아 들어가서는 시간을 뺏어보기도 하고…

그러나 그런 '비밀 아닌 비밀'은 오래 지켜질 수 없는 법. 선거가 끝난 얼마 후였다. 하루는 출근하시자마자 나를 향해 '장보좌 들어오시요' 하는 게 아닌가. 또 무슨 일이 터진 게 분명했다.

"어제 당에 아무 일도 없었나? 뭐 올라온 것 없어?"

"제가 어제 저녁 늦게 퇴근했는데…그 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저런…쯧쯧쯧…지금 당에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보좌역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몰라서 어떡하겠다는 거요."

"…"

"한 번 알아 봐!"

아뿔사! 뭔가 큰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강창희 사무총장 보좌역과 김유상 총무국장을 찾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주요 국회직과 당직 인선이 당대표의 결재도 거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올렸다가 이미 청와대 결재를 받아 내려왔다는 것이 아닌가! 쉽게 말하면 귀찮고 하니까 청와대와 '직거래'를 해 버린 것이다.

이재형 대표는 선거가 끝났으니 분명 주요 국회직과 당직자 인선이 있을텐데 도무지 보고가 없자 이미 사태를 직감을 하고 나에게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인데, 정치에 막 발을 들여놓은 나로서는 전혀 짐작도 못한 일이었다.

사실 이런 일들은 비단 그 때만이 아니었다. 사소하게 발표되는 총장의 기자간담회, 혹은 대변인 성명을 통해 반영되는 모든 의견이 그렇게 처리되는게 다반사였다. 과연 청와대에서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인지, 아니면 당의 실세들이 귀찮아질 것 같으니까 그냥 그렇게 한 것인지는 지금도 나는 알 수 없다. 그거야 당사자들만이 알 일이지만 말이다.

어떻든 아무리 일상화 된 일이라고는 하지만 주요 국회와 당직자 인선문제만큼은 사안이 간단치가 않았다. 우선은 당 대표로서 느끼는 모욕감도 컸을 것이요, 차후 당 운영의 기반이 되는 인선문제였던 만큼 대표로서 쉽게 넘어 갈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때 이재형 대표는 '결국 내가 결재를 안하면 공식 발표는 어려울 것이다'고 판단하셨는지 집에서 칭병을 하고 안 나오시기 시작했다. 이번에 아예 버릇을 고치겠다는 결심을 하신 게 분명했다.

정작 답답해진 것은 사무총장과 원내총무 등 당의 실세들이었다. 아무리 '얼굴 마담'으로 생각했다 해도 그래도 당 대표가 나와야 뭘 해보겠는데 아예 얼굴을 안 비치니 일 자체가 진행이 안 되는 것이다.

또 내가 곤욕을 치룰 수밖에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식 '정말 아픈거냐', '얼마나 아픈거냐' 물어 오는데 나로서도 참 난감한 일이었다. 나중에는 이대로 있다가는 일이 더 커지겠다고 판단했는지 권정달 사무총장과 이종찬 원내총무등이 대표의 사가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노여움 때문에 칭병하신 게 분명했는데 나중에는 정말 병이 나 버린 것이다. 일종의 내출혈로 구혈과 하혈이 이어졌다. 결국 입원을 하시고야 말았으니 처음에는 사소하게 '홧병'정도로 생각했던 주변 사람들도 겁을 먹을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

당의 당직자들이 모두 병원으로 달려오고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다행해 더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당시로서는 실세들 역시 결코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그 와중에 11대 국회가 개원했다. 그 날 아침 나는 서둘러 병원으로 갔다. 그런데 병원 문을 막 열고 들어서는 순간 이게 또 웬일인가. 병상에 누워있어야 할 이재형 선생이 상당히 흥분된 얼굴로 막 걸어 나오시는 게 아닌가.

"아니 선생님! 지금 어디…'

"가자! 국회가 개원했다는데 당 대표인 내가 빠져서야 안되지! 따라 와!"

나는 하도 급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미처 붙잡지도 못한 채 어리뻥하게 있는데 바로 사모님과 형제분들이 뒤쫒아왔다. 알고 보니 이미 그 날 새벽부터 국회에 가신다며 한바탕 소란을 피운 끝이었고, 간호사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링겔을 손수 다 뽑아 보리고 막 나오시는 길목에서 나와 맞닥뜨린 것이었다.

"선생님! 제발 오늘은 안됩니다. 제가 내일은 기필코 모시고 갈테니까 제발 오늘만은…하루만 더 병원에 계셔 주십시오. 제발 선생님!"

나는 운경 선생의 그런 모습은 그 날 처음 봤다. 거의 반 강제적으로 다시 병실로 모셔놓자 그제서야 운경 선생은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으셨다.

"장 보좌! 내가 10년 만에 기지개를 켜고 다시 나올 땐 이 꼴 보자고 나온 게 아닌데 말야…. 이러자고 긴 잠에서 깨어난 게 아닌데 말야…"

노여움 때문에 시작된 병이 정말 병이 되고 난 후 운경 선생은 자주 그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지금도 그 때 이재형 대표의 와병은 불쾌감과 모욕감과 후회와 자괴감일 얽혀 만들어낸 병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당시 당 주변에서는 운경 선생의 와병을 놓고 '국회의장 병'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물론 그렇게 보고 싶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정치세계란 다 그런 것이니 말이다.

경고-'단임제를 지켜라'

다행히 이재형 대표는 곧 쾌차되어 퇴원을 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당 '대표연설'을 하셔야 할 시간이 되었다. 관계자들의 자문을 받아 연설문을 작성 해 나는 사직동 자택을 찾아뵈었다.

"그래, 연설문 준비는 다 되었나? 한 번 읽어 봐!"

나는 초고문을 읽어 드렸다. 그런데 초고문을 다 들으신 선생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걸로는 안돼! 지금부터 받아 적은 걸 마지막에 추가하도록 해!"

그 때 내가 받아 적은 추가 원고는 이런 것이었다.

"존경하는 의원동지 여러분! 그리고 국무총리 이하 국무위원 여러분! 정치에는 절대적 완성이란 없는 것이라고 말들을 합니다. 우리의 제 5공화국도 이제 막 출범한 것이지 완전하게 정비된 것은 아닙니다. ….지난 해 종신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던 '세네갈'의 '생고르'대통령이 이를 고사하고 물러났을 때 전 세계의 민주시민들은 크나큰 감명을 받고 동시에 한없는 찬사를 보내었습니다. 이제 다가 올 1988년 2월 어느 날. 단 한 번의 임기가 끝나자 토착화된 민주주의에 의해 교체된 새 정권을 뒤로 하고, 활짝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두 손을 흔들며 청와대를 물러나는 57세의 정치인의 모습을 보게 될 때 전 세계 인류는 보다 큰 감명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받아 적으며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한 마디로 이것은 단임제 약속을 지키라는 이재형 대표의 경고였다. 몰론 전두환 대통령은 단임제 약속을 천명하긴 했지만,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고 그 누구도 나서서 그 약속을 거론하지도 못했다. 하물며 여당 대표가 이런 말을 한다면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당 대표 연설은 연설문에서 토씨 하나 빠지지 않고 다 진행되었다. 아예 당 대표 연설을 통해 '단임제 약속'을 다시 한 번 못 박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순간 국회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런 침묵은 당내로 연결되었다. 그 때부터 야당은 서서히 '단임제 약속 재확인'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는데. 당은 역시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미 정국을 주도하고 있는 민정당의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겠지만, 사실 그 문제에 관해 맞장구치며 뭐라고 대꾸해 봤자 이익이 될 게 없다는 판단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계기로 이재형 대표와 당 실세들간의 긴장관계는 더욱 고조될 수밖에 없었다.

이재형 대표의 마지막 상소

그 뒤에도 민정당은 순풍에 돛 단 듯이 일사천리로 정국을 주도해 나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민주주의 열기는 고조되었고, 민정당 가락동연수원 점거사건 등 시위와 집회로 잠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 때 흡사 기름에 불을 붙이듯 일대 파란을 몰고 온 사건이 있었다. 바로 장영자 이철희 사건이다. 당시 나는 재무분과 위원회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거의 이-장 사건으로 날을 지새다시피 했다.

어음사기 사건은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정부고위인사 개입설은 과연 사실인자. 만약 사실이라면 그것은 어느 선인지...정국은 혼미한데 소문은 끝이 없었다. 민정당의 실세로 막강한 권력을 가가하던 권정달 사무총장의 연루설까지 퍼지면서 엄청난 회오리 바람을 예고하는 가운데, 나웅배 재무장관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사태로까지 번졌다.

하루는 이재형 대표가 나를 불렀다.

“청와대에 전화 좀 넣게!”

“예?”

“면담 요청해! 나라가 이렇게 시끄러운데 최소한 민심의 소재라도 알려야 할 것 아닌가!”

나는 바로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넣어 이재형 대표의 뜻을 전했다. 그런데 역시 청와대의 대문이 높기는 높았다.

“장세동 경호실장이 연락할 것입니다. 기다리십시오.”

과연 다음 날 장세동 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일 오후에 사직동 자택에 계시면 모시러 갈 겁니다.”

다음 날 아침 찾아뵈니 운경 선생은 벌써부터 이발과 목욕재계까지 하시고 시간을 기다리고 계셨다.

“장보좌! 이를테면 이것이 상소 아닌가. 지금 내 마음이 꼭 그래!”

“...”

“내가 다시 정계에 나올 때 이종찬으로도 안되니까 노태우 씨가 계속 찾아 오더구먼. 결국은 전두환 씨도 만났지. 청와대 근처 사저(안가)에서 노태우 보안사령관과 함께 삼자가 함께 자리를 하게 되었는데, 그 때 내가 그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했지. 좋다, 그런데 내가 나서는데 단서를 몇 개 좀 달겠다, 그래도 좋겠느냐, 했더니 그러라고 하더군.”

처음 정치에 입문할 때부터 내가 풀지 못했던 바로 그 수수께끼였다.

“당내 민주화가 곡 이뤄져야 한다. 이런 말도 물론했지. 그런데 사실 내가 가장 힘을 실어했던 말은 딱 두 가지야. 첫째는 정당은 빨리 군의 냄새를 벗어내야 한다는 것, 정당은 결코 군대가 아니니 발리 민간인화 하라는 것이었지. 그리고 두 번째는 내가 언제든지 대통령에게 나의 충언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 달라, 설령 가혹하게 느껴질 정도의 얘기라도 나의 충언은 용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어. 그래 이제 내가 단서로 달았던 두 번째를 실천에 옮길 때가 된거야.”

“그래도 선생님. 저로서야 걱정이...”

“이 사람아, 옛날에 임금에게 상소를 한 번 올리려면 죽기를 결심하고 하지 않았나? 경호실의 동생 문제, 또 허씨들 문제, 당헌 당규가 무시되는 당내 문제... 지금 혼란을 풀자면 당장 친인척을 척결해야만 하는데... 그런 문제를 늙은 내가 아니면 누가 직언하겠나. 나는 괜찮아!”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경륜이란 이런 것이고 원칙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 그러나 나로선 한편으로 여간 걱정되는 게 아니었다. 그런 가운데 드디어 장세동 씨가 도착을 했다. 그리고 바로 장세동 씨의 차는 운경 선생을 모시고 사직동 자택을 빠져나갔다.

그 날 대통령과의 극비 대좌로 나눈 얘기를 나는 한참 후에야 들을 수 있었다. 독대한 가운데 이재형 대표는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치지 않으면 민심을 돌릴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전했고, 이에 전두환 씨는 참으로 진솔하게 대응했다고 한다.

전두환 씨는 ‘젊은 시절 육사 간 사람 중 풍족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면서 ‘나 또한 장인 장모의 배려가 있었기에 집안 일 신경 안 쓰고 바깥일에 충실할 수 있었다’며 서글픔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리고는 ‘조속히 매듭짓도록 결단을 내릴 것이다. 이런 보고를 여기저기서 많이 받고 있다, 정말 고맙다’ 는 등의 말을 했다고 한다.

과연 채 일주일이 못되어 일련의 조치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규광 씨가 구속되었고, 경호실의 전경환 씨가 옷을 벗었으며 수석비서관 하던 허삼수, 허화광 씨 등이 청와대를 떠나 하와이로 갔다. 그리고 당에서는 그 막강하던 권정달 사무총장이 경질되고 권익현 사무총장이 새로 임명되는 것으로 이-장 사건은 일단락 지어졌다.

그것이 운경 선생의 직언 때문이었는지는 전두환 씨 본인만이 알 문제다. 그럼에도 운경 선생의 이 날의 직언은 정치인이 보여 줘야할 하나의 모범으로 나에게 각인되었다. 그러나 운경 선생의 이 날의 직언은 결국은 마지막 상소가 되고 말았다.

마지막 연설

그런 가운데서도 당내에서 당의 실세들과 이재형 대표와의 갈등관계는 고조되어만 갔고, 결국 당 대표직 2년 반만에 사의를 표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취임식 날, 강당은 주요 당직자는 물론이요, 소속 국회의원과 당원들로 가득찼다. 뿐만 아니라 이재형 대표의 사림이 갖는 정치적 의미가 컸던 만큼 모든 언론기관들도 그 자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 당의 실세들은 무척 불안했을 것이다. 과연 저 양반이 또 무슨 얘기를 쏟아놓을지, 나 역시 사전에 전혀 귀뜸 받은 바 없었다. 운경 선생은 혼자 준지하신 마지막 연설을 시작하셨다.

‘민정당이 출발할 때 당은 병영의 색깔로 칠해져 있었습니다. 나는 그 병영의 색깔을 퇴색시키기 위해 지금껏 나름대로 노력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나의 노력대로 과연 그 색깔이 바래졌는지, 아니면 아직도 병영의 색깔로 남아있는지 나는 지금 판단키가 어렵습니다. 단 그 색깔을 지워보려 노력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나는 이 정당이 당헌과 당규와 강령대로 국민행복을 위해 나아가는 당으로 서길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채 못 지운 병영의 색깔이 있다면 그것이 마저 지워지길 바라며, 두 번 다시는 병영의 색깔로 다시 칠해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연설은 짧았고 명료했다. 그러면서도 당시 시대상황과 당내상황을 모두 아우르는 명연설이 아닐 수 없었다. 어느 한 사람에게 당의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앞장서서 막으려 했고, 국회의원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 누구보다도 노력했던 운경 이재형 선생, 선생은 결국 그렇게 상처만 입은 채 당을 떠났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자신할 수 있다. 이재형 선생의 모습은 정치인들에게 하나의 모범으로 남았다는 것, 그리고 정치 초년생이었던 나에겐 실로 엄청난 배움의 기회가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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