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희호 여사 영정(사진=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김홍배 기자]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생 동반자였던 이희호 여사가 10일 오후 11시37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 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7세.

이희호 여사의 임종 당시 병실에는 성경 시편 23편이 울려 퍼졌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중략...“

이 시편 23편은 신실한 기독교 신자인 이 여사가 평소 좋아하는 구절로, 시의 작자는 다윗이다.

이 여사 임종 직전 김홍업 전 국회의원과 김홍걸 더불어민주당 국민통합위원장 등을 비롯한 가족들, 동교동계 의원 등이 모두 함께 시편 23편을 낭송했다고 민주평화당 최경환 의원이 전했다.

최 의원은 "찬송과 성경을 읽을 때 이 여사님도 같이 부르려고 하시는 것처렴 보였다"고 전했다.

1922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 여사는 이화여고와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서 교육학을 전공했다. 6·25전쟁 뒤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국내에서 여성운동가로서 여성인권운동을 이끌었다.

이 여사의 삶은 1962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부부의 연을 맺으면서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이 여사는 이후 김 전 대통령의 인생 동반자이자 정치적 동반자로, 김 전 대통령과 함께 '행동하는 양심'으로 현대사의 거친 길을 걸어왔다.

'이희호가 없는 김대중을 생각할 수 없고, 김대중 없는 이희호를 생각할 수 없다'고 이야기할 만큼 두 사람의 사이는 각별했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이 민주화 투쟁 일선에 나설 때 정신적 지주로서 그를 지지했다. 본인 역시 민주화 투쟁 동지로서 역할을 다했다.

이들의 힘든 여정은 1971년 김 전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과 붙은 대선에서 46% 득표로 선전했지만 낙선하면서 시작됐다.

1972년 유신 독재가 시작되고 박 전 대통령의 '정치적 라이벌'로 불렸던 김 전 대통령은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 여사는 당시 정보기관의 감시를 피해 김 전 대통령에게 "더 강한 투쟁을 하시라"며 그를 지지하기도 했다.

1973년에는 '김대중 도쿄납치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이 죽음의 문턱까지 가게 된 큰 시련이 왔지만, 이를 이겨내게 한 것도 역시 이 여사의 도움이었다.

그러나 이후 김 전 대통령이 정치 활동을 금지 당하고 가택연금, 옥고를 치르면서 이 여사도 함께 고난의 시간을 보내게 됐다.

1979년 박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뒤 잠시 정치 활동이 재개됐지만,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1980년 김 전 대통령이 내란음모 사건으로 수감되고 사형을 선고받으면서 다시 위기가 찾아오기도 했다.

이 여사는 이 고난의 기간 유신 독재와 신군부의 탄압에 맞서 싸웠으며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다. 이 여사는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정권과 타협하지 말라며, 김 전 대통령이 신념을 지키도록 힘을 줬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이 옥고를 치르고 죽음 앞에 설 때마다 전 세계 유력 인사들에게 호소력 짙은 편지를 보내 구명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1997년 12월 김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이듬해 2월부터 2003년 2월까지 영부인으로 청와대 생활을 했다. 이 기간 국민의 정부에서 행정부 최초로 여성부가 설치되는데 기여를 하기도 했다.

이 여사는 지난 2009년부터 김대중 평화센터 이사장으로 지내며 김 전 대통령의 유지를 받아 남북관계와 평화 증진, 빈곤 퇴치 등을 위해 힘썼다.

그러나 이 여사는 지난 3월부터 병세가 악화돼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온 것으로 전해졌다. 가족과 동교동계 등은 이 여사의 병세가 악화될 것을 염려해 지난 4월 장남인 김홍일 전 의원의 별세 소식도 전하지 않았다.

김대중평화센터 관계자는 "이 여사의 장례 방식이나 절차 등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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