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리 트루먼
[김승혜 기자]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암호명 '폭풍'이란 이름으로 남침을 시작했다.

당시 미국측에서 맨먼저 북괴의 남침사실을 동경에 있는 다이이치 빌딩의 맥아더 사령부에 알린 이는 주한 미국대사 존 뮤쵸였다. 신혼여행에서 갓 돌아온 당직장교 였던 알랙사더 헤이그 중위( 레이건 대통령 때 국무장관)는 뮤쵸 대사로 부터 처음 전화로 남침사실의 소식을 듣고 다시 알몬드 소령에게 보고 이를 다시 맥아더 장군에게 보고하여 워싱턴 D.C에 까지 이르렀다.

당시 6월 25일 아침 주한 美 John Muccio 대사와 MacArhur 사령부의 당직장교 Alexander Haig 중위간에 나누었던 대화다.

The large numbers of North Korean troop have crossed the 38th Parallel early this morning .
A full-scale invasion was under way.
"Lieutenant, "this is not a false alarm".
Haig relayed the message to MacArthur's Chief of Staff, General Ned Almond, who would in turn inform MacArthur.
Before doing so, however, Almond wanted to make sure of the facts.
Many past warnings of "imminent" attack had turned out to be just cries of wolf.

무쵸: 오늘 새벽 북한군이 대거 38선을 넘었네. 전면적인 침공이 진행 중이네.중위, 이건 거짓 경보가 아니야".

헤이그 중위는 맥아더의 참모장 네드 아몬드 장군에게 이 메시지를 전달했고 다시 그는 맥아더에게 차례로 전달했다.
그러나 그렇게 보고를 하기전에 아몬드 장군은 침공사실을 확실한 진위여부를 알고 싶어했다.
과거의 많은 임박했던 침공의 경고들이 거짓으로 판명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Missouri 주 Independence의 고향에서 휴가중인 Harry S. Truman 대통령은 Dean Acheson 국무장관의 첫 보고를 받고 "개새끼들, 이놈(소련을 지칭)들은 한국을 침략하여 재미를 보아 그다음에 이란을 침략하여 중동의 석유를 장악하려고 하고 있다"고 격노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고향에서의 휴가을 취소하여 D.C로 돌아와 다음날 막바로 UN으로 날아가 대한민국을 지원토록 호소를 했는데 한국전쟁에 즉시 개입을 하기위하여 美의회(상하원)를 찾지않고 UN을 택한 이유는 비준등 여러가지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풍전등하의 대한민국에 신속하게 개입을 결정한 트루먼 대통령의 탁월한 지도력도 있지만 당시 NYT의 반공매체, 장개석 총통의 美공화당에 대한 강력한 반공로비 및 메카스즘의 열풍에 공격을 당한 심적변화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미국이 3년간 한국전쟁에 뿌린 전비(the war expenditures)는 남북전쟁 당시 南北이 4년간 뿌린 비용의 12배, 세계제1차대전때 뿌린돈의 3배로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였다.

트루먼 대통령은 북괴의 침공후인 7월에 Louis Johnson 국방장관을 전격적으로 해임하고 관록이 있는 유명한 거물 Geoge Marshall 국무장관을 이보다 다소 격이 낮은 국방장관으로 자리를 옮기게 하여 한국전쟁을 수행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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