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혜 기자] 지난 2016년 최진석 저자가 쓴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은 노자의 철학이 '우리'보다 '나'에 집중하는 것이라면, 관계로 구성된 이 세계에서 공통된 관계로 묶인 존재들은 어떻게 사유할 수 있을까에 대한 명쾌한 답을 일러준 책이다.​

책의 결론에 '자기'가 지속적으로 강조된다. '자기'역시 관계의 결과물이라면, 노자의 '자기'는 기존의 '나'와 '개인'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는가?

결국 바람직한 삶이 아니라 바라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노자는 자연의 존재로부터 사유의 영감을 얻었다. 추함이 있어야 아름다움이 있고, 악이 있어야 선이 보인다. 도덕은 도와 덕을 붙인 단어로 자연의 특성을 기반으로 객관적, 보편성이 있어야 한다. 가장 아름다울 때는 '진실은 알지만 기다리고 있을 때다'. 진실에도 기다림이 필요하다. 어떤 것이 진실이라고 확신할 때, 그 진실이 아직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반대편의 힘과 함께 생각하지 않으면 그 확신은 광신이기 쉽다.

세상 살이는 봄날 얼음이 풀리듯이 경계가 모호하다. 시대가 바뀌어서 각자의 역할을 과거와 불일치한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불일치된 현상을 고수하려는 것이 인간의 집착이다. 자연의 섭리를 알 때 집착을 버릴 수 있다.

바람직한 것과 바라는 것이 상충될 때, 어떤 것을 택해야 하는가? 스스로 왜 바라는 가를 먼저 따져보고, 도덕적이면 바라는 것을 해야 한다.

우리가 배우는 목적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다. 배움이 수단이고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다. 배움이란 날마다 남이 만들어 놓은 개념, 신념, 이념을 덜어내서 세계를 보여지는 그대로 자율적으로 보고 주도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을 길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헛똑똑이들은 표현할 때 거칠고 갈등이 심하며 선명성 경쟁이 하늘을 찌른다.

길가에 돌멩이 하나도 존재 이유와 가치가 있는데 하물며 사람이 어떻게 사는 이유와 가치가 없겠는가?

대부분의 사랑은 사랑하지 않아서 깨지는 게 아니라 너무 사랑해서 깨지기도 한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듯 캐묻다가 사랑에 금이 가게 된다. 타인을 아는 자는 지혜로울 뿐이지만, 자신을 아는 자라야 명철하다.

통치자가 자신의 위치에 도취되어서 고귀하게만 통치한다면, 낮은 위치에 있는 백성들의 지지를 잃는다. 높음은 낮음을 기초로 한다. 이 때문에 통치자는 스스로를 낮춰 부르는 것이다.

높을 때 낮음을, 고귀할 때 비천함을 조합하여 반대의 입장까지 자각해야 한다. 경계를 품은 사람은 함부로 진리임을 확신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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