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이 3월 6일부터 11일까지 개최한 '남과 북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사진전' 갈무리
[심일보 대기자]멀게는 1991년 고(故) 김학순 할머니에서부터 영화 <아이캔스피크(I Can Speak)>의 실제 모델이었던 강일출 할머니, 그리고 지난 3월 2일 별세한 고(故) 곽예남 할머니까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소식을 듣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북한에도 수많은 '김학순'이, '강일출'이, '곽예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는 얼마나 될까.

지난 3월 11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아트센터 본전시장 1층에서 '남과 북 일본군'위안부'피해자 사진전 : 만나다, 그리고 보듬다'가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주최로 열렸다.

그런데 이 작업을 담당한 이는 다름 아닌 일본의 사진가 이토 다카시다. 그는 1998년부터 10년간 북측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마흔 번 가까이 북한을 찾았다. 가해국의 국민으로서, 그리고 북한에 쉽게 갈 수 없는 남한 국민을 대신해 그는 고된 여정을 자처했다.

이토 다카시는 "한국의 위안부 마찬가지겠지만 북한 측 피해자들 또한 일본에 대한 분노와 한이 굉장히 강했다"고 했다. 가해국 국민인 그에게 물건을 던지는 피해자도 있었다. 그는 그러나 '스스로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일본 정부나 국민이 과거 역사를 자꾸 잊으려는 식으로 가고 있는 풍조가 강해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과거 일본이 아시아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를 후세에게 전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이라는 나라를 위해서다. 일본인으로서는 외면하고 싶고 잊고 싶은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본인 스스로가 과거의 문제를 포착하고 기록함으로써 과거와 같이 침략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배워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아시아의 피해자>저서 3권에서 당시 참혹한 현장을 이렇게 적었다

 

▲ 운남성 송산(미얀마 근처)에서 마쓰야마 부대가 대패후 퇴각하면서 살해한 위안부 시신들

나는 올해 5월에서 6월에 걸쳐 평양에 19일간 체류하면서 많은 피해자들을 취재했다.

그중에서도 일본군에 의해 성노예가 된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의 증언과 그들의 몸에 깊이 새겨진 상흔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일본군 위안부,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피폭된 사람, 강제 연행으로 중노동에 종사한 사람, 징병으로 군인이나 군속이 된 사람 불교도로서 탄압받은 사람까지 모두 21명을 만났다.(중략…..)

그들은 마음의 상처뿐만 아니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의 끔찍한 육체적 상처를 간직하고 있었다.

등에 일본도 자국이 남은 버마에 연행됐던 정송명(鄭松明,1924년생)씨

조선인 여성 400명 중 절반이 싱가포르에서 하선하고 나머지는 랑군으로 갔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한달이나 걸려 타이까지 걸어왔습니다. 위안부 45명과 남성 15명의 조선인이 2척의 배를 타고 귀국했습니다. 너무 피로해 더이상 상대 못하겠다고 하자 마에다 중위가 일본도를 뽑아 내리쳤습니다. 심한 상처인데도 약 한번 발라주지 않아 2년간이나 상처가 아물지 않았습니다....

유선옥씨(1923년 함경북도 경흥 출생)

배에는 배꼽 위쪽에서 아래쪽까지 크고 오래된 상처가 있었다. 군의관이 자궁째 태아를 들어낸 수술의 흔적이다. 기장밥을 끼니로 할 정도의 빈농이었는데,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미야모토가 공장 일자리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는 따라나섰다.

다른 여성 2명과 함께 끌려간 곳은 중국 동북지방의 목단강.따라온 걸 후회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다케코라는 이름이 붙여진 그는 처음에 하루 5∼6명 정도, 많을 때는 15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기절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면 다시 군인들이 덮쳐왔다.

불행히도 임신하게 되자 낙태 겸 재임신 방지를 위해 태아가 있는 자궁을 들어냈다.....

<반항하면 죽여버립니다. 미쓰코라고 불리던 소녀는 목을 쳐 죽였습니다.

여기에 있었던 15명 정도의 여성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5∼6명 정도...조국이 해방된 뒤에도 거지 같은 유랑생활을 하다가 1948년 10월에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1981년에 사망한 남편에게도 제 체험을 끝까지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몸서리치는 증오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한 일본에 대해 복수하는 일에만 골몰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때의 군인을 찾아낸다면 찔러죽이고 싶어요......>

후퇴하면서 위안부 막사에 수류탄을 던져 넣어 집단 폭살시킨 일본군

이경생(李京生,1917년생)씨의 배에도 유씨와 비슷한 상처가 있었다. 지주 집에서 일하고 있던 이씨는 끈으로 묶인 채 경상남도 창원의 군수공장으로 끌려갔다.

일본 왕을 위해 몸을 바치면 좋은 대우를 받는다고 장교가 말했다.

하룻밤에 10∼15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그리고 임신..아직 쓸만한데 하며 자궁 째 태아를 들어냈다.

“일본 때문에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혼자 있을 땐 옛 생각이 떠올라 눈물이 납니다. 여성을 성욕처리의 도구로밖에 보지 않고 낙태와 불임시술로 자궁까지 들어내는....”

산 사람 삶아 강제로 먹이기도… 정옥순(鄭玉順)씨(1920년 함경남도 풍산 출생)

1933년 6월3일 우물에서 물을 긷다가 제복 입은 남자 3명에게 연행됐고, 끌려간 파발리 주재소에서 강간당했다.

저항하다가 눈을 얻어맞아 이때부터 왼쪽 눈이 안 보이게 됐다.그뒤 10일이 지나 7∼8명의 군인에 의해 트럭에 실려 혜산(惠山)에 있던 일본군 수비대에 연행됐다. 그곳에는 각지에서 끌려온 여성들이 많이 있었다.정씨는 하루에 약 40명이나 되는 군인을 상대한 일도 있어 자궁출혈이 심했다.

그해 8월27일, 칼을 찬 군인이‘군인 100명을 상대할 수 있는 자가 누군가’하고 물었다.

그때 손을 들지 않은 15명의 여성은 다른 여성에 대한 본보기로 죽였다. 발가벗긴 여성을 군인이 머리와 발을 잡아 못박은 판자 위에 굴렸다. 분수처럼 피가 솟고 살덩이가 못 판에 너덜거렸다. 그 다음 군인들은 못판 위에서 죽은 한 여성의 목을 쳐 떨어뜨렸다. 정씨와 다른 여성들이 울고 있는 것을 본 중대장은 “위안부들이 고기가 먹고 싶어 운다”며 죽은 여성의 머리를 가마에 넣어 삶았다.그리고 그녀들에게 마시도록 했다.

그 수비대의 대대장은 니시하라, 중대장 야마모토, 소대장은 가네야마였으며, 위안소 감독은 조선인 박이었다고 했다.

매독 감염을 숨겼다고 달군 철봉을 자궁에… 1933년 12월1일에는 한 여성을 장교가 자궁에 철봉을 꽂아 죽여버렸다.

다음해 2월4일에는 매독에 걸린 사실을 신고하지 않아 장교에게 병을 옮겼다는 이유로 한 여성이 피살되었다.

일본군이 벌겋게 달군 철막대를 자궁에 넣었고 여자는 즉사했다. 뽑아낸 막대에는 검게 탄 살점이 달려 있었다.

혜산의 부대는 정씨를 포함한 여자들을 이끌고 중국으로 이동해 대만에서 가까운 곳에 얼마 동안 있다가 1935년 9월에 광둥(廣東)에 도착, 이듬해 6월15일 정씨를 포함해 12명의 여성이 도망쳤는데 이틀 후 모두 붙잡히고 말았다.

도주 후 잡혀서 물고문, 바늘 달린 몽둥이 고문, 문신고문 후 살해

맨처음 도망치자고 제안한 자를 가르쳐주면 주모자 이외는 모두 살려주마고 했으나 아무도 고해바치지 않았다.

정씨는 철봉으로 머리를 세차게 얻어맞았다. 이때의 상처는 지금도 남아 있다. 다음에는 물고문을 당했다.

고무 호스를 입에 넣고 물을 틀어댔다. 부풀어 오른 배 위에 판자를 올려놓고 군인들이 올라서서 널뛰기하듯 뛰었고, 입에서 물이 뿜어져 나왔다. 그런 일이 몇 번인가 되풀이되면서 기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더욱 잔인한 행위를 했다.

정씨와 여자들의 발목을 끈으로 묶고 거꾸로 매달아놓고 바늘이 수두룩하게 박힌 검은 몽둥이를 들고 와 먹물을 바른 뒤 정씨와 여성들의 입속에 몽둥이를 쑤셔 넣었다. 정씨는 앞니가 부러지고 격렬한 통증으로 기절했다.

문신은 온 몸에 새겨졌고 군인들은 처음부터 죽일 셈으로 여성들에게 문신을 했다. 살해된 후 마차에 실려온 여성들을 들에 팽개치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 있던 중국인 남자가 일본인이 사라진 뒤, 숨이 남아 있던 여자 두 명을 옮겨 약 두 달간 간호해줬다. 그때 정씨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

그는 문신한 자국을 보여줬다. 정씨가 손가락으로 뒤집어 보인 입술 안쪽엔 선명한 짙은 보라색 반점이 있었다. 좀 흐릿했지만 혓바닥에도 푸르스름한 반점이 몇 군데 있었다. 수많은 바늘로 혀를 찔렀기 때문에 그 뒤로는 말하기도 곤란해졌으며 지금도 완전히 낫지는 않았다고 했다. 등 아래쪽은 척추를 따라 둥근 반점이 염주처럼 줄줄이 그려져 있었다.

가슴과 복부 문신을 보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무엇을 그린 것인지 판별할 수는 없었지만 아이들 낙서 같은 무늬가 뚜렷이 남아 있었다. 일본 군인들은 정녕 그 잔인한 행위를 즐기면서 했음이 분명했다.

내선일체를 내세우며 지배하고 있던 조선에서 일본은 젊은 여성들을 납치해 버러지처럼 짓뭉갰다.

정씨의 몸에 새겨진 문신은 그 어떤 많은 얘기를 듣는 것보다도 일본이 저지른 식민지 지배의 실태와 일본 군대의 악랄한 본질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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