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금융투자 CLUB 1 WM 금융센터 박문환 이사(샤프슈터)
본격적인 주제를 설명드리기에 앞서, 3주 전에 일본의 소재 수출 제한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드렸는데요. 우리네 시장에서는 여전히 일본이 제한하기로 한 소재에 대해 대체 가능하다고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일본인들이 지금까지 수상했던 노벨상은 25개 정도인데요, 그 중에 80%가 기초과학 분야였습니다. 말로는 그럴싸 해보이고 쉬워 보입니다만, 소재 산업에 대해 우리가 단기간에 뛰어 넘을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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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반도체 가격이 3주 째 오르고 있으니 안심이 되시나요?

마이크론과 하이닉스 등의 감산에 더해 일본의 소재 공급이 중단되면 반도체가 부족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세트메이커들의 재고 확충 수요가 원인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일본은 현재 우리네 반도체 산업에 대해서는 털끝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불화아르곤이나 불화크립톤 등의 소재는 지금도 수출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노린 것은 범용 생산품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 먹거리, 좀 더 구체적으로 EUV공정과 관련된 것들이라는 것을 다시 강조드립니다. 지금 당장 우리네 경제에 별 자각 증상이 없다고, 이 문제를 안일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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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본론으로 들어가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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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린 시절 보았던 역사 교과서에서는 거란의 대군을 세치 혀로 철군시킨 <서희>를 그저 말 잘하는 달변가 정도로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그럼, 소손녕은 바보 멍청이 였을까요?

변변한 교통인프라도 없던 시절에, 달구지에 가마솥 달고 엄청난 비용을 들여 대군을 이끌고 왔다가 그냥 갔으니까요.

그것도 그냥 간 것이 아니라 강동 6주까지 고려에 내주었으니 바보 멍청이라고 생각할만도 합니다.
하지만 말이죠...

낙하산이 아니라면, 멍청이가 대장군의 위치까지 절대로 오를 수는 없어요. 정상에 있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반드시 있는 겁니다. 설령 허저처럼 싸움만 잘하는 전문 싸움꾼이라도 그 주변에 명석한 참모들이 포진되어 있지요. 서희가 말을 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국제 정세를 손바닥처럼 꿰뚫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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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거란은 중원의 강자 송나라와의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비록 고려가 작아지기는 했지만 한 때 중원을 호령하던 고구려의 후손이었고, 송나라와는 늘 친하게 지냈었기 때문에 고려가 배후를 칠까봐 두려웠을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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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이 맞다면, 처음부터 소손녕은 싸울 생각 조차 없었을 겁니다. 군사를 왕창 몰고 와서 겁을 주어 항복을 받아내려는 속셈이었지요. 당시 거란의 대군을 보고 국토의 일부를 떼어 주고라도 화친하자는 쪼다도 있었습니다만, 국제 정세를 꿰뚫고 있던 서희는 소손녕과 거래를 합니다. 거란이 송을 치더라도 배후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의 이행을 위해서, 그러니까 고려 내의 친송파를 설득하기 위해서 선물을 요구한 것이 바로 강동 6주였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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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는 신궁의 나라였습니다. 결코 얕잡아볼 상대는 아니었지요.

만약, 그날 소손녕이 오판을 했더라면 어땠을까요?

고려와 싸움을 선택했다면 엄청난 병력 손실을 감수해야하고 무엇보다도 중원의 꿈을 접어야합니다. 게다가 뒤에서 송나라가 공격한다면 난감해질 수도 있는 처지였습니다. 물론, 우리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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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만약 소손녕이었다면, 강동 6주를 주고라도 고려와 친교를 맺는 것이 장차 송나라를 치기 위해서 매우 실익이 큰 거래였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한마디로 윈윈할 수 있는 거래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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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땅에 정치인이 항상 현명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란 때 토요토미는 전쟁을 무려 7년 동안 준비했는데요, 당시 우리네 정치인들은 하루 짜리 감정으로만 대응하다가 국민에게 피를 흘리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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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 호란 때에도 마찬가지였지요. 형제의 예를 지켜준다면 돌아가겠다고 했었지만 어리석은 정치인들은 그저 니가 옳네 내가 옳네 싸울 궁리만 했지요. 멍청한 정치인에, 애꿎은 국민들만 피를 흘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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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피지기입니다. 저들의 무엇을 원하는 지를 분명히 알면, "서희의 담판"은 언제든 가능한 겁니다.
물론, 부득이 전쟁을 선택해야한다면, 결코 상대를 쉽게 봐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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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미국이 일본과의 전쟁에 앞서 일본을 알기 위해 미국인(루스 베네딕트)이 쓴 책입니다. 미국의 입장에서 일본은 하찮은 상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전쟁 전에 일본을 면밀하게 파악하려 한 것이죠. 적을 알지 못하면 변수가 많아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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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우리는 일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우리들 중에서 대다수는 그냥 "아베가 소재 수출을 금지했다."~ 이것 말고는 별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정치적 의도였을 것이다...혹은 우리네 메모리 견제가 목적이다..." 등등 여러가지 예상을 하고 있지만 그냥 우리들 예상일 뿐입니다.

적을 모르는 상태에서 어떤 예상이나 전략은 모두 무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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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볼까요?

한국을 화이트 리스트에서 제외하는 방안에 대한 의견 수렴이 있었지요? 우리가 생각할 때... "일본에게 우리나라는 최대 납품처인데, 판로가 막히게 된다면 그들 역시 고통스러울테니 일본의 수출기업들이 상당부분 반대할 것."이라고 예상했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3만건이 넘는 의견이 접수됐고, 그 중에서 90% 이상이 '찬성'하는 의견이었답니다. 우리들의 예상이 또 빗나간 것이죠.

앞서 거론해드렸던 <국화와 칼>에서, 일본인들은 국가가 뭔가를 시작하면 설령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해도 적극적으로 따라간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들과 맞서 싸우려면 최소한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득이 전쟁을 선택하려면, 과연 내가 이길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되는 지는 알고 칼을 빼야 되지 않겠습니까?

상대는 칼을 휘두르는데, 내 모가지는 무쇠로 만들었으니 걱정 없다고 호언장담하다가 작살났던 것을 이미 왜란 때 충분히 경험하지 않았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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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제 생각을 말씀드리죠. 이런 말씀을 드리면 저를 친일파로 몰고 싶으신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일본은 처음부터 우리와 싸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저는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아직 수습할 수 있는 기회도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오로지 싸움(반도체 견제)이 목적이었다면 기습 공격이 정석인데요, 그들은 경제 침공 직전에 무려 3번의 경고를 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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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경고는 지난 1월에 있었지요. 한일 청구권 협상과 관련해서 외교 위원회를 열 것을 요구했지만, 우리측에서는 정부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며 기업이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고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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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는 지난 5월, 중재 위원회에 제 3국을 참여시키자고 제안했습니다만 우리는 역시 같은 생각을 고수하며 중재위 설치를 거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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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경고는, 6월 19일이었습니다. 제 3국이 중재 위원회 3인을 전원 지명하게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지만 그 때도 우리는 중재위 설치를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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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부가 중재위 설치를 거부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전 정부에서, 강제 징용과 관련해서 이미 일본으로부터 3억 달러를 받았거든요. 그 돈을 징용 피해자에게 썼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그 돈을 이 땅에 고속도로 놓고 중화학 공업 발전을 위해 쓰는 바람에 정작 징용 피해자들에게 돌아간 돈은 거의 없었지요. 배상이 적고 많고를 떠나서 이미 법적으로 끝난 일에 대해서 중재위를 만든다면 우리가 이길 가능성은 사실상 매~우 희박합니다. 그러니, 우리 정부는 중재위는 필요 없고, 그냥 기업과 기업이 1:1로 출연하자는 주장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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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우리는 민족성이 전혀 다른 나라입니다.

우리는 덤과 여백을 좋아하지만, 일본은 규격화된 것을 좋아하지요. 서로의 가치관이 다르니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말끝마다 우리에게 신뢰할 수 없다고 한 것은 "이전 정부가 약속한 부분을 뒤집는다"는 것이기 때문에 바로 여기에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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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상황이 녹록치 않습니다. 수출 관련 이익 단체들이 화이트 리스트에서 배제하는 것에 대해 무려 90%나 찬성했다면, 8월 중순 전후로는 화이트리스트로부터 탈락이 거의 기정사실화 될 것 같습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전략을 수립해야만 하는데요, 우리 경제에서 반도체는 GDP의 6%를 차지합니다. 백색국가에서 제외된다면, 우리의 미래 먹거리에 치명상을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매우 속상한 일입니다만, 그들이 제한하겠다는 소재를 지금 당장 우리의 힘으로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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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TO에 제소한다고 당장 해결되지 않습니다. 또한 미국에게 말한다고 해결될 수도 없습니다.우리는 국민의 절반이 반미지만, 일본은 90%가 친미입니다. 당연히 우리보다는 일본에게 좀 더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건 마치, 철수에게 눈탱이 맞고 철수네 형에게 이르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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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이번 주 <존 볼튼>은 일본과 한국을 동시에 방문했습니다만, 중재 의사를 묻는 우리네 기자들에게는 두고 보자고만 했고, 일본의 고노따로 외상에게는 또박 또박 "적극적으로 중재할 의사가 없다."고 발언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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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수모를 절대로 잊어서는 안됩니다. 아베의 행동이 비겁하고 졸렬하지만, 지금은 그들과 전격전을 벌려 우리가 이길 확률은 매우 작고 우리에게는 우군도 없습니다. 부득이 전쟁이 선택된다면 피하지 않겠습니다만, 그보다 먼저, 서희처럼 현명하게 윈윈할 수 있는 방법을 우선적으로 찾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두 개의 화살이 남아 있습니다. 9월 17일 유엔총회, 그리고 10월 나루히토 일왕의 즉위식입니다. 이 때가 우리의 자존심을 크게 해치지 않고 그들의 칼날을 피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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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가 소손녕과의 담판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감히 넘볼 수 없는 든든한 국방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네 국민들은 사력을 다해 불매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국민의 분노와 염원을 든든한 배경삼아, 문제인 대통령께서 그들과 윈윈할 수 있는 딜을 준비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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