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일보 대기자]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6일 한일관계 악화와 관련해 “청구권 협정 등 국가와 국가간 관계의 근본에 관계되는 약속을 먼저 확실히 지키기 바란다”고 말했다.

NHK 등에 따르면, 아베 총리는 이날 히로시마에서 열린 ‘원폭의 날’ 평화기념식전을 마친 뒤 가진 기자회견에서 “한국이 한일 청구권협정을 위반하는 행위를 일방적으로 하면서 국제조약을 깨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아베 총리는 이어 “한국측에 적절한 대응을 강력히 요구한다”고 말해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판결과 관련해 한국 정부가 대응조치를 해야 한다는 기존 주장을 되풀이 했다.

그렇다면 아베 총리는 왜 이시점에서 한일 청구권 협정을 거론하고 았으며 협정의 진실은 무엇인가

네이버 지식백과는 한일 청구권 협정(韓日請求權協定)은 한일 기본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대한민국과 일본 사이에 1965년 체결된 협정이다. 정식 명칭은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Agreement on the Settlement of Problem concerning Property and Claims and the Economic Cooperation between the Republic of Korea and Japan)이다. 이 협정에서 일본은 한국에 대해 조선에 투자한 자본과 일본인의 개별 재산 모두를 포기하고, 3억 달러의 무상 자금과 2억 달러의 차관을 지원하고, 한국은 대일 청구권을 포기하는 것에 합의하였다고 정의하고 있다.

지난 1일 <선데이저널>은 '1966년 대외비 CIA보고서'를 인용, 그 굴욕적 한일협정의 내막을 단독 보도했다.

매체에 따르면 한일 청구권 협정은 일본에 유리한 굴욕의 협정이라고 전했다.

이 협정의 골격은 이미 1962년 11월 12일 ‘김-오히라’메모로 불리는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일본외상사이에 타결됐지만, 1963년 대통령 선거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해,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이 최종 타결을 미뤘고, 대통령에 당선된 뒤 마무리협상에 나서 1965년 최종 조인된 것이다.

이 조약은 한일국교정상화를 규정한 본조약과 일본거주 한국민의 지위, 어업, 청구권, 문화재 반환 등 4개의 부속협정으로 구성돼 있지만 가장 주목을 끄는 부분은 이른바 청구권에 따른 보상내용이다.

한일청구권협정등 국교정상화문제는 지난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이 체결된 뒤인 같은 해 10월 20일을 시작으로 양국이 교섭에 나섰지만, 좀처럼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 민주당 장면정권이 들어선 뒤 한국이 일본에 받아야 할 돈, 이른바 ‘청구권 8개 항목’을 매우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1960년 10월 20일 5차협상에 나섰지만 결렬되고 그 이듬해 5.16쿠데타가 발생한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같은 해 10월 20일 제6차 회담을 했지만 합의를 이루지 못했고, 박정희가 같은 해 11월 미국방문길에 일본에 들러 경제적 지원을 요청함으로써 정치적 타결을 모색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특사로 나서서 오히라 일본외상과 담판을 벌였고 그 합의가 바로 ‘김-오히라’메모인 것이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1962년 8월부터 일본과 협상에 나섰고 8월에 3차례, 9월에 3차레등 6차례 협상을 한뒤 7차협상에 해당하는 같은해 10월 20일과 8차협상인 같은해 11월 12일 두차레에 걸쳐 김종필이 오히라와 담판을 벌여 청구권액수에 합의한 것이다. 그리고 같은해 12월 13일 양국정부의 추인을 받음으로서 가장 큰 걸림돌이 해결된 것이다.

그동안 김-오히라 메모내용은 공개됐지만 양측의 주장 등 협상내용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일청구권협정과 관련해 1962년부터 1965년까지의 주한미대사관과 주일미대사관 등이 미국무부에 타전한 외교전문을 입수, 분석한 결과 청구권타결액수는 일본에 유리한 합의였음이 밝혀졌다.

박정희정권, 당초 7억달러 요구가 3억달러로

‘김-오히라’ 1차 담판을 사흘 앞둔 1962년 10월 17일 버거 주한미국대사는 한일청구권협정과 관련한 전문을 국무부로 타전했다. 버거대사는 10월 17일 최덕신외무부장관으로 부터 김종필의 일본방문과 관련한 한국정부의 입장을 들었다고 적고 있다.

최덕신은 1980년대 초 북한으로 망명한 인물이다. 이 자리에서 최씨는 ‘10월 14일 박정희의장, 국무총리, 김종필, 김동하 최고회의외교국방위원장등이 모임을 갖고 장시간 협상전략을 논의했다’고 말했다. 이 회의에서 청구권액수와 관련, ‘무상제공 청구권 3억5천만달러, 장기저리정부차관 2억5천만달러등 민간상업차관을 제외한 유무상 요구액을 6억달러로 확정했고, 김종필은 장기저리정부차관 액수에서는 협상여지가 있지만, 무상제공청구권액수는 바꾸지 않을 것 같다’고 버거대사에게 설명했다.

또 ‘김종필은 장기저리정부차관을 2억달러로 낮출 수도 있지만 그 이상의 양보는 서울의 승인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박정희군사정권은 당초 7억달러를 요구하다 조금씩 양보해 무상 3억5천만달러는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선으로 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 마지노선은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고 만다.

한국 측은 ‘김-오히라’ 협상이 타결된 이틀 뒤인 1962년 11월 14일에도 버거 주한미국대사에게 양측의 주장과 타결내용을 상세히 설명했고 버거대사는 이를 본국에 보고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문서를 통해서도 ‘김-오히라’ 협상은 한국 측 입장이 아닌 일본 측 주장대로 타결됐음을 알 수 있다. 버거대사는 이날 김종필이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 미국초청에 대해 사의를 표한 뒤 한일 청구권협정타결 내용을 설명했다고 적고 있다.

김종필은 무상제공청구권과 관련, ‘한일청산계정[오픈 어카운트]상 대일채무 4573만달러를 포함, 3억달러로 타결했다’고 설명했다.

즉 일본이 제공하는 무상자금에는 기존 한국이 일본에 갚아야 할 돈 약 5천만달러를 제외하면, 실제로는 2억5천만달러 상당인 것이다. 또 무상제공청구권액수 협상에서 ‘오히라는 대일채무를 제외하고 2억5천만달러를 주장한 반면, 김종필은 대일채무를 포함, 3억5천만달러를 주장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대일채무를 포함, 3억달러에 합의함으로써 일본 측 주장이 그대로 관철됐고, 한국은 5천만달러를 양보한 셈이다.

일, 무상으로 주는 돈은 깎고, 빌리는 돈 늘려

김종필은 일본이 이 무상제공청구권을 10년에 결처 매년 3천만달러씩 제공받는데 합의했으며 이 역시 일본에 유리한 것이다. 이 전문에는 ‘당초 일본은 12년에 걸쳐 제공하겠다고 주장했고, 김종필은 6년 내에 3억달러를 모두 달라고 요구했다’고 기록돼 있다. 결국 10년에 합의됨으로써, 이 부분에서도 한국 측이 큰 양보를 했다.

흔히 유상이라고 표현되는 장기저리상업차관에 대한 양측의 주장도 이 전문에 기록돼 있다. 양측은 총액 2억달러, 연이율 3.5%, 7년 거치 20년 상환에 합의했다. 일본 측은 당초 총액 1억달러, 연이율 5.5%, 5년거치 17년 상환을 주장했고 김종필은 총액 2억5천만달러, 연이율 3.5%, 7년 거치 20년 내지 30년 상환을 주장했다. 협상과정에서 융자금은 늘어난 반면, 상환기간은 대폭 짧아졌다. 당초 한국정보 요구대로라면 7년을 거치한 뒤 그 이후부터 20년 내지 30년 뒤 원금을 모두 갚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최소 27년에서 37년 뒤 모두 갚는 것이다. 그러나 7년 거치 20년 상환으로 결정됐고, 그나마 7년 거치기간도 20년에 포함되는 것으로 합의됐다. 따라서 7년 동안은 원금을 갚지 않고 그 이후 20년 동안 원금을 모두 상환하는 것이 아니라, 13년 만에 원금을 모두 상환하는 조건을 한국이 받아들인 것이다.

이처럼 ‘김-오히라’ 담판은 한국의 당초요구는 물론, 일본이 내심 마지노선으로 정한 무상 4억5천도 받아 내지 못하고, 그나마 3억달러롤 깎아주면서도, 그 안에 대일채무를 포함함으로써 실제로는 2억5천만달러였다. 일본 마지노선의 절반을 조금 넘는 수준을 받아내는데 그친 것이다. 상업민간차관은 당초 합의는 1억달러였으나 1965년 조인과정에서 3억달러로 늘어났지만, 이 또한 무상으로 주는 돈이 아니라 빌리는 돈이다. 즉 일본은 무상으로 주는 돈은 깍고, 빌리는 돈을 늘리는 방법으로 생색을 낸 것이다.

그렇다면 박정희정권이 이처럼 굴욕적인 저자세로 합의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한국의 경제발전을 위해서 한시라도 빨리 돈을 들여와야 한다는 다급한 사정이 분명히 존재했다. 또 막 시작한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성공을 위해서도 달러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 같은 저자세 합의는 박정희 정권의 태생적 한계에 따른 것이다. 5.16쿠데타 뒤 대통령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기 위해 일본 측 기업들로 부터 불법정치자금을 조달함으로써 일본정부에 단단히 약점을 잡혔기 때문에 저자세가 불가피했던 것이다.

또 ‘일본기업들은 한국에서 독점적 사업권을 보장받기 위해서 돈을 지불했고, 공화당은 일본과 사업을 하는 한국기업으로 부터도 돈을 받았다. 일본에 정부미 6만톤을 수출한 8개 한국기업도 공화당에 11만5천달러를 지불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김종필에게 한일청구권협정을 조속히 진행시키라는 차원에서도 돈을 지불했다’고 적혀 있다는 사실이다. 즉 김종필이 한일청구권협정과 관련, 일본기업의 돈을 받았다는 것으로, 사정이 이럴진대 김종필은 일본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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