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태우 전 대통령과 장경우 전의원 (우)
폭도들과 대화는 무슨 대화야!

한 때 연속극 ‘모래시계’가 몰고 온 열풍은 대단했다. 급기야는 ‘모래시계 세대’라는 말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이른바 ‘4.19세대’ ‘6.3세대’하는 식으로 한 시대를 지칭하기에 이른 것인데, 글쎄 나는 80년대의 젊은이들을 가르키는 용어로 이 말이 적합한지에 대해서는 조금 회의적이다.

선명성도 부족할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정체성을 담아내기엔 너무 적합지 않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광주’로 상징되는 80년대의 젊음들을 뭐라고 지칭할 수 있을까? 그것은 후 일 역사에 미루기로 한다.

내가 여기에서 굳이 80년대의 얘기를 꺼낸 것은 이른바 80년대의 회오리 속에 나 역시 끼여 있었다는 점 때문이다. 물론 나는 여당 국회의원으로서 80년대 젊은이들이 말하는 ‘타도 대상’이었다. ‘모래시계 세대’와 대치점에 선 ‘6.3세대!’ 바로 이것은 나의 불행이고 곧 우리 시대의 불행이었다.

기자들은 할 일 없는 사람(?)

이재형 대표의 사임과 함께 진의종 전 총리가 당 대표로 취임을 했다. 진의종 대표는 옛날 운경 선생이 상공부 장관 시절 과장을 지냈던 인연 뿐 만이 아니라 운경 선생과는 학교 선후배 관계로 평소에도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그래서 그랬는지 진의종 새 대표는 나에게 ‘계속 보좌역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나는 ‘국회의원이 된 지 벌써 2년인데 이제 좀 다른 곳에 가서 배우고 싶습니다’는 말로 정중하게 사양을 했다. 그랬더니 ‘그럼 어디에 가고 싶냐’고 물었다.

“부대변인을 시켜 주신다면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내가 그 때 굳이 부대변인을 선택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처음 나는 당 출입기자들을 볼 때마다 ‘참 할 일 없는 사람들이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같이 와서는 신문이나 뒤적이고 있는가 하면 둘러 앉아 바둑이나 두고 심지어는 낮잠을 자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데 다음 날 신문을 보면 ‘언제 그렇게들 알아냈는지’ 나오는 기사들마다 무슨 첩보원이 따로 없는 것이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기자들에 대해 호기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한 때 신문기자가 되겠다며 시험을 준비하기도 했던 차에 기자들에 대한 나의 관심은 더 증가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당 출입기자들과 친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친해져도 기자는 역시 기자였다. 도무지 그 속이 오리무중인 것이다.

그런 저런 과정을 거치며 나는 언론의 중요성을 새삼 인식했다. ‘무엇을 하고 싶냐’는 말에 선뜻 부대변인을 선택했던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언론의 메카니즘을 이해하고 싶다는 것, 그것이 바로 내 선택의 이유였다.

민정당을 점거하라!

부대변인을 시켜달라는 나의 청은 흔쾌히 받아들여졌다. 바로 그 얼마 후 진의종 대표는 국무총리로 가게 되었고, 후임으로 정래혁 씨가 왔으나 취임 한 달도 못되어 정치적인 숙적이라 할 문형태 씨의 투서에 의해 정치현장을 떠나야만 했고, 바로 그 뒤를 이어 온 사람이 권익현 씨였다.

권익현 대표 시절, 대변인은 현재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내는 김용태 씨였다. 조선일보 편집국장 출신이었던 김용태 씨는 대구에 지역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귀향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대변인 귀향 시 중앙당에서의 언론활동 등은 자연히 부대변인인 내가 전담하다시피 하게 되었다.

나에게는 큰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나는 큰 사건을 겪게 되었다. 바로 민정당사 난입사건이었다. 당시 당사는 관훈동이었다.

그 날 나는 점심을 간단히 해결하고 한가한 틈을 타 이발소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막 당사 앞에 도착하는 순간, 저 앞에서 갑자기 몇 십 명의 사람들이 ‘와’하는 함성과 함께 후다다다다...달려오더니 당사로 뛰어 들어가는게 아닌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얼이 빠져 있는데, 불과 몇 초 후 몇 십명의 전경들도 그 뒤를 이어 당사로 뛰어 들어가고,동시에 터져 나오는 ‘탕탕’거리는 소리, 고함소리, 뭐를 무너뜨리는지 부숴대는지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당사를 울려대고 있는 가운데, 바로 뒤를 이어 무장한 전경들까지 새까맣게 당사 안으로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그 틈에서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연달아 터지는 최루가스와 당사가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소란 속에서 도대체 방향을 분간하기도 힘들었다. 겨우 당사를 빠져 나와 건너편에 있던 부속 건물로 들어갔다. 강당으로 쓰이던 건물이었다. 당직자들과 당사 안에 있던 사람들도 강당으로 몰려 들어왔다.

잠시 후에야 우리는 상황을 파악 할 수 있었다. 일련의 학생들이 민정당사를 점거해 버린 것이다. 당시 9층 건물이었던 당사의 맨 위층은 중앙집행위원회의 회의실과 의원 휴게실이 있었다. 학생들은 바로 그 곳을 점거한 것이었다.

학생들의 기민성은 정말 기가 막힐 정도였다. 불과 몇 분 사이에 언제 그토록 빨리 그 곳까지 올라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9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폭이 무척 좁아 겨우 3명 정도가 서면 꽉 찰 정도였고, 엘리베이터도 5명 정도가 탈 수 있는 아주 작은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조건이 학생들의 점거 농성에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그만큼 외부로부터의 차단이 용이했던 것이다. 하필 또 9층만은 계단 입구가 쇠문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 쇠문을 잠그고 엘리베이터를 9층에서 고정시켜 놓으면 병력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소용없었던 것이다. 치밀한 사전답사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학생들의 요구사항은 전체 다섯 가지였는데, ‘광주 학살 주법 처단’ ‘민정당 가락동 연수원사건으로 구속 된 학생들의 즉각 석방’ 이 모든 사태의 책임주체인 민정당의 당직자 총 사퇴‘등이었다. 지금 당장 해결이 가능한 사안도 아니었고, 학생들인들 그것을 모를 리는 없었다. 민정당의 점거 농성이 갖는 상징성과 언론의 주목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당사 안은 이미 전쟁을 치르고 난 것과 같은 폐허의 모습인데, 그 상태에서 전경들인들 어떻게 해 볼 수도 없었다. 폭풍전야와 같은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뒤늦게 소식을 들은 의원들도 하나 둘씩 강당으로 도착했다.

폭도들과 대화는 무슨 대화, 단전 단수 해!

학생들과 유일한 통로는 전화였다. 일단 나는 9층으로 전화를 걸었다.

“일단 진정하고 얘기 좀 해 봅시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유라도 좀 알아야 할 것 아니겠소?”

“당신은 누구요?”

“나는 장경우 의원으로 부대변을 맡고 있는데... 그럼 전화 받는 사람은 누구신가?”

“나는 이번 투쟁의 대표로 고려대 신방과 학생입니다.”

“아이구, 이 사람아, 나도 고대 출신이야! 이런데서 만났구만...그래 몇 학번.”

“일단 대표를 올려 보내십시오. 저희는 대표하고만 얘기하겠습니다.”

전화는 일방적으로 특 끊겨버렸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지금 대표는 자리를 비웠으니까, 이렇게 하면 어떻겠소. 우리가 대표단을 구성 해 올라갈테니 함께 협상을 해 봅시다.”

“...그럼 그렇게 하십시오.”

드디어 현장에 있던 의원들끼리 회의가 벌어졌다. 그 때까지 몇 번 전화를 주고받았던 나에게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들어가서 만나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일단 대표단을 구성해 올라가 보자는 내 의견에 의원들은 부정적이었다.

“지금 상당히 흥분들이 된 상태인데 지금 들어가면 잡힐 수도 있어요.”

“자칫 잘못하면 인질극 상황으로까지 갈 수 있어요. 상황을 좀 더 봅시다.”

경찰청장과 주용복 내무부장관까지도 부정적이긴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장담 못합니다.”

“그래도 일단 어렵게 창구가 마련되었고, 대표단을 구성해 함께 협상을 해 보자는데 좋다고 약속을 했으니까 올라가서 얘기라도 들어봐야 할 게 아닙니까?”

바로 그 때 권익현 대표가 도착했다. 그리고 갑자기 터져 나온 고함소리.

“폭도들과 대화는 무슨 대화야, 단전 단수해!”

아뿔사! 바로 이 말은 옆방에 있던 기자들의 귀에까지 들리고야 말았고, 권익현 대표의 이 한 마디는 그 다음 날로 언론의 가십난을 장식했다. 여당 대표의 입에서 나온 ‘폭도’라는 말은 학생들과 민주화세력을 더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이 말은 한참 동안이나 쟁점사항으로 오르기에 이르렀다.

지푸라기를 잡아라?

아무튼 나는 내 의견을 계속 설득해 갔다. 마침내 의견이 좁혀졌다.

“그럼 대표단을 누구로 구성한단 말이요? 정말 대표가 올라갈 순 없잖소!”

“일단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지금까지 그래도 몇 번 전화통화를 해 봤고, 또 대표라는 학생이 고대 학생이라고 하니까 쉽게 얘기가 풀릴 수도 있습니다.”

급하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더니 꼭 그 심정이었다. 대표가 고려대 학생이라는 것에 실날같은 희망을 가져 보았던 것이다. 마침 그 때 김용태 대변인은 대구에 내려가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런 저런 상황과 함께 부대변인인 내가 올라가는 것으로 일단 결정되었다. 그러나 혼자 올라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 때부터 의원들은 집안, 학교, 지역 등을 다 꼽아가며 학생들에게 거부감을 안 줄 수 있는 조건들을 찾아갔다. 정말 지푸라기가 따로 없었다. 그런데 궁하면 통한다고 이리 저리 따져 보는 가운데 드디어 남재희. 안병규, 김영구,장경우로 4사람의 대표단이 구성되었다.

먼저 남재희 위원의 경우, 딸이 학생운동권이었다. 평소에는 남의원의 골치깨나 썩히던 그 사실이 이제는 우리들의 ‘지푸라기’가 된 것이다. 그리고 안병규 의원의 경우는 서울대 학생회장 출신이었다. 학생운동 선배라는 건 지푸라기와는 비교도 안될 동아줄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김영구 의원의 경우는 당에서 청년담당 위원장이라는 것이 ‘지푸라기’가 되었다.

우리명이 결정나자 이제 경찰국장은 형사 2명을 함께 붙여줬다. 그렇게 여섯 병의 협상대표단을 구성해 놓고 나는 전화를 걸었다.

“우리 측에서 대표단이 다 구성되었으니까, 일단 엘리베이터를 내려 보내시오.”

“알았습니다.”

드디어 엘리베이터가 내려왔다. 비좁은 공간 안에 여섯 명이 탔다. 그리고 9층을 눌렀다.

땡! 드디어 9층! 스르륵 문이 열리는 순가,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엘리베이터 앞에 온갖 집기로 산더미같은 바리케이트가 쌓여 있었던 것이다. 그걸 치워주기 전에는 바깥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그런데 갈수록 산이었다. 한 학생이 바리케이트 사이로 얼굴을 내밀더니 우리 얼굴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것이다.

“장 경우 의원 맞고, 남재희 의원 맞고...두 명은 모르겠소, 다시 내려가시오.”

학생들은 이미 의원수첩을 확보해 놓고 있었다. 그걸 보면서 하나하나 확인하는데는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다시 내려왔다.

“두 분은 내리십시오. 걱정 마세요. 우리 네 명이서 해 보겠습니다.”

결국 우리는 네 명이서 다시 올라갔다. 땡! 다시 9층이다. 그제서야 학생들은 바리케이트를 치워 틈새를 만들어줬다. 그리고 막 발을 떼어놓는 순간, 나는 ‘내가 지금 어디에 왔지?’ 하는 당혹감에 내 눈을 의심했다.

복도 입구는 이미 어마어마한 바리케이트로 막혀졌고, 방문을 열어보니 온갖 집기가 다 치워진 휑! 한 방에 학생들이 콩나물 심어 놓은 듯 죽하고 앉아 있는데... 아니 세상에! 그 짧은 시간 안에 언제 그렇게 올라왔는지 100여명정도나 되는 학생들이 일순간 일제히 우리들을 향해 시선을 돌린 것이다. 어리벙해져 있는 우리 앞에 한 학생이 다가왔다.

믿어라,못 믿겠다!

“자, 지금부터 우리와 함께 토론을 해 보기로 하죠. 앉으십시오.”

우리에게 그 군중 속에 앉으라는 것이었다. 내가 입을 열었다.

“이봐요, 100여명과 4 명이 어떻게 토론을 합니까, 그 쪽에서도 대표단을 구성해서 대표단끼리 토론하도록 합시다.

“... 좋습니다.저 쪽으로 가시죠.”

우리 앞에 드디어 다섯 명의 대표가 왔다. 여학생 두 명과 남학생 셋이었는데, 나는 그 모습을 보고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가냘프고 또 그렇게 어리게만 보이던지... 그 많은 학생들 중에도 유독 대표단으로 온 학생들은 더 나약하고 어려만 보였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여간 진지한게 아니었다.

막상 토론을 하자며 앉았지만 우리는 최루가스 때문에 연신 눈물과 콧물을 흘려대기 바빴다. 그런데 학생들은 정신력으로 버티는 것인지, 아님 적잖게 면역이 된 건지 꼿꼿한 자세로 어찌할 바 모르는 우리를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 우리는 일단 각자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말이 소개지 ,우리가 고심 끝에 부여잡았던 그 ‘지푸라기’들을 늘어놓으며 거부감을 없애기 위한, 거의 하소연에 가까운 설득 아닌 설득이었다. 우리들의 결론은 이것이었다.

“학생들의 요구는 지금 당장 해결하기에는 사안이 너무 크고 또 이러고 있자면 사태가 더 커지니까 일단 대표단만 남고 나머지 학생들은 철수하는 게 어떻겟어요? 우리가 학생들의 요구사항은 당정회의를 통해 충분히 반영하도록 약속할테니까.”

“우리가 그 말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일단 믿어봐요... 우리는 학생들이 다칠까봐 그것이 더 걱정이라니까? 알겠지만 지금 밑에는 학생들보다 몇 십 배는 더 되는 병력이 대치하고 있는데...”

“그런 것이 무섭다면 이 곳을 점거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무튼 저희는 저희들의 요구사항이 관철되기 전까지는 이곳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습니다.”

참 난감한 일이었다. 그렇게 ‘믿어라’ ‘못 믿겠다’를 주고 받으며 4-50분간의 협상이 진행되었다. 사안의 긴박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꽤 평화적으로, 그리고 간간히 선후배의 감정도 교환해 가면서 그럭 저럭 잘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들의 좋은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그 선에서 얘기는 더 나아갈 수 없었다. 사실 학생들 역시 당장에 우리와 마주 앉아 무슨 해결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다시 엘리베이터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바로 그 시간에 밑에서는 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이것은 분명 인질극으로 비화된 것이다’는 것이었는데 어찌보면 그것은 당연했다. 당시만 해도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여당 의원들의 시각은 상당히 편현된 것이었고, 또 사안이 사안인 만큼 긴장감이 고조된 탓이었다.

그 상황에서 우리가 멀쩡하게 내려왔으니 사람들이 놀라는 건 당연했다. 난데없이 우리가 용감한 사람으로 부추겨지기까지 했으니...다 시대가 만들어낸 선입견 때문에 빚어진 웃지 못할 일이였다.

여당의원의 쓸쓸한 뒷모습

‘ 이미 열쇠는 우리 손을 떠난 거나 다름없었다. 당사를 점거하고 있으니 경찰력이 동원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렇다고 학생들의 요구를 지금 당장에 해결한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날이 컴컴해지기 시작하자 드디어 전투경찰 ‘특수요원’들이 도착했다. 상황을 파악한 학생들은 유리창에 매달린 채 뛰어내린다고 위협하기 시작했고, 건물을 삥 둘러 그물과 매트리스가 깔려졌다.

특수요원 경찰들은 흡사 유격훈련 하듯이 옥상으로 올라가서는 유리창을 깨고 9층에 들어갔다. 그리고 동시에 계단을 통해 올라가서는 계단 옆벽을 폭파해 뚫어 그 안으로 최루탄을 터뜨리며 진격해 들어갔다. 그 와중에 한 학생이 유리창 아래로 뛰어내렸다. 다행히 그물에 걸려 무사했다.

결국 사태는 짧은 시간 안에 진압되었고, 학생들은 모두 연행되어 갔다. 손을 머리 뒤로 올린 채 줄줄이 연행되어 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그렇게 착잡할 수 가 없었다. 어쩌면 그렇게도 하나같이 연약하고 가냘펴 보이기만 하던지...바로 그들에게 ‘타도의 대상’이 되어버린 여당 의원으로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건 흡사 고문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방법이 비록 과격한 것이었으나, 민주화를 위한 희생정신을 바탕으로 한 것임에는 분명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작은 희생들에 의해 우리의 민주주의가 발전해 왔음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 또한 이른바 ‘6.3세대’로 한때는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며 나름대로는 학생운동의 전면에 나서 보지 않았던가. 이제 정치인이 되어 그 현장에서 그들과 대치선에 서야만 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큰 불행으로 느껴졌다. 그것은 곧 시대의 불행이었다.

어쨌거나 그 일은 내가 정치를 시작하면서 처음 맞닥뜨린 시련이었다. 나름대로는 순수한 마음으로 ‘정치’에 뛰어들었지만 정치를 논하기 이전에, 이 땅에서 여당 의원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어려움, 그리고 동시에 정치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어려움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훗날 나는 끝내 야당정치인이 되고 말았으니,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시대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정치인은 결코 존재 할 수 없다는 사실만을 확인할 뿐이다.

 

저작권자 © 시사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