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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홍콩 민주화 시위 지지하며
나명현  |  mheon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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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1.22  08:2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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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콩 경찰이 18일 홍콩이공대에서 시위 참가자들을 체포하고 있다.
이번 6월 홍콩시위는 '범죄인 인도조례' 개정안 발의를 계기로 시작되었다.  홍콩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중국본토로 강제 송환될 수 있다는 우려가 시민들을 거리로 나오게 했다. 경찰의 폭력에도 굴하지 않는 시민의 힘으로 9월에 법안은 철회되었다.

그러나 시위는 끝나지 않았다. 홍콩 시민들의 요구는 그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시위대 '폭도' 규정을 철회하라. 체포된 시위대를 조건 없이 석방하라. 경찰의 폭력 진압에 대한 독립 조사를 진행하라. 그리고 행정장관 직선제를 실시하라!

홍콩 이공대를 완전 봉쇄한 경찰, 물러서지 않겠다는 시위대. 실탄, 최루탄, 물대포가 시민을 겨눌 때마다 어떤 기억이 소환되고 있다.

그리고 홍콩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졸이는 요즘, 대학가를 중심으로 대자보가 붙고 훼손되는 사건도 반복되고 있다. 홍콩 민주화시위는 이미 한국에 당도했다.

홍콩시위는 "홍콩의 오늘은 세계의 내일"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다. 유서를 쓰며 저항을 이어가는 홍콩의 시민들은 80년 광주를 반복하는 것만도 아니다. 우리의 내일이 홍콩시민의 저항에 기대고 있음을 기억할 때 연대가 시작되고, 우리의 오늘로 홍콩의 내일을 함께 만들 수 있을 것이다.

1980년 5월 광주시내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서도 ‘드르륵’ 총소리가 들렸다. 헬기에서는 전단을 살포했다. ‘폭도들이 무장한 채 폭동을 벌이고 있다. 계엄군은 자위권을 갖고 있다’ 등속의 내용을 담았다. 그 시간 광주 상무대체육관 바닥에는 형체도, 신원도 알아보기 힘들 만큼 피 칠갑 된 시신들이 즐비했다.

또 11공수여단은 송암동에서 민간인을 무차별 사살한 뒤 인근 산에 암매장했다.

죽음의 공포가 지배하던 1980년 5월의 광주는 바깥으로 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었다. 시민들은 민주주의의 나라 미국이 신군부의 학살극을 멈춰 주길 바랐지만, 미국은 침묵하고 방관했을 뿐이었다. 40년 전 광주는 한국 안에서도, 국제적으로도 철저히 고립됐다.

2019년 11월 홍콩 이공대의 상황도 심상치 않다. 나흘째 전기와 물도 끊긴 채 경찰에 봉쇄된 이공대 안에는 지난 11월 17~18일 이틀 동안 600명을 체포했지만, 아직도 200명 가까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인민해방군이 진압에 개입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지금까지 있었던 희생보다 더 끔찍한 살상이 벌어질 수 있음을 뜻한다. 하수구를 통해 탈출을 시도하려던 이들도 있었다.

화염병, 화살 등으로 저항하고 있다지만, 미성년인 10대 청소년도 다수 포함된 시위대가 느낄 고립무원의 공포와 시시각각 조여 오는 불안감은 짐작만 할 뿐이다. 홍콩은 제2의 광주가 돼선 안 된다. 피의 역사로 배울 교훈은 이미 충분하다. 철저히 인도주의적인 국제사회의 연대가 절실하다.

1989년 6월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앞은 어땠는가.

중국 시민들의 민주화요구 시위에 중국정부는 계엄령을 내렸고, 군과 탱크를 동원했다. 공식 발표로는 민간인 사망자 875명, 부상자 1만 4550명이었고 군인은 56명이 사망, 7525명이 부상당했다. 비공식 집계로는 1만 명이 넘게 사망했다는 주장들도 있다. 그 유명한 사진을 떠올리며 탱크 앞에 홀로 섰던 그 시위자는 그 후로 어떻게 됐을까를 상상한다.

1. 홍콩 시위역사

영국의 침략전쟁인 아편전쟁 결과, 1841년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가 됐다. 그래서 영국에서 중국으로 홍콩이 '반환'될 때 중국은 그것을 식민지 역사의 종식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홍콩 시민들에게 '반환'은 식민지로부터의 해방과는 다른 사건이었다. 영국은 홍콩인의 참정권을 거의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전과 빈곤의 혼란을 겪는 '조국' 중국보다 홍콩을 더 나은 사회로 여기도록 식민 통치전략은 작동했다.

홍콩시위의 배경에도 심각한 경제 불평등이 있다. 1967년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에 항의하며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였으나, 영국은 이를 테러로 규정하며 진압했다. 1986년에서 1996년 사이 홍콩의 지니계수는 급증하며, 불평등이 심화되었다.

홍콩인들이 중국으로 편입되는 과정의 혼란을 줄이기 위해 약속된 것이 '일국양제' 원칙이었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지만, 50년간 홍콩특별행정구는 자본주의 제도를 유지할 것이라는 약속.

얼마 전 방한한 홍콩 민간인권전선 라이 부의장도 말하듯, 홍콩시위는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홍콩시위를 사회주의 체제로부터의 이탈로 보는 의심과 기대는 사라지지 않는다.

2014년 79일간 도심 점거 시위를 이어간 우산운동으로 '직선제 요구'는 한국의 87년 민주화항쟁과 비교되는 연결고리가 된다. 라이 부의장 역시 홍콩시위가 한국의 80년대 운동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많은 중국인들이 홍콩시위를 '지체된 탈 식민'과 '서양식 민주주의에 대한 맹신'에 사로잡힌 독립요구로 간주하고, 중국정부는 일국양제 원칙의 훼손을 경고한다. 미국은 홍콩의 운명을 쥐고 싶어 한다.

1997년 홍콩은 중국으로 '반환'되었지만 '하나의 민족'이나 '중국인'이라는 정체성은 쉽게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2000년대 들어 중국은 홍콩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려 했고, 홍콩시민들은 강하게 저항했다.

2003년 "반역, 국가분열, 반란선동, 중앙인민정부의 전복"을 금지하고, "외국 정치조직 및 단체와의 접촉을 금지"하는 '국가안전법' 입법이 시도되자, 대규모 반대시위를 벌여 철회시켰다.

2007년 '민족의식 배양'과 '애국심 고양'을 의도한 '국민교육 과정' 도입이 추진되자, 이 또한 철회시켰다.

직선제 요구는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으로 반환되기 전 400명의 선거인단이 행정장관을 뽑던 제도가 1200명까지 인원을 늘렸지만, 민의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불만이 지속되었다. 2014년 8월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는 시민사회의 요구를 수용하는 듯 보통선거 방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후보추천위원회의 절반 이상 지지를 얻은 사람만 입후보할 수 있도록 했고, 그 후보추천위원회는 기존의 선거인단과 다를 바 없었다. 홍콩시민들에게 새로운 선거제도는 민주적 선거제도일 수 없었고, 79일간 도심 점거 시위를 이어간 ‘우산운동’이 시작되었다.

홍콩 시민들의 자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선거제도 개선에 대한 요구를 넘어선다. 그것은 인민의 존엄을 지키고 미래를 결정할 권한이 인민 자신에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바탕으로 다른 세계를 만들겠다는 열망이다.

홍콩시위에 참여하는 대다수가 20~30대 청년들이라는 점 역시 더욱 눈여겨봐야 한다. 일자리 찾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신자유주의가 낳은 삶의 위기를 맨몸으로 맞부닥뜨려야 하는 청년세대의 저항은 세계 곳곳에서 폭발하고 있는 시위와 닿아 있다.

홍콩반환에 관한 1984년의 중영공동성명은 "지역 내 선거결과에 근거해" 행정장관을 임명하도록 했고, 1997년 반환과 함께 시행된 홍콩기본법은 "실제 상황과 순서점진의 원칙에 근거하여" "보통선거의 방식으로 선출하는 목표를 실현"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중국정부는 이 규정을 들며 충분한 자치를 보장하고 있다는 입장을 내세운다. 홍콩시민의 자치 요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일국'이 우선이라는 입장만 반복하는 중국정부야말로 일국양제를 무너뜨리고 있다.

홍콩 중문대학교가 수행한 설문결과에 따르면, 홍콩에서 스스로를 중국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1997년 32.1%에서 2014년 8.8%로 더욱 줄어들었다. 불안정한 삶에 대한 불만과 불안은 '홍콩인'의 정체성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중국과 홍콩의 상층 계급이 부를 전유한 결과 심화되는 불평등에 대한 분노는 '내지인은 천박하고 야만적이며 개화되지 않았다'는 인종화된 반중 정서로도 표출된다. 홍콩인에 대한 백색테러나 중국인의 적대도 위험한 상황을 만들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기회가 봉쇄된 채 불평등에 대한 분노가 서로를 타자화하는 인종주의적 폭력으로 귀결되고 만다면, 그 책임은 무엇보다도 홍콩과 중국정부가 져야 할 것이다.

2016년 홍콩의 지니계수는 0.539로 세계 최고 수준을 유지하는 가운데, 중국 본토에 대한 경제의존도는 더욱 커졌다. 홍콩의 대중국 수출비중은 전체 상품 수출액의 57.2%를 차지하고, 2018년 11월까지 홍콩방문 관광객 수 1위는 중국인으로 78.4%를 차지한다.

2001년 본토에서 홍콩으로 원정 출산이 시작되자 복지 자원까지 빼앗아간다는 불만과 중국인들이 와서 홍콩물가를 올려놨다는 불만이 쌓여갔다. 사회 변화에 대한 도전이 '친중파'가 장악한 홍콩정부와 의회에 의해 번번이 제한당해 온 상황에서 시민의 대표를 직접 뽑겠다는 요구가 자연스럽게 시위의 한가운데 자리하게 됐다.

2. 홍콩인의 정체성

11월 20일 오마이뉴스에 게재한 김종성의 “홍콩인들은 무엇을 위해 싸우나”를 소개한다. 1842년 난징조약(남경조약)으로 영국에 넘어간 이후, 근 180년간 홍콩을 움직인 원동력 중 하나는 ‘홍콩인의 정체성’ 문제였다.

중국에서 분리될 때의 홍콩인과 1997년 중국으로 반환될 때의 홍콩인이 문화적으로는 비슷했지만, 사회학적 측면에서는 달랐다. 홍콩인들은 1842년 이후, 1898년 이후, 1949년 이후 중국대륙에서 이민 온 사람들과 그 후예들이었다.

6백여 만의 인구 가운데 98%가 중국인이지만, 중국사회의 내부를 세대적으로 보면, (1) 1842년 영국에 할양된 이후 이민 온 초기세대 및 그 일족, (2) 1898년 중영조약 이후 홍콩에 편입된 신제(新界·신계) 지역에 소속하는 세대, (3) 1941년 일본점령 이후 특히 49년의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뒤에 이민 온 세대, (4) 위의 (1), (2), (3)의 배경을 가지며 홍콩에서 출생한 세대 등 이상의 4대에 걸친 세대가 제각각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공존하고 있다.

오늘날의 홍콩인들은 청나라가 1840년 제1차 아편전쟁에 패해 난징조약을 체결할 때 살았던 홍콩 주민들의 후예가 아니다. 대부분은 1842년 이후에 정착한 사람들의 후예다.

홍콩인들은 문화적으로는 중국인과 다를 바 없지만, 영국 식민 지배를 거치면서 중국인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정체성을 갖게 됐다. 홍콩인들은 중국과 영국, 중국과 세계의 무역 및 금융을 매개하면서 경제적 성장을 거듭했다. 그래서 중국과 여타 세계,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중개자로서 자신들의 역할을 모색했다.

또 그들은 아편전쟁 이후에 청나라가 세계열강의 착취를 당하는 모습과 자신들이 경제적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대비시키면서, 중국과는 색다른 자신들의 이미지를 정립했다. 중국을 동류로 인식하지 않고 타자화(他者化)하는 태도가 생겨났던 것이다.

거기다가 중국공산당의 대륙 석권이 이들에게 상당한 경계심을 줬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축적한 자신들의 번영이 공산당 체제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자명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홍콩에서 중국공산당 반대 구호가 거리에 나붙어도 누구 하나 떼어내지 않는 것만 봐도, 공산당에 대한 홍콩인들의 시각을 가늠할 수 있다.

이렇게 영국보다도 중국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많이 갖고 있다 보니, 한국인들이 일본제국주의에 대해 갖는 분노의 감정을, 홍콩인들은 영국제국주의에 대해 별로 많이 갖고 있지 않다. 물론 그런 정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평균적 정서에서는 잘 추출되지 않는다. 자기 나라 일부였던 홍콩을 영국에 빼앗긴 중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쉽사리 동의할 수 없는 지점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영국 지배 하의 홍콩인들이 중국을 그저 남으로만 대한 것은 아니다. 자신들보다 못 살고 뒤쳐진 중국을 경원시하면서도, 제국주의에 시달리는 중국을 동정하고 동조하는 기류도 분명히 존재했다.

홍콩에서도 지식인들에 의해 중국의 민족주의가 주장되어 왔는데, <순환일보>를 발행한 왕타오와 양무운동을 주장한 허치, 나아가 신해혁명에서 큰 역할을 한 쑨원 등은 홍콩을 거점으로 민족주의를 주장하였다. 이렇듯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라는 이미지가 전부는 아니며, 오히려 다양한 레벨에서 중국의 주권이 줄곧 행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식민지 홍콩 내에 친(親)중국 기운이 상당 수준으로 존재했다는 점은 1967년에 발생한 대규모 시위에서도 확인된다. 영국 식민당국의 일방적 관점에 따라 '67폭동', '홍콩 67좌파 폭란', '홍콩 5월 폭동' 같은 부정적 표현으로 불리는 1967년 시위는 중국대륙에서 발생한 문화대혁명과 깊은 관련이 있다. 문화대혁명에 영향을 받은 홍콩의 좌파 노동자들이 홍콩의 조기 해방을 주장하며 폭력과 파괴를 동반한 반영(反英)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홍콩의 홍위병들은 반영제국주의 구호를 외치며 돌·염산·화염병 심지어 사제 총과 포탄 등을 만들어 홍콩경찰을 공격하였고, 방화 및 반(反)좌파 언론인에 대한 살해도 자행하였다. 1967년 5월 시작되어 8개월 정도 지속된 폭동 기간 동안 51명이 사망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투옥되었다.

경찰을 상대로 화살을 쏘는 지금의 시위대보다 훨씬 잘 무장된 세력이 8개월이나 반(反)영국, 친 중국 시위를 벌였다. 홍콩민중의 지지를 어느 정도라도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훨씬 더 큰 권력과의 투쟁을 불사하면서라도, 홍콩인들이 자기들만의 정체성을 사수하려 한다. 이는 1997~2016년 기간에 발생한 6만 4677건(연평균 3200건 이상)의 시위에서 자주 추출된 정서다.

홍콩인들은 중국과 영국, 그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는 정체성을 희구하고 있다. 1842년 이후의 177년간 구축해온 그들 나름의 역사를 기초로 '홍콩인의 홍콩'을 구축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중국과 완전히 일체화되기를 꺼리는 것이다.

중국 반환 6주년이었던 2003년 7월 1일, 50만여 명의 홍콩시민들이 국가안전법 제정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한국의 국가보안법에 상응하는 이 법안은 홍콩안보가 아닌 중국안보의 관점에 입각해 있었다.

이 법안은 중국 중앙정부에 유해한 홍콩인들의 정치활동을 규제하고자 했다. 이 법안에 대한 투쟁은 홍콩이 중국의 여타 지역과 똑같이 취급되는 것에 대한 홍콩인들의 불안감을 반영했다. 결국, 홍콩당국은 법안을 철회했다.

2007년 7월,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홍콩 청소년들에 대한 국민교육 강화를 추진했다. 이 시도 역시 학생·교사·학부모·시민단체의 저항으로 인해 좌절됐다. 자기 아이들의 의식구조가 중국으로 기울지 않을까 우려하는 홍콩인들의 공포심이 낳은 결과였다.

2014년에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하며 일어난 이른바 '노란우산 운동' 역시 그런 정서를 깔고 있었다. 행정장관 임명에 대한 중국의 입김을 배제하려는 홍콩인들의 열망이 낳은 일이었다.

홍콩인들이 정체성 문제에 특히 민감하다는 점은 지금 사태에서도 잘 드러난다. 범죄자를 중국으로 송환활 수 있도록 하는 송환법안에 대한 반대투쟁은 홍콩이 중국 땅처럼 취급되지 않을까 하는 공포심을 반영하고 있다. 홍콩 정체성이 중국의 정체성과 뒤섞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반영하는 일이다.

홍콩인들이 한층 더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정체성에 대한 자신들의 의지가 중국대륙과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중국정부로서는 영국에 빼앗겼다가 되찾은 홍콩을 중국의 일부로 간주할 수밖에 없으니, 홍콩인들은 그런 중국과의 대결 속에서 정체성 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독립국가의 정체성 투쟁과 비교할 때, 훨씬 더 고된 투쟁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부 한국인들은 한국의 역사적 경험을 투영해 홍콩 사태를 민주화운동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지만, 지금 사태의 본질은 홍콩의 정체성이 중국의 정체성과 충돌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중국인들은 177년 전에 빼앗겼다가 도로 찾은 홍콩을 옛날처럼 중국의 일부로 복원시키려는 애착을 갖고 있지만, 홍콩인들은 중국인들이 그런 애착을 갖는 것 자체를 무섭게 여기고 있다. '우리는 1842년 이전의 홍콩인들이 아니라 1842년 이후의 홍콩인들이야!'라고 그들은 외치고 있다.

3. 홍콩시위, 평화적 해결방안 찾아야

6개월째 이어지는 홍콩의 민주화시위가 격화하고 있다. 홍콩경찰이 시위대의 최후 거점인 홍콩 이공대(폴리테크닉)에 대한 강제진압에 나서면서다.

현장 상황을 전한 르포에 따르면 11월 18일 새벽의 진압작전은 전쟁터를 방불케 할 만큼 격렬했다고 한다. 경찰은 시위대에 실탄을 발사하며 캠퍼스에 진입했고, 이에 맞서 시위대가 경찰에 화살을 쏘는 모습까지 목격됐다. 격렬 대치는 하루 종일 이어졌다. 특히 이날 새벽 경찰은 이공대 인근 침사추이 지역에서 시위대를 향해 실탄 3발을 발사했다.

앞서 경찰은 지난 10월 1일과 4일 무방비의 시민에게 실탄을 발사해 중태에 빠뜨린 일도 있다. 맞서는 시위대는 경찰에 쇠막대기를 휘두르고 화살을 쏘거나 화염병 벽돌 등을 던지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공대를 탈출하려다 붙잡힌 시위대는 400명이 넘고 부상자가 속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탄 조준사격까지 불사한 강경진압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최후 통첩성 발언 이후 본격화됐다. 시 주석은 지난 11월 14일 “폭력을 중단시키고 혼란을 제압해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홍콩의 가장 긴박한 임무”라고 말했다. 이는 시위 장기화에 따른 경제적 피해와 중국 본토로의 영향 파급, 국제사회에서의 신인도 하락 등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홍콩시위가 격렬해진 것은 지난달 말 열린 제19기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4차 전체회의(4중 전회)가 홍콩문제에 대한 강경 메시지를 공식화하면서부터였다. 그 이후 홍콩정부의 입장도 강경해졌다. 홍콩정부는 시위대를 폭도로 규정하면서 강경진압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이는 경찰이 피해를 감수하고도 시위대를 무력 진압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에 따라 홍콩경찰은 강경 시위대를 해산시킴으로써 장기시위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홍콩경찰의 진압 태세는 시위의 뿌리를 뽑으려고 작심한 듯 맹렬하다고 한다.

문제는 이런 식의 강경진압이 또 다른 비극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 지 모를 정도로 현장 상황은 험악하다고 한다. 비무장 시위대에 대한 실탄 사용으로 이미 희생자가 발생한 상황이지만, 더 이상의 유혈 사태는 막아야 한다.

그래서 무력충돌의 상황이 우려된다. 여기에다 최근 중국 관영언론에서 ‘홍콩 군 투입’ 보도까지 나오고 있다. 실제 이공대 인근에는 홍콩주둔 인민해방군 막사가 있어 이런 우려를 더욱더 키우고 있다. 자칫 ‘제2의 톈안먼 사태’가 홍콩에서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다.

홍콩시위는 강경진압에 따른 희생자 속출과 장기화에 따른 경제 불안 등의 여파로 참가자가 줄면서 한때 100만 이상의 인파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던 때에 비하면, 그 세력이 많이 위축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시위발생의 근본원인이라 할 수 있는 일국양제(一國兩制)와 홍콩 자치보장에 대한 해결책 없이 강경 진압만 반복되는 것은 문제를 뒤로 미루는 미봉책에 불과할 뿐이다. 역대 최대·최장 규모의 시위였던 2015년 우산혁명 운동이 소멸된 뒤 4년 만에 더 규모가 커진 시위사태가 재연됐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시위는 홍콩반환으로 이루어진 ‘일국양제’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1997년 주권반환 후 부여한 홍콩 자치권은 50년간 보장된다. 홍콩시민 입장에서는 미래가 불안할 수밖에 없다. 홍콩시민이 자치권 확대를 요구하는 것은 이런 이유다. ‘일국양제’는 어떤 식으로든 보완할 때가 된 것이다.

이 같은 문제를 힘으로 해결하려면 오히려 사태를 더 키울 수 있다. 이는 많은 나라의 민주화시위에서 경험한 바 있다. 중국정부는 민주주의와 인권 등 국제사회의 보편적 가치를 존중하는 측면에서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촉구한다.

궁극적 해결책은 중국 중앙정부와 홍콩 행정당국, 홍콩시민들이 모두 만족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는 길 밖에 없다. 그 결과로 홍콩사태가 평화적으로 해결되고 홍콩사회가 하루 속히 안정을 되찾기를 바란다. 아슬아슬한 외줄타기 상태에 있는 홍콩의 자유와 번영은 지속되어야 한다.

홍콩이 대 혼돈에 빠졌다. 홍콩 주요 대학들은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학생들은 화염병을 던지고 불화살까지 쏘며 격렬한 반중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교내에 들어가 최루탄과 물대포를 쏘며 진압에 나섰다. 급기야 주요 대학은 휴교조치를 내렸다. 시내 곳곳에선 지하철·버스 운행중단으로 교통대란이 벌어졌고 큰불이 나기도 했다. 6개월째 이어져 온 홍콩시위 사태가 제2의 천안문 사태로 비화할 것이라는 위기감마저 감돈다.

홍콩경찰의 시위진압은 계속 강경해지고 있다. 경찰이 지하철 차량 내부까지 들어가 시위대와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구타하며 체포하거나, 쇼핑몰에 전격 진입해 대규모 검거작전을 펼치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한 경찰간부가 경찰들에게 “어떠한 무력을 사용해도 좋다”고 발언하는 모습도 목격됐다.

홍콩의 민주화요구 시위가 장기화하는 상황에서 11월 11일 아침 홍콩 교통경찰이 도로에서 시위자를 검거하면서 몸싸움을 벌이다 다른 시위자가 다가오자 그의 가슴에 실탄을 발사했다. 경찰은 총에 맞아 도로에 쓰러진 시위자를 제압하면서 다가오는 또 다른 시위자를 향해서도 실탄 2발을 더 발사했다. 이들 가운데 1명이 위중한 상태로 알려졌다. 홍콩 사태는 이미 인명 피해를 보았다.

문제의 경찰관이 신체적 위협을 받는 상황이 전혀 아닌데도 곧바로 실탄을, 그것도 시위대의 다리나 팔 등이 아닌 가슴을 직접 겨누었다.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한 홍콩경찰과 배후의 중국당국은 규탄 받아 마땅하다.

홍콩경찰은 문제의 경찰관의 행위가 정당방위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총격 장면은 명백한 공격 행위임을 증명한다. 아무런 사전경고도 없이 시민을 향해 곧바로 총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홍콩 시위자가 경찰의 실탄에 맞은 것은 세 번째다. 그러나 이날은 대낮에 총격이 이뤄진 데다 총격 장면이 페이스북으로 생중계돼 충격을 더했다.

홍콩과기대 학생이 시위현장에서 최루탄을 피하려다 주차장 건물 3층에서 2층으로 떨어져 머리를 심하게 다친 뒤 두 차례 수술을 받았으나 숨졌다. 지난 11월 8일 시위도중 추락해 사망한 홍콩과기대 학생 차우츠록을 추모하기 위한 시위에서 벌어졌다는 점도 분노를 샀다. 시위에 따른 사망자를 기리고자 하는 시민들을 향해 발포한 홍콩경찰의 무도함은 어떤 말로도 변명할 수 없다.

중국당국의 강경태세가 예사롭지 않다. 중국 국무원 홍콩 연락판공실은 성명을 통해 “홍콩의 폭력행위가 테러리즘으로 향하고 있다”며,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관영매체들도 시위대의 행위가 광기에 휩싸이고 있다고 격렬히 비난했다.

중국의 한 관변학자는 서방의 제재를 감수하더라도 중국이 홍콩문제에 개입해야 한다고 했다. 중국의 무력개입이 초읽기에 들어간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홍콩정부도 ‘교도소 폭동 대응팀’을 투입하고, 경찰청장에 ‘강철 주먹’이라 불리는 강경파 인물을 임명했다고 한다.

중국당국은 무력개입이 홍콩을 파국적 상황으로 내몰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중국군이 진입하면 홍콩은 아시아의 금융허브 위상을 상실할 게 불 보듯 뻔하다. 상당수 홍콩부자들은 이미 대만·캐나다·싱가포르 등 해외로 떠났고, 이민 신청도 빗발치고 있다고 한다.

문제를 푸는 길은 중국당국이 애초 약속한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덩샤오핑은 1984년 홍콩 반환협상에서 홍콩을 ‘특별행정자치구’로 지정해 향후 50년간 정치·경제·사법 자치를 허용할 것이라고 천명했지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집권 이후 홍콩 행정장관 직선제가 무산되는 등 일국양제 원칙이 허물어지고 있다.

홍콩 주민들은 중국의 억압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시위의 도화선이던 ‘범죄인 인도법안(송환법)’의 철회에도 시위가 잦아들지 않는 건 홍콩 주민들의 불신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중국당국은 홍콩 주민들의 요구에 귀 기울이고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어야 할 것이다. 비무장 시위대에 대한 홍콩경찰의 총격은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된다. 홍콩시위대도 폭력시위가 아닌 평화적인 의사 표시로 국제여론을 우군으로 삼아야 한다.

세계는 중국정부가 홍콩시위를 어떻게 다루느냐를 계속 지켜보고 있다. 홍콩을 통해 ‘중국식 민주주의’가 과연 보편성을 지녔는지를 판단할 것이다.

홍콩은 중국에 반환되기 전부터 민주주의를 구가해온 곳이다. 이런 홍콩에서 중국이 시민의 정당한 권리인 집회를 억압하고, 나아가 시위자에 총격을 가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다. 중국은 홍콩시위 사태가 최악의 상황에 이르지 않게 폭력 진압을 중지시키기 바란다. 유혈사태의 책임은 전적으로 중국이 져야 한다.

오는 11월 24일 홍콩에서는 18개 선거구에서 452명의 구의원을 선출하는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친중파 쪽이 패할 가능성이 있다. 이 때문에 폭력시위를 구실 삼아 선거를 연기하려 한다고 홍콩 언론들은 보도했다. 이번에 선출되는 구의원 중 117명은 홍콩 행정장관을 선출하는 선거인단(1200명)에 포함되기 때문에 선거결과가 매우 중요하다.

홍콩당국이 지난 5월 ‘범죄인 인도 법안’(송환법) 표결 때 이에 반대한 야당의원 3명을 최근 체포한 것도 이런 의혹을 심화하고 있다. 친 중국 성향의 홍콩당국이 이런 의도를 갖고 있다면 이는 조작에 의한 민주주의 압살이다.

4. 홍콩 시위를 둘러싼 갈등

대학가에서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대학 내에 게시된 홍콩시위를 지지하는 학생들의 대자보·현수막 등을 중국인유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잇달아 훼손하고 있다.

서울대 학생들은 지난 11월 6일 홍콩시위를 지지하는 내용의 포스트잇 메모를 붙일 수 있는 게시판을 마련했다. 그러자 중국유학생들은 “홍콩은 영원히 중국 땅” 등의 글귀로 훼손했다. 홍콩시민들을 위해 응원 문구를 적어 넣을 수 있도록 설치된 ‘레넌 벽’이 훼손됐다.

고려대의 대자보도 찢겨진 채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중국인으로 보이는 남녀 2명은 연세대 신촌캠퍼스 학생들이 내건 ‘Free Hong Kong(홍콩을 해방하라)’ 등의 현수막을 무단으로 철거했다.

한양대에서는 홍콩시위를 지지하는 내용의 대자보를 놓고 훼손하려는 중국학생 40여명과 이를 지키려는 한국학생들이 4시간 동안 대치하는 일이 발생했다. 홍콩시위 지지 대자보를 떼어 가지 못하도록 불침번을 세우는 곳도 있다고 한다.

중국학생들이 홍콩시위를 바라보는 시각은 한국인과 다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의 바탕이 됐을 그들의 ‘애국심’도 이해 못 할 바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잊어서는 안 되는 게 있다. 여기는 한국영토이며, 자신들은 외국인으로 잠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유학생도 중국과 관련한 한국사회의 움직임이나 정부정책에 항의하는 등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한국인의 표현 자유를 억압하고 훼손하고 있다.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중국유학생들이 홍콩 사태에 대해 자신들의 의견을 나타내는 것은 한국대학생들이 의견을 피력하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런 표현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 표현의 자유 또한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성립된다. 남이 붙인 대자보를 훼손하려는 것은 표현의 자유도 뭣도 아니고, 사실상 폭력 행위다.

한 대학에서는 홍콩시위 대자보 위에 ‘김정은 만세’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메모지를 붙이기도 했다. 자신들의 정치적 의사표현을 하고 싶다면 다른 사람의 표현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이란 점부터 배우길 바란다.

중국인들의 오만방자한 집단행동은 이번만이 아니다. 2008년 베이징 하계올림픽 성화 봉송 때도 중국 거류민들은 중국정부의 티베트 탄압에 항의하는 우리 시위대를 향해 돌을 던지고 각목과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이를 저지하려고 출동한 경찰에까지 폭력을 행사했다.

당시 세계 주요도시에서 반중 시위가 열렸지만 중국인들의 집단 폭력은 서울이 유일했다. 대한민국의 공권력을 깔보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사태였다. 우리정부의 굴욕적인 ‘3불 정책’ 약속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중국정부의 사드 보복도 같은 맥락이다.

중국유학생들은 자신이 유학 중인 국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부터 갖춰야 할 것이다. 일부 유학생들의 방자한 행동은 국내 대학의 높은 중국인유학생 의존도 한 요인이다.

올해 학위 및 연수과정을 포함한 중국유학생은 7만 1067명으로 전체 유학생의 44.4%에 달한다. 한중 관계의 앞날을 짊어질 젊은이답게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는 자세를 보여주길 바란다.

이러한 행동의 심리적 바탕이 편협한 민족주의임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일본도 한국도 이러한 부정적 집단 심리에서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일본인과 한국인은 타국에서 이러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안다. 중국인들이 유독 한국에서 국제 규범에 벗어난 행동을 거듭하는 건 오만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중국인의 오만한 대한(對韓) 인식은 시진핑 주석이 2017년 미국 플로리다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했다는 말에서 잘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코리아’는 중국의 일부였다.” 경찰은 현수막 무단 훼손 등 불법 행위를 철저히 수사해 처벌해야 한다.

민주사회에서 시민들이 각자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에 속한다. 진리와 이상을 추구하는 대학사회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따라서 중국유학생들이 몰려다니며 홍콩시위 지지 대자보를 제멋대로 훼손하는 행위는 민주사회의 기본 권리를 부인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재물손괴에 해당하는 엄연한 범죄 행위다. 홍콩이 중국정부의 관할 하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중국유학생들이 반발하는 이유도 이해할 수는 있지만, 대처방식은 분명히 잘못됐다.

지금의 홍콩시위가 과거 우리의 ‘6월 항쟁’을 모델로 삼고 있다고 할 만큼 그들의 민주화 갈망 의지는 절박하다. 시위현장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진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그런데도 우리정부는 중국의 눈치를 살피느라 공식성명 하나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 비록 정부는 나서지 못한다고 해도 대학 캠퍼스에서조차 중국유학생들이 자기들 안방인 양 행세하도록 놔둬서는 안 된다. 이번에도 그냥 넘어간다면 중국은 한국을 더욱 업신여기게 될 것이다.

5. 홍콩 시위 언론보도

이하 미디어오늘 아침신문 솎아보기를 소개한다.

11월 11일 홍콩 민주화 요구시위 현장에서 시위 참가자 2명이 경찰이 쏜 실탄을 맞아 쓰러지고 1명이 위독한 상태다. 지난 11월 8일 홍콩과기대 2학년 차우츠록이 숨진 후 또 경찰의 실탄에 시위대가 맞은 것. 시위대가 경찰의 실탄에 맞는 영상은 SNS를 통해 퍼졌다. 그러나 캐리람 홍콩 행정장관은 “시위대의 과격행동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혀 더 큰 갈등이 예상된다.

11월 12일 한국의 주요 언론도 SNS로 퍼진 이 영상을 1면에 실었다. 언론은 이번 사태가 지난달 중국의 강경진압 주문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오는 11월 24일 홍콩 구의원 선거에서 반중국파의 승리가 예상되자 선거를 연기시키려는 모습도 보인다고 해석했다.

경향신문과 한겨레는 사설에서 시위대 강경진압을 비판했다. 조선일보는 홍콩 시위의 모델이 한국의 1987년 6월 항쟁인데도 홍콩 시위에 정부 여당이 6개월째 침묵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언론보도를 종합하면 11월 11일 오전 7시 20분쯤 홍콩섬 동쪽 시이완호에서 경찰이 도망가는 시위자를 뒤에서 붙잡아 몸싸움이 벌어졌고 다른 시위자가 다가오자 경찰이 그를 향해 한 발의 실탄을 쐈다고 한다.

시위자가 쓰러지자 그 사이 반대편에서 또 다른 시위자에게 두발의 실탄을 쐈다. 언론은 이러한 상황이 생명의 위협을 느낄 만큼 급박한 상황이 아니었는데도 총을 쐈다고 전했다.

한국일보 2면 기사는 “홍콩 경찰이 이처럼 돌변한 것은 중국의 강경주문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며, “지난 10월 5일 복면금지법 시행 이후 경찰은 시위대가 공격할 경우 방어 없이 바로 최루탄을 맞대응하는 적극적 전술로 바꿨지만, 실탄 가격은 가급적 자제했다.

하지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1월 4일 람 장관을 만나 ‘혼란과 폭력을 제압하고 질서를 회복하라’고 직접 지시하면서 홍콩정부가 더 이상 밀릴 수 없는 상황으로 바뀌었다”고 전했다. 이어 “특히 당시 회동에 중국의 치안과 사법을 총괄하는 자오커즈 공안부장도 배석해 람 장관에게 무력진압을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전했다.

중앙일보도 10면 기사에서 “이날 홍콩 경찰의 강경 진압 기조는 지난 10월 말 19기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4중 전회 결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썼다.

이러한 강경대응이 오는 11월 24일 예정된 구의원 선거를 연기하려는 정치적 계산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한국일보는 “452명의 구의원을 선출하는데 시위 열기에 힘입어 민주진영의 의석 과반확보가 유력시되는 상황이다. 이들이 의회에 입성하면 제도권 내에서 정부의 정책에 제동을 걸뿐 아니라, 중국이 홍콩을 통제하는데 애를 먹을 전망”이라고 예상했다.

경향신문도 17면에서 “변수는 오는 11월 24일로 예정된 구의원 선거”라며, “유일한 직선제인 구의원 선거에서 반중파가 승리할 것으로 점쳐지자 홍콩당국과 친중국파는 시위를 이유로 선거 연기론을 흘리고 있다”고 전했다.

경향신문은 이날 사설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한 홍콩경찰과 배후의 중국당국은 규탄 받아 마땅하다”고 비판했다. 이어 “홍콩에서 중국이 시민의 정당한 권리인 집회를 억압하고 나아가 시위자에 총격을 가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 유혈사태의 책임은 전적으로 중국이 져야한다”고 썼다.

한겨레 역시 ‘또 실탄 발사, 홍콩 경찰의 강경진압을 규탄한다’는 사설에서 “중국정부가 홍콩사태 악화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며, “홍콩당국은 진상조사위 구성 등을 요구하는 시민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우선 강경진압 방침부터 철회해야 한다”고 밝혔다.

조선일보는 이런 홍콩사태에 우리정부와 여당이 침묵하고 있다며, 정부여당을 비판했다. 2면 기사 '홍콩시위 모델은 한국 6월 항쟁이라는데 정작 우리 정부여당은 수개월째 침묵'에서, “홍콩경찰이 11월 11일 반중 시위를 벌이던 시위대를 향해 실탄을 발포하는 등 홍콩사태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지만 우리정부는 수개월째 이 문제에 침묵하고 있다”며, “홍콩시위대가 한국의 1987년 6월 항쟁을 모델로 삼고 있다는 것도 알려진 사실”이라고 보도했다.

이어 조선일보는 “정치권에선 홍콩 시위가 거의 거론되지 않고 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관련 논평을 낸 적 없다”고 썼다. (2019. 11. 21)
 
사회적협동조합연합회중앙회 회장 한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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