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미애 소위원장이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1차 외교통일위원회 미주 소위원회에 참석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김민호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5일 조국 전 장관 사퇴 이후 공석인 법무부장관에 더불어민주당 대표 출신인 추미애 의원을 지명했다. 

판사 출신으로 5선 의원인 추 후보자는 정치권에서 '추다르크'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강단 있는 정치인으로 향후 검찰 개혁을 완수할 적임자라는 배경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날 청와대 고민정 대변인은 "법무부 장관에 내정된 추 의원은 소외계층의 권익보호를 위해 법조인이 됐고, 국민중심 판결을 내려온 소신 강한 판사"라며 "정계입문 후에는 헌정 사상 최초 여성 지역구 5선 의원으로 활약하며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했다"고 인선 배경을 설명했다.

고 대변인은 "판사 출신 국회의원으로서 법률 전문성과 정치력 등 그동안 추미애 내정자가 보여준 강한 소신과 개혁성은 국민이 희망하는 사법개혁을 완수하고 공정과 정의의 법치국가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추미애 누구?

추미애 의원은 1958년 대구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부모의 2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세탁소에 도둑이 들어 옷값을 변상하느라 집안이 어려워진 데다 막내까지 태어나자 부모님은 세 살 밖에 안 된 그를 외갓집에 보냈다. 어린 시절 부모와 떨어져 외갓집에서 자란 그는 강한 ‘독립심’을 키웠다. 그에게 자주 나타나는 ‘반항적 기질’과 ‘기득권에 대한 분노’는 이때 형성된 결핍심리일 수도 있다. 그가 부모의 반대에도 호남 출신에 다리 장애까지 있는 대학(한양대) 동기동창(서성환)과 결혼한 것도 이런 연장선일 것이다.

그는 1982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춘천·인천지방법원, 광주고등법원 등에서 판사를 했다. 법조계에서는 영호남을 넘어선 캠퍼스 커플 판사로 통했다. 하지만 판사 생활 10년 만인 1995년 DJ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했다. 대구 출신의 친구들과 달리 호남 출신 DJ가 만든 당에 가는 것은 어려운 선택이었다. 그는 초선 의원 시절 전관예우와 법조 브로커가 얽힌 사법부 부패의 실상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다. 그는 사법적 정의에 실망해 정치적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정치에 뛰어든 것이다. 그가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택한 ‘세탁소집 둘째 딸이 부정부패한 정치판을 세탁하러 왔다’는 슬로건도 그의 진심이었다.

그의 진가는 이어진 1997년 대선에서 빛이 났다. 그는 DJ 특보, 유세단장으로 지역감정에 정면으로 맞섰다. 이때 얻은 별명이 바로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한 잔다르크에서 따온 ‘추다르크’다.

1997년 DJ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의 정치적 주가는 더욱 뛰었다. 2000년 한국여성유권자연맹이 선정한 ‘20세기를 빛낸 여성, 21세기를 빛낼 여성’에, 2003년 <시사저널>이 시민단체 활동가를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차세대 지도자감 1위’로 뽑혔다. 2004년에는 ‘국민이 뽑은 정당의 최고 정치지도자 1위’(<월간중앙>-ANR 공동 여론조사)에 선정되기도 했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추미애 의원은 ‘무명’의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다. 그는 노무현 후보 측 ‘국민참여운동본부 공동본부장’을 맡아, 돼지저금통 선거자금 모으기 운동에 나서 ‘돼지엄마’라는 별명도 얻었다. 노 후보도 유세를 하면서 그를 ‘차세대 지도자’로 공인했다. 그러나 그는 2004년 노무현 탄핵에 가담했다. 자신이 만든 대통령을 스스로 탄핵하겠다는 180도 다른 정치적 선택을 한 것이다. 그는 광주 전남도청에서 망월동까지 3일간 삼보일배를 했지만 탄핵역풍을 맞고 17대 총선에서 낙선했다. 이는 그의 정치적 첫 시련으로 기록된다.

낙선의 회한을 달래던 추 의원은 2008년 18대 총선에서 재기에 성공했다. 지역구 3선인 그는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을 맡았다. 그런데 전혀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2009년 12월 30일 추 위원장은 정부·여당이 합의한 노동관계법을 야당 의원의 참여를 막고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본회의에서 날치기로 통과됐다. 야당의 당론도 물론 반대였고, 그때까지 추 위원장의 ‘노동관’에 비추어 180도 다른,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때 통합진보당 이정희 의원은 추 위원장을 향해 “위선자,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이은 두 번째 배신”이라고 소리쳤다. 당론을 어기고 여당의 ‘날치기’에 동조한 추 위원장은 자격정지 2개월이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추 의원은 이 사건으로 당내에서 ‘왕따’당하고 이후 서울시장 출마계획 등에 차질을 빚었다.

왜 그는 자신이 만든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하려 했을까. 물론 그는 자신이 주도하지 않고 ‘따라갔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그가 왜 탄핵에 동조했는지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다. 그 중에는 노무현 대통령 시절 ‘강금실 법무장관’에 비해 덜 대접받은 섭섭함도 포함된다. 그는 장관 물망에 여러 번 올랐지만 기용되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강 장관과 비교될 때 ‘질투’를 나타내기도 했다.

어찌 됐든 그는 이 선택이 잘못임을 인정했다. 그는 “대선운동을 해냈고 같이 부둥켜안고 승리를 기뻐했던 대통령과 인간적인 해후를 하지 못한 채 영영 작별했다”면서 “사과의 타이밍을 놓친 것을 무척 후회했다”고 고백했다.(자신의 저서 <물러서지 않는 진심>(2013년) 그는 당시 전당대회 전·후 봉하마을을 찾아 눈물로 참회했다.

추 후보자는 2008년 제18대 총선에서 승리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이후 제19대, 제20대 총선에서 이기면서 대한민국 헌정사상 최초의 여성 지역구 5선 의원 타이틀까지 얻었다.

추 후보자는 2016년 8월 27일 민주당 당대표로 뽑혔다. 그해 겨울 국정농단 사태가 벌어졌고, 여당이었던 새누리당 의원들까지 설득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끌어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진 대선에서 상임선거대책위원장을 맡으며 대선을 성공시켰다. 또한 지방선거, 국회의원 재·보궐선거도 승리로 이끌며 ‘선거의 여왕’으로 등극했다. 추 후보자는 2년간의 민주당 당대표 임기를 꽉 채워 활동했다. 민주당 정당 역사상 임기를 채운 당대표는 추 후보자가 처음이다.

한편 추 후보자의 남편은 캠퍼스 커플로 만난 변호사 서성환씨다. 서씨는 고3 때 교통사고를 당해 20번이 넘는 수술을 했고, 그 후유증으로 다리가 불편했다.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 추 후보자는 7년간 서씨와 열애 끝에 결혼했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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