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조영래 인권 변호사
[신소희 기자]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의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된 고(故) 조영래 인권변호사의 유족들이 형사보상금 1억8000여만원을 지급받게 된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지난 10월 31일 법원에 따르면 서울고법 형사10부(부장판사 박형준)는 지난달 말 국가가 조 변호사의 유족이 청구한 형사보상금 1억8970여만원을 지급하라고 결정했다. 재판부는 조 변호사의 부인 이옥경씨에게 8130여만원, 장남과 차남에게는 각각 5420여만원을 지급하라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기록에 나타난 구금의 종류 및 기간, 구금기간 중 받은 손실의 정도, 정신적인 고통, 무죄 재판의 실질적 이유가 된 사정 등 형사보상법에서 정한 모든 사정을 고려해보면 보상금액은 구금일수 568일 전부에 대해 1일 33만4000원으로 정함이 상당하다고 인정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형사보상법에 따라 구금일수 1일당 보상금 상한 기준(최저임금액 5배)에 맞춰 액수를 산정했다.

조영래 변호사는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인권 변호사다. 고등학교 때부터 한일회담 반대, 부정선거 규탄 등 학생운동에 앞장섰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인간다운 권리를 지켜 주기 위해 망원동 수재 사건 등을 앞장서 변호했다.

조 변호사는 박정희 정권 시절이던 1971년 5월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에 휘말려 옥고를 치렀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사법연수생이던 조 변호사와 고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이신범 전 신한국당 의원, 심재권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사제 폭탄을 이용해 정부기관 폭파 등 국가전복을 시도했다고 발표했다.

해당 사건으로 조 변호사는 징역 1년6개월형을 확정 받았다. 유족은 재심을 청구했다. 서울고법 형사13부(부장판사 구회근)는 지난 5월 30일 조 변호사의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에 대해 “전체적으로 공소사실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47년 만에 무죄 판결을 내렸다.

<양심을 지킨 사람들>의 저자로 필명 '산하'로 더 알려진 각가 김형민이 최근 12월 12일 조 변호사의 기일을 맞아 그를 기억하며 회고글을 올렸다.

다음은 글 전문.

전두환이 12.12를 맞아 정호용 최세창 등 왕년의 졸때기들과 인당 20만원 이상의 코스 요리를 즐겼다는 소식에 난 부아를 달래기 위해 졸저 <양심을 지킨 사람들>에 실었던 고 조영래 변호사의 일생을 곱씹어 본다. 그래 전두환 같은 건 조영래라는 빛의 배경일 뿐이다. 그의 기일이 12.12 오늘인 다음에야

격동의 80년대가 저물고 세계사적 격변기라 할 20세기의 마지막 10년, 90년대가 열리던 해 1990년의 12월 중순, 한 변호사의 장례식이 열렸다. 47년 돼지띠이니 나이 마흔 셋. 평범한 개인으로 보아도 요절이라는 표현을 쓰며 그의 단명을 안타까워할 나이였지만 영결식장에 몰려들어 눈물바람을 하고 있었던 조객들의 아쉬움과 슬픔은 유독 컸다. 믿기지 않는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를 원망하고 그를 이리 일찍 부른 하늘을 우러러 통탄했다. 세상을 등진 변호사의 이름은 조영래(趙英來)였다.

그의 영결식 순서지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름들은 그 자체로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구성한다. 장례식의 사회자는 “저녁이 있는 삶”의 유행어를 남긴 전 경기도지사 손학규, 조시(弔詩)를 읽은 이는 시인 김지하, 그 외에도 노무현, 문익환, 계훈제, 송건호, 이소선, 김근태 등 우리 시대의 큰 이름들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고, 그와 가까웠던 후배인 현 서울시장 박원순의 이름도 보이며, 한때는 고인과 뜨거운 동지였을 것이나 지금은 사뭇 다른 길을 걷고 있다 할 김문수 전 경기지사나 이재오 의원 등도 빠지지 않는다. 오늘날 보기에는 이채로운 풍경 중의 하나. 추모사를 쓴 사람의 이름은 오늘날 극우 논객으로 이름 높은 조갑제였다. 그는 추모사에서 그의 삶을 매우 간결하고 아름다운 명문으로 압축한다.

“'조변'은 작은 것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아는 이였다. 그는 연탄공장 주변의 진폐증환자, 스물 다섯살에 정년 퇴직해야 했던 여자, 분신자살한 젊은 노동자, 이런 작은이들의 문제 속에서 이 역사와 이 사회를 울리는 큰 의미를 뽑아냈다.

상처받은 권양이 자립할 수 있도록 자상하고 세심하게 보살펴준 이야기는 오영수의 단편 소설감으로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조영래는 억울한 사람들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이름'이 되었다. 그가 바로 '법을 배운 전태일'이었다. '조변'은 꽉 찬 80년대를 살았지만 결국 못다 핀 꽃이었다. 이것이 원통하고 억울한 것이다. 그는 10년 정도를 담을 그런 그릇이 아니었다. 짧았던 43년보다 몇배나 더 오래 이어질 아쉬움, 추억담, 그리고 긴 여운을 우리 가슴속에 남기고 그는 표표히 떠났다.”

이 추모사에 등장하는 몇 몇 단어를 근거로 그의 일생을 되짚어 보자.

‘진폐증 환자’

우선 진폐증 환자란 누구인가. 탄광에서 오래도록 일하다가 폐 속에 탄가루가 들러붙어 발병한 광부를 떠올리기 쉽지만 추도사에서는 ‘연탄공장 주변의’ 진폐증 환자를 말하고 있다. 주인공은 하다못해 연탄 공장의 노동자도 아니었다. 도심 한복판에서 진폐증에 걸린 환자는 연탄공장 주변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던 한 주부였다. 공장에서 근무한 적도 없던 그녀는 백약을 써도 무효인 감기에 걸려 있었다. 병명은 처음에는 폐결핵으로 진단됐지만, 재검 끝에 진폐증으로 밝혀졌다.

연탄공장 주변에서 그저 살기만 했는데 진폐증에 걸렸다! 이 사건을 특종보도한 이는 당시 조선일보 최구식 기자였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당시 의료보험증이 없던 환자가 다른 이의 의료보험증을 빌려 치료를 받았기에 복잡한 법적 문제가 발생하면서 피해자 인정을 받지 못할 처지에 이르게 된 것이다.

“진폐증은 맞는데 사태가 이러저러하고 이 진폐증이 연탄 공장 때문인지 밝히기도 애매하고 결정적으로 피해자가 가난해서 어떻게 소송을 하기도 어렵습니다. 좀 도와 주시지 않겠습니까.” 딱한 사정을 들은 조영래 변호사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집안을 들어먹으려면 송사에 나서라 하지 않던가. 피해자는 자신의 고통보다도 송사에 들어갈 비용과 시간, 그 외 자신의 가정의 어깨에 부려질 짐 더미들에 지레 겁을 냈다. 조영래 변호사는 고심 끝에 기가 막힌 묘안 하나를 생각해 냈다. 수십만 자의 법조문 속에 묻혀 잠자고 있던 ‘소송구조 제도’였다. 소송구조란 경제적 약자에게 인지대 등 소송에 필요한 비용을 법원이 대신 내주는 제도였는데 거의 이용자가 드물어 가사상태에 있던 법조문이었다. 조영래 변호사는 그 잠을 깨워서는 높디 높은 문턱 위에 서 있던 법원 코 앞에 들이민 것이다. 그러나 이는 링 위에 겨우 올랐을 뿐이었다. 메인 게임이 곧 시작될 터였다. 마침내 공이 울렸다.

피고 연탄공장 측은 예나 지금이나 국민들을 주눅 들게 하는 단어를 꺼냈다. ‘공익성’.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적인 이익은 당연히 희생해야 한다고 교육받고 교육하던 시절이었다. 그들은 석탄 산업의 공익적 성격을 강조하는 한편, 연탄공장이 주민들에게 피해를 준 것이 아니라 피해를 자초한 측면이 있기에 피해자들이 일부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해당 지역에 연탄공장이 먼저 들어섰으며 그 뒤에 주택가가 형성된 바, 석탄 가루 방산에 대한 주민들의 ‘수인할 의무(참아야 할 의무)’를 들이댄 것이다. 여기에 조영래 변호사가 카운터 펀치를 날린다. 그 주먹은 꽤 묵직했다. 바로 대한민국의 헌법이었던 것이다. “모든 국민은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집니다! (헌법 제 35조)” 이는 ‘여태껏 이름뿐인 장식물에 머물렀던 환경권을 정면으로 끌어내 헌법을 현실 속에 살아 움직이는 일상규범으로 만드는 데 기여” (안경환, 조영래 평전 중)한 호쾌한 일격이었다.

‘스물다섯 정년의 여자’

스물다섯 정년의 여자의 사연 역시 기박하다. 교통사고를 당한 직장 여성이 피해 보상을 요구했더니 1심 판결에서 당시 여성들의 평균 결혼 연령을 계산해서 25세까지의 수입만 보상하라는 날벼락같은 판결이 나온 적이 있었다

 여자는 결혼하면 돈을 못 버니 정년은 25세라는 대담한 판사의 대단한 판단이었다. 절망한 원고 이경숙씨가 포기하려던 찰나 한 변호사에게서 연락이 온다. ‘신문을 보고’ 연락을 했다는 조영래 변호사였다. “제가 변론을 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이경숙은 망설였다. 지긋지긋하게 불러대고 물어대고 따져대는 법정 투쟁을 계속할 의사도 능력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변호사는 의기충천이었다.

“제가 무료로 변론해 드릴께요. 한 번 가 보십시다 에?”

아마 이경숙도 황당했을 것이다. 대체 이 사람은 무엇이며 신문 몇 줄 보고 와서는 왜 나한테 이렇게 들이대는 것인가? 그러나 변호사의 열정은 그 의문을 덮을 만큼 대단했다. 온갖 설득으로 원고의 마음을 돌려 놓았고 재판도 시작하기 전에 최종 변론같이 기나긴 ‘의견서’를 작성해 재판부의 기를 질리게 만들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사실 우리나라 주부들의 가사노동 댓가를 금전으로 환산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러나 그 기준을 하필이면 ‘최하위 생계노동’인 도시 여성의 날품삯 4천원으로 삼은 것은 정당하게 평가하려고 노력한 것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헌법에 보장된 권리가 사법부에 의해 인정되지 않고 확인되지 않는다면 여성들이 기댈 언덕은 없는 것이지요!” 당시 그를 취재한 경향신문 기자는 이 괴짜 변호사를 변호사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미남형의 얼굴에 빗질을 하지 않는 듯한 머리 모양이 퍽 저항적인 인상이다.”

그리고 1년 후 1986년 3월 4일, 마침내 고등법원은 1심의 판결을 깨고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린다. 여자의 정년 역시 남자와 같은 55세라는 상식적인 판결이 나오기까지는 그렇게 지난한 과정이 있었고 그 지난함을 일삼아 찾아들었던 변호사 조영래가 있었다. "군자는 의로움에 깨치고 소인은 이로움에 깨친다" (논어 이인편)에 따른다면 조정래는 이(利)의 기승 속에 풀이 죽어 있거나 숫제 시커멓게 죽어 가던 이들의 희망을 지켜 내는 의(義)에 목마른 사람이었다.

다시 조갑제의 추도사로 돌아가보자. “분신자살한 젊은 노동자”

한국 경제는 고도성장기에 접어들고 있었으나 경제 발전의 금자탑의 그림자는 진하고도 짙었다. 시커멓게 드리운 그늘 속에서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언젠가 맛볼 따스한 햇볕을 갈구하며 발버둥치다가 시들어 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은 지금까지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사각지대를 밝히는 횃불과도 같았다. 평화시장의 햇볕 들지 않는 작업실에서 피를 토하며 미싱을 돌리는 동심들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다가 좌절 끝에 죽어간 ‘한 노동자의 삶과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고 한자투성이의 노동법전을 뒤적이며 “나에게 대학생 친구 하나만 있었으면” 하고 부르짖었던 전태일의 절규는 젊은이들의 양심에 불을 질렀다.

그 선두에 조영래가 있었다. 대학 졸업 후 대학원에 적을 두고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조영래는 청계천으로 달려가 ‘서울법대 학생장’을 주선하고 시국선언문을 기초한다. 뒤늦게나마 전태일의 대학생 친구가 되어 준 조영래에게 전태일이 화답이라도 한 것일까. 조영래는 전태일 덕분에 평생의 배필을 얻게 된다.

1971년 6월 3일 동아일보에는 한 여대생의 투고가 실린다. “..... 한국 사회에서 양심을 더럽히지 않고 산다는 것은 정말 어렵게 보인다는- 이 슬프고 치사한 사실이 정말이지 진절머리나도록 싫기 때문에 우리 세대는 ‘정치적. ’사회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양심의 아픔 없이도 각자가 개인의 행복과 안락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가 너무도 그리워서, 정치 사회에는 소질도 취미도 별로 없는 사람이 정말 ’재미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 우리는 없는 소질을 불러 일으켜서라도 이런 사회의 성립을 방해하는 모든 요소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목청을 높이지 않을 수 없다.......”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고 분노한 이화여대 4학년생 이옥경이었다. 전태일의 ’대학생 친구‘ 조영래는 이 투고에 그만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수십년 뒤에도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피해자를 찾아 달려간 변호사의 젊은 시절이야 오죽했을까. 이화여대생 이옥경은 신문에 독자 투고가 실린 며칠 뒤 “머리에 비를 댄 것 같지 않은 투박한 남자”의 전화를 받고 만나게 된다. 불의한 사회를 진절머리나게 싫어했던 여대생과 옳은 일과 이 여자다 싶자 불에 덴 듯이 급하게 굴었던 운동권 남학생은 금새 사랑에 빠진다. 저승의 전태일이 살아 있는 조영래의 중매를 선 셈. “네가 의로움을 추구하면 그것을 얻고 영예로운 예복처럼 그 의로움을 입으리라. 새들은 끼리끼리 날아들고 진리는 그것을 실천하는 이들에게 돌아오리라.” (집회서 27장 8절-9절)

“법을 배운 전태일”

둘은 곧 결혼을 약속하지만 그 결혼은 만남 이후 8년을 미루게 된다. 71년 당시 조영래는 사법고시에 패스한 사법연수원생이었지만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감옥에 갔고 출옥한 뒤로도 근 6년 동안의 엄혹한 수배 생활을 함께 해야 했던 것이다. 그 기간은 조영래가 “법을 배운 전태일”로서 거듭나는 기간이기도 했다.

조영래는 그 엄혹한 수배 생활 중에 수양을 하듯, 순례를 하듯 고행을 하듯 전태일의 일생을 추적하고 그를 잘근잘근 씹어먹은 뒤 그 이름도 유명한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명저를 세상에 토해 냈다. 장기표가 말했듯 그 글은 조영래의 글이기도 했지만 전태일의 글이기도 했다.

“돌아가야 한다 평화시장의 동심 곁으로”를 독백하던 전태일은 조영래의 명문장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줄기로 되살아났다. 글 한 줄 쓰지 않았던 예수의 말씀을 담아 세상을 바꾼 복음서처럼, 전태일 평전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과 가치관을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마태와 마가와 누가와 요한은 그 앞에 자신들의 이름은 남겼으되 (물론 누가 이외의 저작자들은 후세의 추측에 의존한 것이긴 하지만) 조영래는 평생 동안 그 책의 저자가 자신임을 알리지 않았다. 그는 진실로 자신을 바닥까지 낮추고, 드러내지 않아서 빛나는 사람이었다.

“상처받은 권양”

생전의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사건이고 그의 육체적 정신적 역량을 소진시킨 사건이라면 역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학창 시절 나는 이 사건 관련 변론 요지서 전문을 복사한 종이를 몇 년 동안이나 일기 사이에 끼워 놓았었다. “변호인들은 먼저 이 법정의 피고인석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권양….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온 국민이 그 이름은 모르는 채 그 성만으로 알고 있는 이름 없는 유명 인사, 얼굴 없는 우상이 되어버린 이 처녀는 누구인가.”로 시작하는 그 글은 법률적인 변론 요지서를 훨씬 넘어서서 한국 현대사상 위대한 명문으로 기록된다.

그 말 한 마디 , 모음과 자음 하나 하나 모두가 사람의 양심을 헤집는 갈퀴였고, 눈물샘의 마개를 빼 버리는 예민한 손길이었으며 야만에 대한 돌팔매였고 비인간의 벽을 들이받는 양심의 공성추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에 통곡하던 소녀가 나이 들어 대학생이 되었을 때 그녀는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대학생이 되었고 서울대학교 학생증을 버리고 위조된 주민등록증을 들고 공단 노동자가 되었을 때 그녀는 “성을 혁명의 도구로 이용하는” 마녀로 전락했다. 이 기막히고도 뻔번한 역사의 역류 속에서 조영래는 수많은 변호사들의 선두에 서서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둘 수는 없음”을 호소했다. 그리고 그 수고는 그를 갉아먹었다.

밤새 변론 요지서를 쓰다보면 산처럼 쌓였다는 담배 꽁초, “우리는 오늘 우리 사법부의 몰락을 봅니다. 아무리 뼈아프더라도 이 말을 들어주십시오. 사법부는 그 사명을 스스로 포기한 것입니다. 한 그릇의 죽을 얻는 대가로 장자 상속권을 팔아넘긴 것처럼, 사법부는 한갓 구구한 안일을 구하기 위하여 국민으로부터 위탁받은 막중한 사법권의 존엄을 스스로 저버린 것입니다.”라고 절규하던 분노의 스트레스, 자신의 몸 돌보지 않고 세상의 바닥을 돌아다니던 고단함이 그를 폐암으로 몰고 갔고 마흔 셋.....너무도 아까운 나이에 그는 세상을 떴던 것이다. 지금의 나보다도 더 젊은 나이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그들이 배부를 것이라” (마태복음 5장 6절) 했건만 세상의 행복과 즐거움을 채 누려 보지도 못하고.

조갑제의 추도사 중 조영래 변호사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이 있다면 이것일 것이다. “ 작은 것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아는 이” 작디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 것들, 작달막하여 곧잘 무시되는 것들, 작은 키로 까치발을 하고서 세상을 바라보던 이들을 위하여 조영래 변호사는 그 일생을 바쳤다. 미국 방문 길에 아들에게 보낸 엽서에서 조영래 변호사는 역시 작은 것의 소중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앞의 사진은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다. 아빠가 어렸을 때는 이 건물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었다.

아빠는 네가 이 건물처럼 높아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이 되거나 제일 유명한 사람,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작으면서도 아름답고,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건물이 얼마든지 있듯이 - 인생도 그런 것이다. 건강하게, 성실하게, 즐겁게, 하루하루 기쁨을 느끼고 또 남에게도 기쁨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그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지키기 위해서, 조영래 변호사는 작고 보잘것없고 힘없는 것들을 즐겨 가리고 덮고 누르고, 밟고 섰던 거대한 장벽을 향한 돌진을 평생 동안 되풀이해야 했다. 많은 사람들의 평범한 행복을 가져오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험한 일인지 조영래 변호사는 그 자신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엽서의 끝맺음은 이렇다. “실은 그것이야말로 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처럼 높은 소망인지도 모르겠지만.”

공자가 그랬다. “의로움을 보고도 행하지 않는 자는 용기가 없는 것이다.” 조영래는 그가 본 모든 의로움을 행동으로 연결시켰다. 우리 역사에 그만한 용자(勇者)가 또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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