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중원 변호사
-소시오패스는 누구인가. 내가 혹시? 아니면 우리 주위에서 반사회적 인격 장애자가 나를 노리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1980년 서울 공대 건축과를 졸업했다. 바로 그 해 봄에 건축 설계와 감리, 엔지니어링을 전문으로 하는 (주)공간에 입사하였다. 내가 입사할 당시 회사는 아직 중소기업 수준이었으므로 설계 부서의 총 인원은 고작 30명 남짓이었다. 그러나 회사는 일취월장 발전하고 있었다.

그 당시 정부가 경제개발에 역량을 집중하면서 공장이나 건물, 항만공사, 도로와 교량 등 건설 경기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박 상무는 나보다 입사가 4년쯤 빨랐는데 같은 설계팀 소속이었고 직급은 과장이어서 나의 바로 위 직속상관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대략 1년 동안은 겉모습은 온화한 얼굴에 부드럽고 따뜻하고 친절하였으며, 대학 후배인 나를 남모르게 배려하는 것처럼 보였다.

입사한지 1년쯤 지나서 어느 날, 내가 3개월여에 걸쳐서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설계도면을 그에게 들고 가서 자세한 검토를 부탁하였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 박 과장은 내 책상 위로 그 도면을 내던지더니 갑자기 큰소리로 질러대기 시작하였다.

“이걸 설계도라고 그렸어. 온통 계산착오와 오류투성이야.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무능하기 짝이 없는 머저리 같은 자식 같으니라고.”

하지만 다시 검토해 보아도 계산착오 같은 것은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 후부터 박 과장은 나를 대하는 태도가 갑자기 표변하였다. 그는 안하무인 식으로 사사건건 흠을 들추어내고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그는 쟁쟁한 경쟁 상대를 만났다고 의식하기 시작했으며, 경쟁의 싹수를 미리부터 차단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이제부터는 인정사정없이 짓밟아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는 입사 당시부터 명문고, 명문대 출신이라는 자부심에다 깔끔하고 세련된 도시적 이미지에 상사들로부터는 최고로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부하 직원들에게는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을 만큼 뻣뻣하고 불친절했으며, 힐끔힐끔 자신을 몰래 쳐다보는 직원들을 마치 벌레 보듯이 무시하였다.

그리고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불만을 토로하면 안 되었다.

어쩔 수 없이 그의 오만하고 이기적이며 자기본위적인 본성이 차츰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자신의 이익과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고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하면 철저히 책임 회피를 했다. 가끔 거짓말을 하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지능적이었다.

그는 소위 좋은 부서로의 이동과 승진을 하기 위해서라면 상사에게는 끊임없이 아부하고 경쟁 상대가 되는 동료, 후배들과는 싸우고 도전하며 투쟁을 벌이는 데 병적인 도취감을 느끼고, 질투심과 시샘이 많았던 것이다. 그는 동료나 후배가 어느새 부쩍 자라 자기 위치로 치고 올라오는 것에 대해 선두주자로서 느끼는 불안감이 격렬한 적개심으로 변하는 경우였다.

박 과장은 어느 날 또다시 무슨 일인지 약이 바짝 올라서 무턱대고 퍼붓기 시작하였다.

“이봐, 너는 말이지 실제로는 일다운 일 하나 제대로 못하면서 우리를 속이고 있단 말이야. 다른 사람은 속여도 내 눈만은 절대로 못 속이지. 네가 이 부서를 떠나주는 것이 피차간에 좋겠지.

내가 떠날 이유가 없으니까, 네가 다른 곳으로 가주어야겠지. 빨리 인사팀과 상의하는 것이 좋을 거야. 설계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미적분도 할 줄 알고 기하학도 잘해야 되지. 네가 공고 출신이니까 그걸 제대로 배웠겠어.

난 말이야, 네가 어떻게 우리 대학에 들어왔는지 도대체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난 이래봬도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고 이과반에서 항상 상위권이었어.”

그때는 나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박 과장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제발이지, 그만 두십시오. 과장님은 아래 사람을 깔아뭉개고, 험담을 하고, 무척 괴롭히고 있습니다. 상사로서 권력을 휘두르는데 쾌감을 느끼고 있어요. 그렇게 하는 것은 과장님 주위의 모든 사람을 무척 힘들게 합니다. 과장님도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고, 이러한 행동은 과장님의 경력에도 큰 결점이 될 것입니다.”

박 과장은 그때 쓸데없는 소릴 집어치우라는, 성난 표정으로 나를 한참 동안이나 집어삼킬 것처럼 쏘아 보았다.

그 무렵 나는 묵묵히 자신의 업무를 수행하였고, 언제나 겸손했고 소탈하였다. 그러나 박 과장에 대해서는 내버려두는 수밖에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내가 회사의 배려로 프랑스 유학을 다녀오고 차장, 부장, 상무로 승진하는 동안 박 상무와의 근무경력 상 격차는 차츰 좁혀지기 시작해서 결국 없어졌다. 나와 박 상무가 같은 해, 같은 날에 상무 승진을 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승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높은 직책이 주어지면 당혹해 하고 심지어 두려움마저 느꼈지만, 내가 매우 근면하고 특히 설계 분야에서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기 때문인지 회사는 아주 빠르게 승진을 시켜주었다. 그 회사는 협조와 원칙을 중요시하는 정상적인 기업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 한 자리 남은 전무 승진을 위해 박 상무는 무척이나 노심초사할 것이다. 그는 그 사악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회사 내에서 나름 철저하게 인맥 관리를 하였고, 또 입찰 과정에서 경쟁 회사의 정보 빼오기나 학벌과 인맥을 이용한 대형 건설회사와의 관계 유지, 특유의 술수부리기와 협상 기술 등 특정 분야의 업무 처리에 있어서 독특한 그만의 역량을 가지고 있어서 낙오되지 않고 승진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뒷거래를 할 수 있는 강점이 있었다.

오히려 그는 계속해서 승진할 것이다. 업무처리와 출세에 관한한 무자비했고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았으며 사이코패스와 같은 번득이는 광기와 천재적인 연기력이 있으니까.

그러므로 내가 같은 날 함께 상무로 승진할 당시 박 상무는 질투와 시샘에 사로잡혀서 거의 정신이 나갈 만큼 나에게 큰 앙심까지 품고 있었다. 지금, 박 상무만큼은 전무 승진을 앞두고 두 사람이 경쟁 관계에 있으니 내가 사막 여행에서 어서 죽어 없어져주기를 매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리고 있을 터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독실한 크리스천이었고 언제부터인가 강남 대치동의 한 교회에서 장로로 있었다. 그는 내가 살아서 돌아오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 사악한 인간은 혼자 있을 때면 남몰래 기도할 것이다.

‘하나님, 하나님. 그 놈은…… 사막에 미친놈입니다. 사디스트 아니면 마조히스트, 사이코, 여성공포증에 걸린 성불구자이고, 변태입니다. 그 자식이 사막에 가는 것은 은밀한 오르가즘의 절정에 빠지기 위해서겠지요. 누가 알겠습니까? 그러나, 결국 사막에서 죽게 되겠지요. 운명이란 그런 거지요.

그 자식만은 사막의 태양이 태워서 없애버려야 할 거에요. 아니면 아프리카의 식인종에게 잡혀 먹거나 또는 하이에나 떼들이 물어뜯어서 살점 하나, 뼈다귀 하나 안 남기고 먹어 치워야 되겠지요……. 나에게는 평생 도움이 안 되는 인간입니다. 아멘, 아멘.’

내가 왜 그토록 사막에 열광하였는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언제든지 자신의 속내나 감정을 드러내는 일을 의식적으로 피하였다. 사실은 나 자신도 고개를 갸우뚱 한다.

그렇다면 어디선가 사막의 정령이 나를 유혹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막의 정령이 나에게 마법을 걸은 것이다. 사막에는 항상 꿈과 전설, 환상이 있었다.

그래도 나와 절친하였던 몇몇 옛 친구들만큼은 어느 정도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유일한 취미는 오지 여행이었다. 그러므로 남들이 흔히 가는 이름 난 관광지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서 가본 곳이 별로 없었다.

나는 관광이란 빡빡한 일정에 얽매여 괜히 바쁘기만 한 것인데 반하여, 여행이란 마음만은 한껏 한가한 것이어서, 낯선 곳에서 자유를 만끽하면서 자기의 먼 미래와 꿈을 스스로 더듬어가듯 자신의 상처를 천천히 치유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 (2000년 7월이다.) 여름휴가 중에 사하라 사막 남쪽에서 사막 여행을 하는 중에 있다. 그러나 고장 난 고물차는 꼼짝없이 사막의 모래언덕 계곡 사이에 갇혀있고 식수와 식량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절망적인 상황이다.

오늘밤은 심신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지만 잠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 잠을 자려고 애쓸수록 더욱 잠을 이룰 수 없다. 암청색 밤이 흘러가고 있다. 사그라져 가는 모닥불에서 회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독약같이 검고 쓰디쓴 아랍 커피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면서 깊은 여운을 남긴다. 나는 하염없이 상념에 잠겨 옛날 일을 되새기고 있다.

지금, 여기 사막에서 죽는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로 생각되었다. 자신의 현재 처지가 너무 한심스러워서 이런저런 조각난 상념들이 끊임없이 나의 머릿속을 오락가락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 사람들은 이 한심한 상황에 대하여 뭐라고들 입방아를 찧을 것인가?

사람들은 이 불행한 사태를 슬퍼하기 보다는 오히려 내심 비웃을 지도 모른다. 도대체 그 뜨거운 사막에는 왜 간 거야, 미친 짓이지, 어처구니없는 일이야, 인간이 그런 식으로 멍청하게 죽다니 안타깝군, 하고 말이야. 기껏 동정하는 축은 그렇게도 사막을 좋아하더니 사하라가 그를 홀린 거야, 운명이지, 운명이야, 라고 말할 것이다.

특히 회사 사람들은 안타까운 마음에 너도나도 한마디씩 말할 것이다. 그러나 <박상길 상무>만은 나를 마음껏 비웃으면서, 아주 잘 된 일이라고, 자신의 기도 소리를 듣고 하늘이 도왔다고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를 것이다.

나는 대학졸업 후 방위 제대를 하고 나서 동기들처럼 유명한 건설 회사에 입사하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작은 회사에 들어간 것이다. 그러니까 <김규현 상무>는 나보다 4년 후배이다. 그는 건축 설계에 미쳐 있었기 때문에 우리 회사에 입사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김 상무는 2000년 여름 사하라 사막 남쪽에서 죽었다. 벌써 10년 전 일이다.

그때 그와 나는 전무 승진을 앞두고 경합 중에 있었다. 그러나 회장은 그를 편애하고 있었으니까 그가 한결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사하라에서 비명횡사 하였기 때문에 나는 어부지리로 승진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나는 그 회사에서 전무까지 승진했으나 여자 비서와 관련된 모종의 불미스러운 일과 관계 회사로부터 오랫동안 정기적으로 금품을 받은 혐의 등이 겹쳤기 때문에 중간에 강제 퇴직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즈음에서 양떼 틈에 섞여 있는 양의 탈을 쓴 한 마리 늑대라는, 나의 실체가 발가벗겨진 것이다.

나는 회사 생활을 오래 하면서부터, 대략 5,6년 지나면서 내가, 특히 내 성격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누가 귀띔을 해준 것이 아니다. 그때부터 서서히 스스로 깨달았다고 할 수 있다.

나쁜 행동, 비양심적인 행동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서슴없이 잘못된 행동을 자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후회하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그때는 적자생존의 원리가 지배하는 조직사회를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획득한 나의 독특한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훨씬 나중에서야 자신이 혹시나 사이코패스 또는 소시오패스가 아닌가 약간 의심하였다. 그 전에는 그런 용어조차 알지 못 했다. 다만 사이코라는 말은 그 부정적 인식 때문에 그 사용이 꺼려진다. 나는 어떤 정신적 장애가 있을지언정 미치지는 않았지 않는가. 내가 잔인한 범죄형 사이코패스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위안을 삼았다. 공감 능력이나 죄책감이 전혀 없고 잔인한 충동성을 억제하지 못하는 괴물 인간들인, 연쇄살인범이나 방화범, 가학적이거나 변태스러운 성 폭행범 같은 중범죄자 말이다. 나는 회사를 다니던 시절에는 약물이나 알코올 중독자도 아니었다. 철저히 자기 관리를 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솔직히 말하자면, 사회적 지위나 카리스마를 교묘하게 이용하고 양심도 죄책감도 없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일하는 지능적인 소시오패스가 아닐까. 그렇지만 나는 소시오패스의 가장 일관성 있는 특징 중 하나인 약간 모호한 성 정체성, 즉 동성애적 경향은 없다. 나는 단연코 동성애자이거나 양성애자는 아니다.

물론 지금 새삼스럽게 내 자신이 소시오패스라고 커밍아웃하는 것은 아니다. 어디 나뿐이겠는가. 우리 사회의 지도층에는 의외로 이런 유형의 인간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도외시 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나처럼 교묘하게 정체를 숨기고 살아갈 뿐이다.

그러므로 요즈음 인기를 끌고 있는 막장 드라마에는 어김없이 소시오패스 캐릭터들이 주인공 또는 조연급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분석해야할까. 실력 없는 작가들이 스토리텔링과 인물 창조에 한계에 부딪치게 되자 시청자의 눈길을 끌고 드라마의 인기를 위해 극단적 성격의 인간을 내세우는 면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이들 드라마는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한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인가. 우리 주변 곳곳에 드라마에서처럼 소시오패스들이 숨어서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정신병자라고 할 수 있을까. 확실하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 약간의 인격장애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집 밖에서는 괜찮아 보이지만 집 안에만 들어오면 기고만장해서 난리를 피우는 그런 유형이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이 너무 잘났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이 나를 우러러 보고 복종해주길 원하지만 내면엔 열등감이 깔려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건드리면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게 된다. 또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상당한 의처증이 있었다. 나는 술만 마시면 또는 술을 안마시고도 난폭하게 구는 배우자이고 아버지였다. 그랬으니 내 아내는 나의 자기애성 인격장애 성향과 의처증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가 행방불명이 된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나의 경우 선천적인 요인은 없다고 단정한다. 우리 외할아버지의 아버지는 대학병원 의사로 병원장까지 지냈고 외할아버지 역시 종로 2가에서 잘나가는 안과 개원의였으며, 본가의 경우 할아버지는 지방법원 법원장까지 지낸 훌륭한 변호사였으니 말이다.

다만 아버지는 그 옛날에 명문대를 나왔지만 고등고시를 여러 차례 계속 떨어지고 결국 대기업에 입사해서 임원까지 지냈다. 그랬으니 아버지는 판검사가 된 법대 동기들에 대해 상당한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었다. 하여간에 나에게 갑자기 돌연변이가 생겼다고 단정하기는 그렇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그때가 중학교 시절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때부터 벌써 부모님으로부터 문과 계통이면 법대에 가서 판검사가 되어야 하고, 이과 계통이면 의대에 가서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야 했다. 그건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한술 더 떴다. 어머니는 오직 공부 얘기만 했던 것이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꼼짝 말고 죽은 듯이 공부만 하라고 강요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공부 기계가 될 것을 강요한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는 나를 볼 때마다 항상 ‘왜 더 노력하지 않느냐, 그러다가 서울대 떨어진다.’고 다그쳤고, 어머니는 덩달아 ‘성적이 왜 그 모양이냐.’고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댔다. 엄부자모嚴父慈母라는 그 당시 전통적인 역할 분담이 우리 집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엄마가 오히려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엄마는 명문 여대 영문과 출신으로 한때 여고에서 영어 선생님으로 근무한 적이 있었으나 아주 일찍부터 아버지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 각기 방을 따로 쓸 만큼 소원했고 대화도 거의 없었다. 어머니는 우리 두 형제의 성공에 자신의 인생 목표를 걸고 있었다.

그처럼 극성이었으나 나는 물론이고 동생 역시 부모님의 기대에는 훨씬 못 미쳤다.

오로지 법대 아니면 의대. 판검사 아니면 의사. 그랬으니 공부는 오직 국‧영‧수 위주였다. 스포츠나 예술 등 다른 분야는 엄격히 금지 되었다. 그것들은 잡 과목으로 입시공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는 숨이 턱턱 막혔다. 부모님은 장남인 나에게 지나친 기대를 하고 있었고 나는 가중한 스트레스를 해소할 길이 없어서 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나는 원래 음악과 시 등 예술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서울예고에 진학하고 싶었다. 가수 송창식 선배처럼 말이다. 그러나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에게 넌지시 예고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가 골프채로 여기저기 죽도록 얻어맞았다.

예술 좋아하네. 딴따라가 되고 싶은 거야. 병신 머저리야, 그러다가 굶어 죽어. 그건 상놈, 하층민이나 하는 거야. 그 이후에도 자주 아버지는 골프채로 배를 쿡쿡 찌르고 뺨까지 때렸다. 물론 어머니는 그때만은 역성을 내며 그 자식 더 맞아야 한다고 아버지를 거들었다.

가정폭력. 아동학대.

아버지의 폭력과 어머니의 폭언이 끊임없이 계속 되었다. 그들의 행동은 부모의 특권인 훈계와 그에 따른 처벌이기 때문에 정당화 되었다.

그랬으니 나는 더욱 순종적이고 내향적이며, 소극적이고 극히 예민하게 되었다. 한때 야뇨증과 대인기피증까지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의 내면에서 자아 정체성은 회복이 불가능하게 철저히 파괴 되었다. 그 대신 악의 씨가 심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고3일 때 이과 성적은 도저히 의대에 갈 성적이 아니었다. 담임은 아버지에게 솔직하게 알려주고 순리적으로 공대로 진학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담임과 몇 번씩이나 충돌하고 싸우면서까지 의대에 지원서를 내도록 하였다.

그것도 반드시 서울대 의대여야 했다. 그러나 역시 낙방하였고 4수까지 가게 되었다. 나는 그때 너무 지쳐서 대학입시 공부는 진력이 나있었다. 자포자기했고 그래서 종로의 유명한 입시학원에 다니기는 했지만 설렁설렁 그러나 잔뜩 의기소침해서 웅크린 채 그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공대로 가게 된 것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쓸데없는 짓이긴 하지만, 내 어린 시절 부모님은 너무 간섭해서는 안 되었다. 그것이야 말로 내 예술적 창의력과 인간으로서 자율성을 말살시키는 행위였다. 나를 마음껏 풀어 놓아야 했다. 나는 그때 맹목적 사랑이 필요했던 것이다. 내 모험심과 호기심, 창의력, 내 마음의 여유로움과 긍정적인 힘이 내 꿈과 끼를 하늘 높이 날게 할 수 있도록 말이다.

내가 어린 시절, 부모 모르게 마음 졸이며 하모니카와 기타, 바이올린 등 악기를 얼마나 좋아했던가. 고등학교 1학년 시절, 벌써 펑크나 포크, 사이키델릭 같은 외국 대중음악과 그랜드펑크데일로드, C.C.R 같은 외국 밴드 음악을 들었다. 그때는 로커들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헤드뱅잉 하던 시절은 아니었다.

나는 감성적이고 음악적 감수성이 풍부했다. 그리고 시집과 소설책을 닥치는 대로 읽기를, 영화관에 몰래 숨어들어가기를 얼마나 좋아했던가. 온몸을 마구 흔들어 대며 춤추기도 좋아했다. 춤을 추면 나는 진정 살아 있었다.

얼마나 상상력이 풍부했던가. 어딘가 깊고도 아득한 원천에서 솟아나는 상상력으로 싱싱한 언어를 조립해서 시를 썼다. 기타 교본을 탐독했고, 멜로디와 화성, 대위법에 맞춰 내 시를 작곡하려고 얼마나 머리를 싸매고 낑낑 거렸던가. 나는 그때 가사의 서정성에 사로 잡혀 있었다.

그래서 나는 틀림없이 시인, 작곡가, 심지어 밴드마스터나 기타리스트, 아니면 영화감독이 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부모는 그 모두가 공부에 장애가 될 뿐이라고 하면서 엄격히 금지하였다. 금지하고 또 금지하였다. 나는 그것들 모두하고 완벽하게 작별을 하였다. 어린 나는 도저히 부모의 과도한 욕망에 맞서 저항할 수 없었다. 내겐 힘이 없었다. 철저히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부모는 그걸 끝내 깨닫지 못했다. 어머니는 몇 해 전 임종의 순간에도 “네가 의사가 되었더라면……”라고 말했다. 그 말은 나의 따귀를 후려치는 것처럼 날아들었다.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잠시 멈칫 거렸다. 그러나 나는 울부짖고 싶었다. ‘그래, 그래. 당신이 나를 괴물로…… 인간 괴물로 만들었지. 아직도 모르고 있나. 왜 미안하다고 그 말 한마디를 하지 못하지.’ 그러나 나는 꿀꺽 삼켜 버렸다. 그리고 그때 그 여자의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을 숨을 깊이 들여 마시고 가까스로 억제하였다.

지금 나는 ‘한강 잠두동 선착장’에 나와 있다. 어린 시절 우리 이층집이 근처 합정동에 있었다. 밤이 점점 깊어가고 있다. 몇 시간째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앉아있다.

암청색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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