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8월1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원로 시민단체 동아시아평화회의 주최로 열린 '한일관계의 위기를 넘어 동아시아평화로' 8.15 74주년 특별성명 발표에서 이부영 전 의원이 성명 발표 설명을 하고 있다.
[김홍배 기자]2004년 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인 열린우리당 의장을 지냈던 이부영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이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토론 발언은 "거짓 주장"이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이 이사장은 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장문의 글을 통해 2004년 4대 개혁입법 실패에 대해 “국가안보법 개정 여야합의를 여당이 파기한 탓”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전날 유 이사장이 JTBC 신년특집 토론에서 2004년 노무현 정권 당시 국회에서 발생한 ‘국보법 파동’을 거론하며 한나라당 때문에 개혁 입법이 실패했다고 한 주장을 반박한 것.

유 이사장은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 등 의원들이 국가보안법 폐지와 신문법, 과거사법, 사학법 등 개혁입법을 처리하려 했지만 한나라당이 국회를 점거해 실패했다”는 취지의 주장을 펼쳤다. 이 이사장은 유 이사장의 이 발언은 “완전히 거짓 주장”이라며 “야당인 한나라당은 국회를 점거하지도 않았고 여야 협상은 순항했다”고 주장했다.

이어“열린우리당 의원 가운데 일부가 국가보안법 폐지를 반대하는 사실을 파악하고 중진의원들과 은밀히 상의해 한나라당과 막후협상을 진행하기로 했다”며 “열린우리당이 민주노동당과 국가보안법 폐지를 다수결로 관철할 것이라는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던 한나라당에서도 국가보안법 개정을 논의할 수 있다는 연락이 왔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2004년 12월 하순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여의도 63빌딩 회의실에서 비밀회동을 가졌고 박 대표는 국보법 폐지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얘기만 할 뿐 다른 얘기는 모른다는 태도였다”고 한 이 이사장은 “국보법을 폐지하지 않고 개정한다면 열린우리당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를 묻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틀 뒤 다시 만나 국보법 개정에 합의하고 신문법, 과거사법, 사교육법 등을 여당안 대로 개정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 이사장은 아울러 “국보법 개정안은 국보법 7조 대부분인 찬양, 고무, 동조, 회합, 통신 등 5개 독소조항을 삭제하기로 합의했고 이렇게 되면 국민의 기본권과 특히 언론 집회 사상 결사의 자유가 엄청나게 신장할 것”이라고 했다.

“국보법을 폐지하지 않는 대신 독소조항 대부분을 삭제하고 나머지 개혁 입법을 모두 얻어내는 것”이라고 설명한 이 이사장은 “이 합의안을 공식화할 필요가 있어 박 대표와 천정배 당시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김덕룡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참석하는 4자회담을 열었다”고 했다.

“당내 중진회당에도 참석했던 천 원내대표는 국보법 폐지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라고 한 이 이사장은 “두 차례 4자 회의를 열어 천 원내대표를 설득했고 이보다 앞서 노무현 대통령의 여당 내 복심으로 통하던 유시민 당시 의원을 만났다”고 했다.

“유 의원은 국보법 폐지가 아닌 개정안은 불필요하다는 의견을 갖고 있었다”고 한 이 이사장은 그 이유에 대해 “열린우리당은 상당한 기간 집권할 것이고 이번에 폐지가 아닌 개정을 받아들일 경우 국보법을 쓸 이유가 없는데 왜 악법이 필요하냐는 것이었다”고 전했다.

이 이사장은 “필자는 야당 한나라당이 개정을 받아들일 때 얻어내는 것이 도리어 국회 협상에서 지금처럼 유리한 협상 결과를 얻어내는 일은 드문 경우라고 설득했지만 (유 의원은) 완고했다”고 회상했다.

“열린우리당 의원총회에서 사회자였던 천 원내대표가 여야합의안을 원천무효라고 선언했고 일부 과격파 의원들은 당 의장인 필자를 ‘배신자’라고 손가락질했다”고 한 이 이사장은 “여야협상을 추진하도록 지지했던 3선 이상 중진의원들은 유 의원 등의 국보법 폐지파 의원들의 기세에 눌려 침묵하면서 개정안은 물거품 됐다”고 주장했다.

“통진당은 그 악법에 따라 해체당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아래 많은 사람이 그 악법의 희생양이 됐다”고 한 이 이사장은 “열린우리당은 국보법 폐지를 시도한 친북, 주사파 정당으로 낙인찍혔고 당내에선 폐지를 반대한 의원들과 폐지주장 의원들 사이 메워질 수 없는 간극이 생기면서 사실상 분당사태가 일어났다”고 했다.

“필자는 강경파들로부터 당의장 사퇴 압박을 당했다. 당시 한나라당 경력까지 들먹이며 배신자 악당으로 매도당했다”고한 이 이사장은 “국보법으로 4차례 구속당했던 필자만큼 국보법에 한 맺힌 사람도 드물었다”고 부연했다.

“여당에게 정말 유익해 추진했던 국보법 개정작업은 필자를 몰아내는 것으로 끝났고 노무현 정권도 내리막길을 걸어야 했다. 지지도가 내려가니 남북관계도 진척시킬 동력이 떨어졌다”고 한 이 이사장은 “유 의원을 비롯한 국보법 폐지론자들은 지금도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거짓 주장을 일삼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나이를 먹고 현역정치에서 물러났으면 못 본 채 지나칠 수 있으나 역사를 조작하거나 거짓 주장을 하는 것은 용서되지 않는다”며 “필자가 옹졸한가”라고 반문했다.

이날 이 이사장의 주장을 종합하면 이 이사장은 당시 국보법 폐지 대신 야당과 이를 개정하는 선에서 합의하고 개혁입법을 추진하고자 했다. 그러나 유 이사장 등 국보법 폐지파 의원들이 여야합의를 무산시킨 탓에 개혁입법이 저지됐다는 것이다.
  
이 이사장은 "국가보안법 개정 실패는 커다란 후유증을 남겼다"고도 했다. 국보법 파동 뒤 열린우리당이 국보법에 대한 견해 차이로 갈라지게 됐다는 설명이다. 그런 이유로 "지금도 유시민 의원을 비롯한 국가보안법 폐지론자들은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지 않고 거짓주장을 일삼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동아일보 기자 출신이 이 이사장은 1974년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해 유신에 맞서 자유언론실천선언문을 발표했다가 이듬해 해직됐다. 이후 긴급조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돼 징역 9년을 선고받았고 1988년 광주학살 진상규명 투쟁위원회를 조직해 전두환의 구속 수사를 요구하다 다시 검거돼 복역했다. 1989년 김근태, 이재오, 장기표 등과 함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을 조직해 상임의장이 됐지만 문익환이 방북한 것으로 인해 다시 체포돼 복역했다.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한 이기택, 노무현 등이 창당한 민주당에 입당해 정계에 입문한 이 이사장은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민주당 공천으로 서울 강동구 갑에 출마해 당선됐다. 1996년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 창당했지만 그는 끝까지 민주당에 남아 제15대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한 뒤 16대 총선에서까지 내리 당선됐다.

1997년 11월 민주당과 신학국당의 합당으로 한나라당이 창당되자 합류해 원내총무와 부총재까지 지냈지만 한나라당 내 보수 성향 의원들과 갈등을 빚으면서 2003년 김부겸 전 의원과 함께 탈당했다. 이후 연거푸 낙선한 이 이사장은 2007년 뇌물사건에 연루돼 구속되기도 했다.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으로 위촉된 후 2015년 2월 73세의 나이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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