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일 오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 대통령묘역에서 열린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1주기 공식 추도식에서 노 전 대통령의 생전의 모습이 대형스크린 그려지고 있다.
[김민호 기자]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1주기 추도식이 23일 오전 경남 김해 봉하마을 대통령 묘역에서 엄수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속 최소 인원으로 치러진 '작은 추도식'이었지만 많은 이들이 노무현의 그려 논 '큰 집' 아래 모였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감사 인사를 통해 당신이 그토록 원하던 낮은 사람, 겸손한 권력, 강한 나라가 아주 가까운 현실이 돼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며 "우리 사회의 민주시민으로 곧게 자라서 이제 청년이, 어른이 돼있는 박석 속 이름의 주인공인 아이들이 나라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유 이사장은 "생전의 노 전 대통령은 바다로 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강물같은 분이었다"며 "지금 그분은 어떤 강물도 마다하지 않는 바다가 됐다"면서 고인을 기렸다.

이어 "우리 모두가 생각과 이념과 삶의 양식은 다를지라도 이 대한민국이란 바다에서 하나로 얽혀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그런 내일이 오길 기대해본다"며 "부디 건강한 모습으로 내년 이 자리에서 또 만나뵐 수 있길 기대한다"고 했다.

과연 노무현이 그린 '큰 집'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가 말하는 '우리집 교훈'은 무엇일까

다음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기 전 1998년 9월 월간 '좋은 생각'이라는 잡지에 기고한 글이다.

우리집 교훈

어느 날 아들이 대뜸 나에게 "우리집의 가훈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가훈이라고 정해 놓은 것이 없어 나는 무심코 그냥 없다고 대답했다. 아들 녀석이 실망할 지 모르겠지만 없는 것을 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문득 집에 가훈이 있냐던 아들의 질문을 떠올리고는 생각했다. 과연 우리집에는 가훈이 없는가. 그러자 아득히 먼 옛날 어릴 적 기억이 되살아났다.

경상남도 깊은 산골,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나는 머리 좋고 공부 잘 한다는 예기를 들었지만 그만큼 말썽도 많이 피웠다. 한 번은 중학생이던 자유당 시절, '우리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제목으로 글짓기를 하라는데 삐딱하게 썼다가 교무실로 끌려가 혼난 적도 있었다. 그렇게 말썽 피우는 아들 때문에 잠시도 마음 편할 날 없었던 어머니는 나에게 언제나 이런 말씀을 하셨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단다." "달걀로 바위 치기지." "물 흐르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살아야 하느니라."

돈 없고 힘없는 백성이 살아가려면 그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어머니의 말씀은 오랜 인생 역정에서 몸으로 터득한 교훈으로, 그것이 바로 우리집의 가훈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렇게 살지 못했다.

흔히들 역사는 발전한다고 말한다. 그럼 역사는 어떻게 발전하는가. 나는 역사가 모난 돌들에 의해서 발전하고 달걀로 바위를 치는 사람들에 의해서 발전한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끊임없이 달걀로 바위를 치면 언젠가는 바위도 깨진다. 마치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듯이... 지금도 1990년 3당 야합 때 내가 따라가지 않은 것을 '달걀로 바위 치기'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지역 감정의 골을 메우기 위해서 노력하는 나의 행동 역시 소용없다고 말한다.

얼렁뚱땅 쉽게 타협하지 않는 나는 '정을 맞는 모난 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정을 맞지 않기 위해 모나지 않게 살아온 사람들, 달걀로 바위치기를 거부한 사람들에 의해 이 세상은 얼마나 변모했는가. 나는 4·19혁명과 군사독재의 종말을 가져온 6월 항쟁이 달걀로 바위를 치는 신념에 찬 사람들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역사의 발전 뒤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따른다. 그 희생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씨앗이 된다.

어릴 적 어머님이 늘 나에게 하시던 당부의 말씀, 나는 아무래도 그 말씀을 가훈으로 삼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나는 앞으로도 달걀로 바위를 쳐야 하고, 내 자식들도 그래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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