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승국 법무법인 로고스 변호사
버나드 쇼가 어느 만찬 석상에서 데생 하나를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쇼는 로댕의 작품이라며 데생이 – 아마 조각하려는 대상인듯 – 멋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쇼의 물음에 처음에 조용하다가 하나, 둘 비평의 소리를 쏟아낸다.

‘구도가 왜 그 모양이냐’, ‘그것도 데생이라고 한 것이냐’ 등등. 사람들의 혹독한 비평이 끝나 갈 무렵 버나드 쇼는 갑자기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아! 실수를 하였네요. 로댕의 것을 갖고 나온다는 것이 미켈란젤로의 것을 잘못 갖고 나왔네요.’ 그러자 그렇게 혹독한 비평을 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사람들의 편견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버나드 쇼가 기획한 만찬의 일화라고 한다.

버나드 쇼는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로댕의 작품은 굉장히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찬에 초대하여 이런 상황을 연출한 것이다.

아마 당시까지 사람을 이상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하는 조각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에게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조각하는 로댕의 작품에 심한 거부감을 가졌던 모양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로댕의 데생이라고 하자, 데생을 자세히 볼 것도 없이 형편없구나 하고 생각한 것이다. 편견이란 이렇듯 사물을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인식의 틀로 재단하고 왜곡하여 본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본다고 할 때 우리는 사물을 그 자체로 그대로 보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사물을 우리가 학습한 그 사물에 대한 관념의 틀에 먼저 맞추어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물을 볼 때에 눈이라는 창문 이외에 이런 관념이라는 창문을 하나 더 거쳐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서는 이런 관념의 창문이 유연하여 사물이 관념의 창과 잘 안 맞으면 관념의 창을 사물에 맞게 고쳐서 보려고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관념의 창은 덜 손보고 사물을 관념의 창에 맞춰버린다. 관념의 창이 공고해진 것이 고정관념이리라.

그리고 관념의 창이 사물과 잘 맞지 않음에도 기존 관념의 창을 계속 고수한다면 이는 편견이라는 창으로 고착되는 것이다.

무릇 깨달음을 얻지 못한 보통의 사람들은 관념의 틀을 통하여 사물을 볼 수밖에 없기에 작던 크던 어느 정도 사물을 왜곡하여 보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끊임없는 자기 수양으로 이런 관념의 틀을 유연하게 해야 하는데, 오늘날 관념의 틀이 고착화된 편견의 창을 가진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보게 된다. 편견을 가진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회는 불행해진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정치가가 앞서서 이런 편견을 조장하고,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도해야 할 언론이 오히려 편견으로 사람들을 오도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그리고 가장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판단해야 할 법관조차 편견의 창을 통하여 판결하는 경우가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울 때도 있다. 우리 모두 자신을 돌아보자. 나의 관념의 틀이 어느 덧 편견의 창으로 고착된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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