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경우 전 의원의 자유선진당 입당
 13대 국회는 우리 정치사에서 하나의 ‘이변’이다 긍정적인 측면으로든 부정적인 측면으로든 ‘연구대항’임이 분명하며, 이로부터 시사하는 바 또한 엄청나다.

잘 알다시피 13대 국회는 우리 헌정 사상 초유의 여소야대 국회였으며, 또 ‘삼당합당’이라는 유례없는 크나큰 회오리바람을 몰고 왔다. 그리고 ‘호랑이를 잡으러 굴에 둘어간다’는 김영삼 씨는 결국 당시까지만 해도 수수에 그쳤던 50여 명의 계파를 이끌고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 4년여의 숨가쁜 변화는 과연 무엇을 남겼는가? 나는 지금도 그것을 정확히 말할 수 없다. 다만 그 한가운데서 변화의 파도를 온몸으로 헤쳐가야만 했던 나의 경험들을 기록해 놓을 뿐이다.

황금분할의 서막

일 년여 동안 안산에서 열심히 뛴 결과 나의 민정당 공천은 어렵지 않게 이루어졌고 나는 13대 국회의원에 당당히 당선되었다. 나머지 세 명의 후보들의 표를 전부 합산해도 내 표를 따라오지 못할 정도의 압도적인 지지였다. 이런 압도적인 지지는 이 후 내 의정활동에 상당한 자신감과 재산이 되어주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나의 그런 압도적인 지지에도 불구하고 전체 민정당은 13대 선거에서 참패를 했다. 겨우 120여 석이 당선되었으니 과반수에도 훨씬 못 미치는 숫자였다. 이른바 여소야대 국회가 탄생된 것이다.

사실 선거 전까지만 해도 민정당에서는 ‘너무 많이 될까봐 걱정’이라는 말ㅇ 농담반 진담반으로 떠돌았다 한다. 87년 대선을 통해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의 인기가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이런 여소야대 국회를 두고 당시 김재순 국회의장은 ‘황금분할’이라고 했다. 그러나 뒷날 생각해보면 그 황금분할은 다가올 태풍의 서곡이었다고나 할까? 어떻든 정국은 그로부터 숨가쁘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한편 당에는 고참의원과 초선의원들이 대부분이었고, 재선이나 3선의원이 드물다 보니 일을 할 수 있는 젊은 의원들은 손에 꼽을 정도로 뻔했다. 결국 선거를 마치자마자 나는 중앙당의 ‘의사담당 부총무’로 지명 받아 정창화. 김진재, 신경식, 함종한, 박희태 의원 등과 함께 최초의 여소야대 부총무로의 일정이 시작되었다.

말은 여소야대다, 황금분할이다. 민주주의의 승리다 했지만 사실 모든 정치인이 여소야대 국회의 경험이 없다보니 국회의장 선출부터 시작해 사소한 마찰이 끊이질 않았다. 출발부터 잠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던 것이다.

각 당의 총무단 역시 막강했다. 민정당의 김윤환, 평민당의 김원기, 민주당의 최형우, 공화당의 김용채, 이렇게 구성되었으니 이 네 총무간의 신경전만으로도 만만치가 않았다.

맨 먼저 부딪힌 장벽은 상임위원회 구성이었다. 국회 상임위원장 16석 중 6개석을 야당에 할애하는 관행도 이때부터 생겨났는데, 그 전까지만 해도 의원수대로 하다 보니 여당이 상임위원장직을 다 맡아오던 터였다.

그런데 의원수가 야당보다 적다보니 이때부터 생겨났는데, 그 전까지만 해도 의원수대로 하다 보니 여당이 상임위원장직을 다 맡아오던 터였다. 그런데 의원수가 야당보다 적다보니 이때부터 10:6이라는 할애가 생겨난 것이다.

그런 저런 일로 결국 한 두달 늦게 국회가 개원되었다. 바야흐로 초유의 여소야대 국회가 출범한 것이다.

‘있어서’의 있고 '없고'의 차이

국회가 열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마치 봇물 터지듯 한꺼번에 모든 문제가 국회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5공화국 출범부터 시작해 8년 동안의 일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기 시작하는데 정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5.18의 진상문제, 5.18의 명칭문제, 삼청교육대 문제, 해직자들의 복직문제, 언론통폐합문제, 그리고 그 무성한 소문 속의 5공화국 집권기간 동안의 비리문제...국회는 각 문제들의 진상조사를 위한 위원회를 만들자는 데에 합의를 했다.

맨 먼저 쉽게 합의된 것은 지역감정 해소 특별위원회였다. 이거야 우리 정치의 고질적인 병폐이고 단 시일 내에 해결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등한시 할 수만은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 합의된 것은 <광주사건 조사 특별위원회>였다. 이 역시 비교적 쉽게 합의가 되었다. 그 진상이야 어떻든 ‘광주 사건’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평민당의 문동환 의원으로 위원장을 하는 것에도 큰 문제가 없었다.

정작 제일 큰 문제는 <5공화국에 있어서의 비리조사 특별위원회>였다. 이 긴 명칭이 나오기까지의 진통을 정말 대단했다. 야당 측에서는 <5공비리 조사 특위>라는 명칭을 고집했다. 그런데 여당 의원들은 ‘그러면 5공은 다 비리냐?’며 맞섰다.

결국 5공화국의 비리만 조사한다는 뜻에서 그 긴 이름 <5공화국에 있어서의 비리조사 특별위원회>라는 명칭이 결정되었다. 정작 나중에는 이름이 워낙 길다보니 <5공비리 특위>가 되고 말았지만 아무튼 공식 명칭은 여전히 ‘있어서의’가 포함되어 있다.

‘있어서의’라는 말 하나 때문에 그렇게 긴 시간을 보내야만 했으니 당시 여소야대 정국의 신경전을 짐작할 수 있다.

동시에 <국정조사권>도 부활되었다. 유신 때 소멸된 국정조사권이 여소야대 정국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리고 그 조사활동의 하나로 도입되었던 이른바 <청문회>라는 게 일대 선풍을 불러오기에 이른다.

증인은 이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 해에는 또 88올림픽이 있었다. 전 세계가 주목하는 이 행사를 앞두고 국회에서는 국민화합 차원에서 잠시 국정조사권 발동을 미루자는 데에 합의했다. 결국 각 위원회는 내부 조사 작업만 진행하면서 그 해 여름을 보냈다.

마침내 올림픽이 끝났다. 그런데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언제 축제가 있었느냐 싶게 바로 10월부터 특위 활동이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고 이른바 <청문회>가 시작되었다. 몇날 며칠 하루도 빠지지 않고 모든 국민이 TV앞을 떠나지 못했던 바로 그 청문회였다. 국민들은 청문회를 보면서 새삼 여소야대의 힘을 실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내부에서 그 청문회를 준비해야만 했던 의원들은 총 비상이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부총무였던 나에겐 모든 특별위원회의 활동을 총괄해서 종합 보고해야 할 의무가 주어졌다. 모든 특위 활동은 지켜보고 그게 여의치 않으면 녹화 테잎을 모니터하면서 당 차원의 대책을 마련해 내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나는 <5공비리 특위>에 소속되었다. 여기에는 노무현 위원, 김동주 의원 등이 있었는데, 또 하필 여기에서 내가 민정당의 간사로 지명됐다. 부청무로서 일하랴, 특위 간사 하랴, 정말 눈 코 뜰새 없이 바쁜 나날이 몇 달 동안 지속되었다.

당시 5공비리 특위의 위원장이 바로 이기택 씨였다. 재미있는 것은 ‘자주 보면 정든다’는 식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위원장과 간사들간의 회의가 있다 보니 여야간의 긴장감이 감돌면서도 어떻든 나는 이기택 씨와도 상당히 가까워지게 되었는데, 훗날 내가 이기택 씨와 맺게 될 인연을 이때에는 감히 상상인들 했었으랴!

청문회를 시작하기 전 민정당 소속 위원들은 각종 사건 내용의 진상을 밝히는 데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특히 일해재단 문제와 관련해서는 장세동, 안현태씨 등을 초청(?)하여 우리 당만 청문회를 하는 일도 있었다. 당시 김인영 의원이 장세동 씨에게 소신껏 질문하던 것이 기억난다.

아무튼 청문회가 연일 화제를 불러 모으며 정국을 뒤흔들고 있는데, 여당의원으로 이 청문회 정국을 뜷고 지나간다는 것은 야당ㅇ 의원에 비해 배가 힘든 일이었다.

여당이다 보니 청와대와 집권 권력층에 관련된 문제가 나오면 일정하게 이것을 피해가도록 해 달라는 말 못랄 주문도 다양하게 들어왔다.

그러나 야당 의원들이 어디 그렇게 만만한 사람들인가. 뭔가 무마를 시키려 해도 ‘진짜’가 문 줄을 알아야 할 수 있는 것일텐데...정작 문제는 여당 의원이 이 ‘진짜’를 알아내기에 무척 힘이 들었다는 것이다.

일단 여당은 ‘정보’에 뒤질 수밖에 없었다. 광주문제건 5공비리 문제건 간에 피해자들은 정보를 결코 여당에 주지 않는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여당하면 ‘진실을 파헤치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뭔가 자꾸만 덮어두려고 하는 사람들이다’는 인식이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여당 의원들은 청문회 때마다 ‘당하기’일쑤였다. ‘도대체 저런 것들을 어디서 다 알아낸 걸까?’ 싶게 생전 들어보지도 본 적도 없는 자료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조금 잠잠해졌다. 싶으면 느닷없이 ‘증인은 이게 보이지 않습니까?’라고 호통치면서 불쑥불쑥 내밀어지는 자료들에는 정말 속수무책이었다.

여당 의원들 사이에는 ‘또 뭐야?’가 거의 일상어가 되다시피 했고 그 때마다 여당 의원들이 푸념처럼 하는 말이 있었다.

“이번에는 땅에서 솟은 거야? 하늘에서 떨어진 거야?”

그러다보니 청문회를 임하는 여야 의원들은 치열한 첩보전을 방불케 했다.

무슨 정보가 하나 들어왔다 하면 이것을 보좌관들에게 맡기지도 못한 채 직접 의원들이 싸안고 밤새 검토하고 토론하고, 막상 청문회에 나가보면 또 생각지도 않았던 새로운 정보가 터져나오고...

하여튼 나를 포함해 모든 의원들이 그 때만큼 밥 먹듯이 밤 새워가며 열심히 공부해 본적도 없을 것이다. 공부해서 나쁠건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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