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일보 대기자] “태초의 장미는 이름으로 아직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이름뿐(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
 
이탈리아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가 1980년에 쓴 소설 <장미의 이름> 마지막에 나오는 귀절이다. 
 
소설 ‘장미의 이름’은 서양의 중세가 저물기 시작하던 14세기 초 한 수도원에서 일어난 연쇄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
 
살인범은 요르게라는 나이 많은 수도사였다. 그는 수십년 전 이 수도원의 거대한 서고에서 한 권의 책을 발견했고, 그 책은 아무도 읽어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연쇄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동료 수도사들이 우연히 그 책의 존재를 알게 되자 요르게는 그 책의 페이지마다 독을 바른다. 수도사들이 몰래 서고에 숨어들어 이 책을 읽을 때, 손에 침을 발라 책장을 하나씩 넘기는 동안 독이 그들의 혀를 통해 서서히 심장에 침투해 죽게 만들었다.
 
그런데 요르게가 그토록 숨기려 했던 책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1권은 ‘비극’을 다루고 있지만 제2권은 ‘코미디’를 다루고 있다.
 
코미디(comedy)가 무엇인가? 보통 사람들의 모자라는 면이나 악덕을 과장해 보여줌으로써 우스꽝스러운 효과를 연출’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 제2권에서 코미디의 웃음 효과가 교훈적 가치를 가지며, 따라서 비극과 마찬가지로 진리에 이를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요르게는 도저히 이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에게 진리란 오직 고행(苦行)과 수도(修道)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가 얼마나 진리에 이르기 위해 평생 동안 수도원에서 고행의 삶을 살았단 말인가! 그런데 한갓 천박한 시골내기들의 여흥과 같은 코미디가 진리에 이르는 방법이라고? 그건 가당치도 않은 말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궤변’이 다른 사람도 아닌, 중세인들에게 최고의 학문적 권위를 인정 받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 책은 더더욱 아무도 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요르게는 자신을 하나님의 정의로운 오른팔이요 진리의 수호자로 확신했다. 그래서 자기의 권력이 닿을 수 있는 영역 안에서, 즉 자신만이 알고 있는 거대한 서고의 밀실에서 그 책에 접근하는 동료 수도사들을 하나씩 독살했던 것이다.
 
범행의 전모는 윌리엄이라는 수도사에 의해 밝혀졌다. 연쇄살인의 모든 것을 다 밝힌 후에 윌리엄 수도사는 진리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요르게를 향해 소리쳤다.
 
“요르게, 악마는 물질로 돼 있는 어떤 것이 아니야. 악마는 영혼의 교만, 미소를 모르는 신앙, 그리고 의혹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믿는 진리, 바로 그것이 악마야!”
 
오늘 한 언론의 칼럼을 읽다가 소설 ‘장미의 이름’을 떠 올랐다.
 
지난 4년, 정부가 쏟아낸 부동산 뉴스를 믿고 내 집 마련 계획을 세웠던 국민 대부분은 낭패를 봤고 ‘벼락 거지’가 속출했다. 대통령은 지난해 신년 회견에서 “급격한 부동산 상승은 원상 회복 돼야 한다”고 했다. 몇 달 전에는 “부동산만큼은 자신 있다”고 했었다. 또 문 대통령은 백신과 관련해 “긴 터널 끝이 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터널 끝이 어딘지 문 대통령 조차 알까 싶다.
 
작금의 정치판은 그 눂은 곳을 차지하기 위해 이전투구 속에 있다  "내가 경험한 하나님 만이, 내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방법 만이 옳다"며...
 
진리를 말할 때 가장 무서운 것은 독선(獨善)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  장미의 이름으로 외치는 그들의 독선에 또 다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의 국민이 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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