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한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이 18일 수도 카불에서 M16 소총 등 미제 무기를 들고 서 있다. (사진=AP 갈무리)
[정재원 기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16일(현지시간) '제국의 무덤'인 아프간에서의 철군은 옳은 결정이었다며, 미군 철수 결정을 재차 옹호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내 결정이 비판받을 것을 안다"면서도 "이 결정을 다음 대통령에게 전가하기보다는 모든 비난을 내가 떠안겠다"고 말했다. 
 
'아프간 전쟁'의 패배를 시인하는 첫 발언이었다. 동시에 미국 역사상 최장기간 이어진 전쟁에 대한 미국의 피로도가 극에 달했고, 아프간 상황을 오판한 동시에 아프간 군과 친미정부를 과신한 것에 대한 후회였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바이든의 이날 성명은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철군이 시작되고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이 아프간 주요 도시를 점령한 데 이어 6일 만에 수도 카불을 장악한 후였다.
 
지난 18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내놓은 분석에 따르면 탈레반이 "서방 연합군의 실수를 반면교사로 삼았다"라며 "서방 군의 인권 침해에 따른 국민의 분노를 이용했으며 아프간 정부의 부정부패를 적극적으로 공략한 것이 바로 그것"이라고 전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탈레반은 어떻게 10일만에 카불을 장악했고 정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을까
 
18일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탈레반의 ‘협박 전술’이 미국도 예측하지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아프간을 장악한 주요 비결이었다고 분석했다.
 
발단은 지난 4월 미국의 아프간 주둔 미군의 철수 발표였다.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유지돼 온 아프간 정부군 내부에서 분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NYT는 “미국의 철군 발표 이후 수세에 몰린 아프간 정부군의 사기는 저하됐고, 탈레반은 더 대담해졌다”고 평가했다.
 
이후 탈레반은 정부군에 대해 대대적인 회유 작전을 펼쳤다고 했다.
 
▲ 탈레반 전사들이 15일(현지시간)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 시에서 순찰하고 있다.
23일 CNN, BBC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탈레반의 승리 배경 중 한 요인으로 "탈레반 측이 반정부 여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다"고 지적했다.
 
지난 몇 년 간 아프간 정부의 부정부패가 심각해지면서 정부 관료가 조직범죄에 가담하고 직접 마약을 밀수하는 행위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정부의 이러한 부패 이미지가 오히려 탈레반에 상대적으로 청렴한 이미지를 가져다줬으며 아프간 정부에 실망한 국민들이 대거 탈레반에 합류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카불대의 무함마드 잘란드 정치학 교수는 "탈레반은 인내심을 발휘했다. 이들은 정부에 대한 국민의 반발을 어떻게 이용할지 잘 알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특히 탈레반이 평소에 중앙정부에 불만이 컸던 정부군 병력을 회유해 이들을 포섭한 것도 탈레반 전력 강화에 이바지했다.
 
그동안 아프간 정부군 병사들은 중앙정부의 재정 부채로 인해 급여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탈레반은 이를 이용해 정부군 병사들에게 150달러를 제시하며 탈레반에 합류할 것을 회유해왔다. 150달러는 정부군 병사들의 평균 월급에 달하는 수준이다.
 
탈레반은 지역 군벌과 밀실 합의를 하며 중앙정부의 의사와 무관하게 이들의 항복을 끌어내기도 했다.
 
이 밖에도 탈레반은 이미 점령한 지역을 대상으로 `그림자 정부`를 세워 세금 부과, 공공 서비스 제공, 병력 모집 등 향후 국가 정부 구성을 위한 준비 작업을 착실히 수행해왔다는 것이 탈레반 승리에 기여한 또 다른 요인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탈레반이 그림자 정부가 발달함에 따라 점령 지역을 대상으로 주민들의 접근성을 높인 정부 거버넌스 체계를 구축한 것이 대표적 사례"라고 했다.
 
이어 "과거 90년대 탈레반 정권 당시와 유사하게 이슬람 율법을 기반으로 한 사법 체계를 구축해 시행했는데 이것이 정부의 사법 체계보다 더 원활하게 작동하면서 치안이 제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고 전했다. 
 
특히 탈레반 점령 지역은 정부군과의 전투가 사실상 전무해 상대적으로 안전한 지역이었다. 이에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그림자 정부의 교육 서비스가 원활하게 제공됐지만, 정부군 점령 지역은 탈레반과의 전투가 수시로 진행되면서 기초적인 교육 서비스도 제공하지 못할 만큼 치안이 불안정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22일 아시아경제 보도에 따르면 과거와 달리 탈레반 측이 국제 사회와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도 중요한 요인이라고 전문가들의 발언을 인용해 전했다. 탈레반은 국제 사회와의 관계 설정에서 연계 조직 하카니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하카니 네트워크는 1990년대 후반 아프간을 장악한 탈레반과 손을 잡은 조직이다. 탈레반은 20여 년 전 파키스탄에 의존하며 지원을 받았지만, 지금은 하카니 네트워크를 이용해 이란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에도 접근하며 이들 국가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 결과 현재 아프간을 장악한 탈레반은 중국으로부터 합법 정부로 공식 인정받을 수 있었으며 러시아 측은 카불 대사관을 계속 운영하겠다는 방침을 내놨다. 이란 역시 탈레반의 손을 들어주며 아프간 정부 실패 배경에 미국이 있다며 반미 여론전에 나선 것도 탈레반의 승리 원동력이 됐다.
 
▲ 한 남성이 18일(현지시간) 아프가니스탄 잘라라바드에서 아프간 국기를 들고 있다. 이들은 탈레반의 상징인 흰 깃발을 내리고 국기로 교체하는 시위를 벌이다 탈레반의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아프간 국민들과 국제 사회는 탈레반의 반인륜적 통치 행위가 앞으로도 지속될지 우려하고 있다. 시민들은 과거 90년대 말 탈레반 정권이 일삼아왔던 가혹한 통치 정책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WSJ는 전했다.
 
WSJ는 "탈레반이 아프간 국가 전체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지지를 꾸준히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 될 것"이라며 "반란을 억제하기 위해 반대파와도 통합하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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