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시다 일본 자민당 총리
[정재원 기자] 29일 오후 치러진 일본 자민당 총리 결선 투표 결과 키시다 전 정무회장이 257표를 얻어, 고노 규제 개혁 담당 대신이 170표에 그친 고노 다로 행정개혁·규제개혁상을 누르고 새로운 총리에 선출됐다. 일본 집권 여당인 자민당 제100대 총리대신 등극한 기시다 후미오 신임 총재는 당내 온건 보수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안정감이 있지만 밋밋하다.’
 
이날 일본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승리하며 일본의 제100대 총리 자리를 예약한 기시다 후미오(64) 전 당 정무조사회장에 대한 언론의 평가다. 
 
이날 복수의 언론에 따르면 기시다는 3세 정치인으로 ‘엘리트 코스’를 걸어 온 인물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중의원 의원을 지냈다. 그의 정치 입문은 세습 정치가 강한 일본에서 여느 정치인들과 같았다. 아버지의 미국 근무 때문에 초등학교 1학년부터 3학년 때까지 뉴욕의 공립학교에 다녔다. 기시다는 이 시절 겪은 인종차별이 자신이 정치인이 된 원점이었다고 말한다.
 
1982년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한 그는 일본장기신용은행에 입사했지만 1987년 아버지인 기시다 후미타케 중의원의 비서로 정계에 발을 들였다. 
 
아버지의 밑에서 묵묵히 정치를 배운 그가 일본 정치의 중심인 나가타초(한국에서는 여의도)에 본격적으로 진출한 것은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지역구인 히로시마 1구를 물려받아 1993년 치러진 중의원 총선거에서 당선되면서부터다. 이후 한 번도 낙선되는 일 없이 내리 당선된 그는 현재 9선이다.
 
그는 중의원 당선 이후 외무상, 방위상 등을 잇따라 역임하며 내각에서 탄탄대로의 길을 걸어왔다.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에서 문부과학성 부대신(차관)에 임명되며 내각 업무를 처음으로 경험했다. 이후 2007년 아베 신조 1차 내각에서 내각부 특명대신(장관)에 임명된 뒤 소비자 행정 추진 담당상, 우주 개발 담당상 등을 거쳤다.
 
그가 역량을 드러낸 건 2012년 아베 신조 내각에서 외무상을 맡으면서부터다. 2017년까지 5년 동안 외무상을 맡으면서 패전 이후 두 번째로 임기가 길었던 외무상으로 이름을 올렸다. 특히 기시다 신임 총재의 이름이 한국에까지 널리 알려지게 된 건 2015년 한일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이끌어내면서다.
 
당내에서도 그의 입지는 탄탄했다. 당내 최고 실력자인 아베 전 총리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던 그는 내각에서도 주요 장관을 맡은 데 이어 외무상에서 물러난 뒤 당내 4대 요직 중 하나인 정무조사회장에 임명됐다. 또 당내 주요 파벌인 ‘기시다파’(46명)의 수장으로서 존재감을 잃지 않는 것도 그의 최대 자산이다.
 
그는 아베 전 총리가 지난해 9월 지병으로 갑작스럽게 사임하자 약 30년 정치인생에 처음으로 총재 선거에 출마하게 된다. 아베 전 총리와 니카이 도시히로 간사장 등이 이미 스가 요시히데 당시 관방장관을 지지하기로 한 상황에서 그의 패배는 예상된 일이었다.
 
절치부심 끝에 그는 이번 총재 선거에 가장 먼저 출마 선언하며 적극적으로 선거를 준비했다. 대중 지지도가 높은 고노 다로 행정개혁담당상에 뒤진다는 평가도 받았지만 결국 반(反) 고노 전선의 지지를 받아 두 번째 도전으로 끝에 자민당 총재 나아가 총리의 꿈을 이루게 됐다.
 
한편 이날 기시다의 승리가 결국 일본의 고질적인 '파벌 정치'의 한계로 해석되며 여전히 아베 전 총리의 입김이 강하다는 반증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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