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속인 심진송
지금으로부터 딱 20년 전이다.

1994년, 갑술년 그 해는 점술이 유난히 화제를 모았다. 이유는 어느 한 무속인이 ‘김일성이 죽는다’는 예언이 정확히 맞아떨어지면서 무속계에 한바탕 회오리가 일었다.

이른바 ‘용하다’고 명성이 자자했던 왕년의 ‘대가’들이 조용히 지냈던 반면. 김일성 사망 직후 매스컴을 탔던 몇몇 ‘적중파’들이 새로운 ‘스타’로 급부상했던 것이다.

경기도 시흥에서 ‘도광사’라는 점집을 하고 있는 여류 무속인 심진송(44)은 김일성 사후에 각광 받았던 ‘적중파’ 중에서도 신문과 TV에 가장 많이 등장했던 대표주자였다.

그 이유는 심진송이 김일성 사망시간을 가장 근접하게 맞혔는데다가, 무속연구가인 서정범교수가 추천했으며, 언론에서 정통 뉴스로 다뤘다는 점들이 ‘품질 보증서’처럼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일성 사망을 예언했던 이야긴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 신문과 방송에 내 이름이 나간 뒤 어찌나 사람들이 몰려 오는지, 당시 몇 달 동안은 하루 3~4시간 밖에 자지 못했다.”고 회고할 정도로 심진송씨는 ‘인기가도’를 달리는 무속인으로 떠 오르고 있었다.

꿈에 송아지만한 검정개가 나타나

그녀가 ‘심진송’이란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의외로 평범했다.

“김일성 사망을 예언한 기사가 나간 다음 한동안 나는 그 문제를 잊고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 음력 5월 그믐날 기도를 갔었는데, 꿈에 송아지만한 검정개가 나타나더군요. 다음 날 (음력 6월1일) 자고 나서도 어느 유명한 사람이 죽는가보다고 생각했지요.”

“그 날 낮 12시쯤 신당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데 누가 전화를 걸어와 내가 예언했던 대로 김일성이 죽었다는 긴급 뉴스가 방송됐다고 알려주더군요.”

“밤새 안녕‘하듯이 급사한 김일성의 운명을 정확히 맞힌 것은 엄밀히 말해서 내가 아니라 우리 ’사명대사‘할아버지예요. 나는 그 분의 말씀을 전해줬을 뿐이에요.

그녀는 당시 김일성 사망 일(日), 시(時)를 정확히 예언한 것이었다

이후 심진송씨는 무속인의 ‘대명사 격으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그녀의 한마디에 세간의 ’귀‘가 모아지게 됐다.

'신이 선택한 여자'란 평과 함께 대학 강단에서 무속 강의를 했던 무속인, 신당(神堂)에다 사명대사를 모셔놓고, 그 신령의 영험한 신통력으로 점을 친다는 심진송.

과연 그녀는 누구이며, 그녀의 무속세계는 어떤 것인가.

<시사플러스>에서 토속 신앙에서 뿌리를 내린 심진송의 신령세계 탐험에 앞서 그녀가 어째서 무속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신내림을 받게 된 운명적인 삶의 궤적부터 더듬어 보기로 하였다.

▲ 지금으로부터 딱 20년 전, 심진송씨는 김일성의 사망 일,시를 맞춘 무속인으로 세간에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 사진은 北 김일성 서거 20돐, 중앙추모대회> 모습
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한 평범한 주부

심진송이 살아왔던 예순 다섯 해는 여느 주말 연속극보다 더 흥미진진했으며,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막힌 일들도 몇 차례나 일어났다.

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했던 심진송은 한동안 평범한 주부로 지내 오다가 45년 전에 신(神)이 내려 무속의 길로 접어든 무당이다. 심진송은 여러 무속 유형 중에서도 장군신(將軍神)을 주신(主神)으로 모시는 계열에 속한다.

그녀는 지금까지 사명대사의 혼령으로부터 계시를 받아왔다는데, 1994년 음력 8월에 접어들면서 광개토대왕과 세종대왕 왕비였던 심씨 부인을 더 모시게 됐다고 설명했다.

“25년 전 ‘신딸’이 되면서 사명대사 할아버지를 모셔왔지만, 실제 그 분과의 영적인 인연과 무속의 뿌리는 제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라고 말문을 열었다.

◇다섯 살 때, 처음으로 ‘신기’가 발동?

1950년 음력 정월, 평안도 진남포에서 7남매의 막내딸로 태어났던 심진송은 그 이듬해 졸지에 집안의 ‘무남독녀’가 되고 말았다. 6 • 25 난리통에 위로 6남매를 한꺼번에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삭풍이 몰아치던 1ㆍ4후퇴 때 피란 행열에 떠밀려 부산까지 내려갔던 그녀의 가족은 두고 온 고향에 가까운 인천으로 거처를 옮겨 생활의 터전을 마련했다.

“인천에서 몇 년 동안 ‘운수업’을 하면서 부모님은 크게 재산을 모았으나, 사업에 실패하는 바람에 영종도로 들어가 과수원을 가꾸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내 나이 다섯 살 때였는데, 처음으로 ‘신기’가 발동했다는 겁니다.”

어느 날 어린 심진송은 인천으로 나들이 간 어머니를 마중 나가다 해안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마침 그쪽을 지나치던 동네 사람이 발견 해 집으로 옮긴 다음 왕진한 의사의 진찰을 받았으나, 심진송은 가망이 없는 상태였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자 대책없는 의사는 그대로 돌아갔고, 심진송의 몸은 싸늘하게 식어갔다.

전쟁통에 6남매를 잃은데 이어 하나 남은 딸마저도 의식을 잃자 그녀의 어머니는 넋을 잃고 대성통곡을 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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