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경우 전의원
증인님과 증인들

사실 국민들의 관심은 <광주 특위>에 더 쏠렸을지 몰라도 정작 더 치열하고 더 파문을 일으킨 것은 <5공비리 특위>였다. 광주 특위의 경우는 단일 사건인 반면, 비리 특위의 사건은 그 숫자를 다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였다.

예를 들면 명성사건, 청남대 사건, 장영자 사건, 일해재단 문제, 이순자 씨가 하던 심장재단 문제, 한화 에너지 문제, 선경이 유공을 인수한 배경 조사, 국제 해체 사건. 등등 여기에 또 연루된 사람은 누구인지, 과연 그 폭은 어디까지인지, 개입했다면 그 개입 정도는 어디까지인지...하여튼 그 동안 각종 잡지 등지에서 ‘소문’으로 떠돌던 모든 사건이 다 ‘조사대상’으로 올라왔다.

처음에 각 당이 하자는 것을 다 합쳐보니까 무려 70여 건에 달했다. 이것을 조종하고 또 조종해서 34건으로 압축을 했고, 나중에는 다시 20여 건으로 축소되었다가, 결국 마무리진 건 10여 건에 불과했다. 그만큼 방대했고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할지 참으로 막막하기는 여야 의원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불러야 할 증인도 처음에는 모두 올려놓고 보니 3백여 명에 달했다. 다 불러 제대로 물어보자면 4년 국회기간 내에도 불가능할 숫자였다. 증인 역시 줄이고 줄여 결국은 100여 명으로 압축을 했다. 정주영 씨부터 시작해 전두환 씨까지, 그 때 우리가 올렸던 증인들의 면면을 보자면 대한민국에서 좀 ‘난다 긴다’하는 알 만한 사람들은 거의 다 올라와 있는 형편이었다.

결국 조사 범위가 너무 방대하다보니 다시 그 안에서 4개 분과로 나뉘었다. 삼청교육대 분과, 금융조사 분과 등인데 나는 과거 금융계에서 종사한 경험이 있어 도 가장 건수가 많은 금융조사 분과로 소속되었다.

청문회 하면 떠오르는 건 이른바 ‘청문회 스타’라는 말인데, 이 스타 중에는 재미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 때 정주영 씨의 발언 또한 큰 파문을 일으켰다. 뭐라 꼭 꼬집어 말하는 것은 아닌데도 강제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은연 중에 내비친 발언은 유명하다. 쉽게 말하면 “나는 장사하는 사람인데, 이유 없는 곳에 투자하겠느냐?”는 식이었는데 ‘심증은 가지만 물증은 없는’이런 증언을 놓고 유추 해석하는 것 또한 여야간에 팽팽한 신경전으로 이어지곤 했다.

반면에 증인이 큰소리 친 경우도 많았다. 대부분의 증인들은 ‘추상같은 호통’에 쩔쩔매곤 했는데, 허화평 씨나 장세동씨 등은 조리있게 따지며 반박하는 바람에 의원들이 오히려 더 당황스러운 경우였다. 어쨌거나 그런 결과로 그들 역시 이른바 ‘청문회 스타’이 반열에 올랐으니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난다?

아무튼 대한민국 내에 떠돌던 소문이란 소문은 다 조사대상으로 올라와 있다보니 웃지 못할 일도 참 많았다. 소문은 역시 소문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았고, 또 그 과정에서 이외의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일해재단이나 청남대가 그 좋은 예였다.

당시 일해재단에는 재부에 엄청난 지하통로가 있고, 또 유사시에는 바로 비행기가 뜰 수 있고, 서울공항까지 지하통로로 연결되어 있다는 등, 거의 하나의 ‘기지’처럼 어마어마한 시설이 있다는 소문이었다. 하도 소문이 무성하다보니까 사실 나부터도 그 진상이 궁금했다. 그런데 일해재단은 역시 일해지단이었다. 청남대를 방문했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 곳들은 마치 청와대 부속기관과 다름없었다. 찾아간 의원들을 경호관들이 입구에서 딱 가로막고는 문을 안 열어 주는 것이다.

“절대 안됩니다! 국정조사, 우리는 그런 것 모릅니다. 상부의 명령이 없습니다.”

앵무새처럼 이 말만 되뇌이니 참 답답할 노릇이었다. 가만히 있을 야당 의원들이 아니다. 그대로 아스팔트 위에 주저앉아서는 호통을 치는데, 정작 그 자리에서 난처한 것은 여당 의원들이었다. 그 옆에 앉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함께 호통을 치자니 뭔가 어색하고...슬그머니 한 쪽 귀퉁이에 몰려 앉아 엉뚱하게 ‘야 덥네!’ 어쩌구 하면서 딴전을 피워보지만 참 죽을 맛이었다.

결국 들어가긴 들어갔다. 그리고는 그래도 전 대통령의 집무실인데 그 속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기 시작하는데...지하통로가 있나 없나 본다며 망치로 벽을 두드려 보는 의원, 건물 옥상 위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는 의원...아무리 뒤져봐도 비행장은 커녕 지하통로도 발견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일해재단 방문 시 의외로 우리가 깜짝 놀란 것은 뒤뜰에 별장처럼 마련된 부속건물이었다. 철조망까지 쳐져 접근을 막고 있었는데, 막상 그 곳을 들어가 보니 우리는 우리의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찻잔 하나에서부터 시작해 의자 하나까지 모든 집기들이 청와대의 물건과 똑같은 디자인으로 되어 있었다. 한 번도 쓰지 않아 모두 흰 천으로 덮여 있었지만, 그것은 분명 청와대에서 쓰는 모든 비품을 그대로 본 딴 것들이었다.

또 한쪽에는 대통령 직무시절 외국 방문 시에 받았던 모든 선물들이 그대로 진열되어 있기도 했다. 건물은 그자체로 청와대의 축소판이었다.

당시 일해재단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그 곳은 대통령이 퇴임 후에 관련 학자들과 함께 통일과 안보, 국제평화에 기여한다는 연구기관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본 바에 의하면 연구기관으로서는 도저히 볼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너무 클 뿐만이 아니라, 너무 많은 돈을 들여 호화스럽고 사치스럽게 치장해 놓은 곳이었다. 연구기관이라기 보다는 퇴임 후에 기거할 곳으로 조성되었음이 분명했다.

비록 소문대로 지하통로나 비행장이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의외의 상황은 그런데서 발견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가하면 평화의 댐 성금 조성 시, 성금을 낸 사람들에게 공사를 떼어주기로 했다는 전두환 씨의 사인이 증거물로 채택되기도 하면서 결과적으로 온 국민을 공포에 떨게 했던 평화의 댐이 엄청난 ‘사기극’에 불과했다는,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밝혀지기도 했다.

역시 지금도 분명한 것은 아니 땐 굴뚝에서는 결코 연기가 안 난다는 것이다. 비록 터무니없이 소문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본말이 전도된 경우도 많았지만 그 또한 뭔가 근거가 있었기에 나오는 소문들이었다. 청문회는 바로 그런 사실을 밝혀내는 과정이었고, 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정치인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함께 깨닫게 되는 사건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사람이 이렇게 일하고도 살 수 있구나! 를 실감할 정도로 엄청난 업무에 시달려야만 했다. 부총무와 5공비리 특위 간사 일만으로도 바쁜데, 또 당에 사고가 터지고 말았다.

당시 당 예결위원장이던 김용태 씨가 전북에 내려가서 새만금 사업의 정부지원을 요청하는 기관장들 앞에서 ‘전라북도에 뭘 해줘? 국회의원 하나도 당선 못 시킨 사람들이 말야! 하는 청천벽력 같은 발언을 하고 말았고, 그 말이 언론에 보도되고 만 것이다. 결국은 야당의 성화에 못이겨 예결위원장직을 사퇴하기에 이르렀고 뒤를 이어 신상식 의원이 예결위원장에 결정되었다.

그런데 또 야당에ㅔ서는 자꾸만 신상식 의원에게 트집을 잡았다. 신상식 의원의 형님이 ;밀양의 농공단지 조성에 관련해 이권이 개입되었다는 것이 그 트집이었다. 야당에서는 예결위원장에게 미리 상처를 주어 힘을 빼자는 전술 같았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또 다시 나에게 일이 떨어졌다. 예결위원회 부위원장격인 간사를 나에게 맡긴다는 지도부의 결정이 난 것이다. 일복이 터져도 아주 단단히 터져버린 것인데, 나는 정말 맡기가 싫었다. 능력을 벗어나는 무거운 짐을 여러 개 지다가는 하나도 제대로 못할까 두렵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와중에서도 지금 생각해 봐도 참 신기할 정도로 나는 맡은 일에 관한 한 그런대로 잘 처리해 갔다.

한편 청문회에서 여당의원이 갖는 애매함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나는 젊은 의원으로서 ‘밝혀야 할 것은 밝혀야 한다. 그래야 설득력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고, 그러다보니 남들보다 또 배는 더 힘들었다. 여당 의원에게 좀처럼 정보를 제공해 주지 않는 한계 속에서 정보를 확보하는 일이 만만치가 않았던 것이다. 정보가 있는 곳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쫒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열심히 한 결과인지 그 때 내 별명이 ‘얄미운 여당 의원’이었다. 어떨 때는 야당 의원보다 한 술 더 떠 자료들을 제시하다보니 뒷북을 치는 야당의원들이 붙여 준 별명이었다. 본의 아니게 당내에서도 적잖은 눈총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청문회를 지켜보는 국민들의 성원 앞에서 ‘할 건 해야 한다. 그것이 정치인이다’는 내 소신에 큰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고, 그래서 야당의원들이 붙여 주었던 그 별명이 아직도 자랑스럽다.

‘처음’이 남긴 것들 - 값비싼 수업료

초유의 여소야대는 청문회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고조되면서, 겉으로 볼 때는 ‘진실의 승리’ ‘민주주의 정착’등의 말로 표현되곤 했지만, 사실 안으로는 폭풍 전야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고, 적잖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여당이 국회의 힘을 잃은 것이 한국 정치상 처음 있는 일이다 보니, 모든 행정부가 당황하고 긴장하면서 본래의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 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도모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의회민주주의가 토착화된 선진국에서의 여소야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언제까지 우리의 특수성 타령만을 하자는 것이 아니고 보면,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만 할 ‘진통’이라는 측면도 있었다. 국회의원의 한 사람으로서 ‘아 국회의 힘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구나’하는 걸 새삼 느꼈다는 점, 그리고 국민이 선출한 국회의원들의 권위가 세워졌다는 점 역시 긍정적인 측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문회’에 모든 것이 집중되다 보니(물론 이것도 처음 해 봐서 그랬을 것이다.) 지금 당장 현 시점에서 처리해야만 할 일은 미뤄지거나, 또 국회가 정부의 법안을 비토하는 일이 잦아지다보니, 거기에 다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 다시 되돌아오고, 그러는 가운데 많은 ‘절름발이 법’들도 생겨났다.

소위 한국 노동시장의 유연성이 없어지고 경직성이 강화된 원인을 찾으라면 그 중에 하나 13대 국회에게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야당은 민주화의 열망에 쫒아가다 보니까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수준에, 어떤 측면에서는 미국보다 더 앞선 법들도 제정되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거기에 대한 장기적인 대책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장기적이고 전면적인 대책도 없는 상태에서 몸은 아직 ‘여기’에 있는데 머리만 ‘저기’로 달려간 형국이라고나 할까.

특히 큰 문제는 국책사업이라 할 사업들이 가 당의 공약 등과 조율되면서, 당리당략에 의해 4당에 ‘분배’되고 ‘안배’되는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기반 시설의 투자는 줄 수밖에 없었고 지역별로 각 당의 공약사업에 우선 투자되는 모순을 낳았다. 이런 것들은 기반 시설의 투자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근래 3,4년 동안 물류비용이 높아지고, 수풀 단가가 높아지면서 결국 국제경쟁력이 약화되는 결과로 나타나기도 한다.

물론 이런 모든 것은 국회 입법과정의 잘못도 있지만 예산 심의 과정에서 각 당의 자기주장이 타협점을 찾지 못한 채 ‘분배’의 차원에서 마무리된 원인이 크다 할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는 두 번째의 여소야대를 맞고 있다. 또 새 정부는 ‘청문회’를 일상화 하겠다고 한다. 물론 이제는 그래도 두 번째 해 보는 것이니 그때처럼 ‘만사를 제쳐두고 매달리게’ 되거나 ‘매일같이 청문회만 해야 하는’일도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광주’사건처럼 시대의 화두가 되어 버릴 정도, 그러면서도 한없이 억눌린 채 베일에 가려져야만 했던 엄청난 사건도 없다.

물론 IMF라는 새로운 시대적 화두가 도사리고 있지만 분명 ‘광주’하고는 다르다. 무엇보다 국민은 그 때처럼 억눌려 있지 않다. 억눌려 있다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그 때의 폭발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설령 매일같이 청문회를 한다 해도 모든 것이 잘 될 것으로 믿는다. 누구나 ‘처음’ 해 보면 그 처음이 주는 의미 때문에 더 긴장하고 당황하기 마련이다. 이제 우리는 그 처음의 긴 터널을 지나왔고 그만큼 담담하게 잘 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13대 국회가 남긴 모든 문제들은 우리의 의회민주주의가 뿌리내리기까지, 우리가 치루어야 할 값비싼 수업료였던 셈이다. 그러나 어쩌라! 수업료 없는 배움은 없는 법이다.

탈출구를 찾아라!

‘이거 도대체 끝이 어디냐?’

‘매일 조사해 봤자 결국은 사법부가 알아서 할 일이고, 우리는 겨우 고소 고발하는 수준인데 말야. 이거 참 결론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여기에서 마감을 안하면 끝까지 가자는 얘긴데...도대체 그 끝이 뭐야?’

청문회로 날이 지새는 가운데 의원들 간에는 서서히 이런 문제의식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여야가 모두 마찬가지였다.

이런 속에서 결국 4당의 총재 노태우,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씨가 자리를 함께 했다. 긴 협상과 토론 끝에 결국 4당이 함께 내린 결론은 이거였다.

‘탈출구가 필요하다!’

그 때 탈출구는 바로 ‘전두환’씨였다. 광주특위와 5공비리 특위의 최종 귀착지는 광주를 시작으로 7년간 대통령을 지냈던 전두환 씨에게 모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전두환 씨를 청문회에 세우는 것으로 일단 이 혼란은 마감될 수 있다는 판단이 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가 않았다. 백담사 측에서 청문회에 서는 것만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때부터 지리한 설득 작업과 협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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