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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명현의 세상생각] 설 단상-우리에게 식구(食口)란 무엇인가
나명현  |  mheon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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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2.01.29  10:2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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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빛포럼 대표/지에스리테일 고문
"어릴 적 설 풍경 중 제일 기억에 남는 장면은 동네 떡 방앗간의 정경이다. 설이 다가오면 집집마다 불린 쌀을 커다란 양푼에 담아 머리에 이고 방앗간으로 향한다. 방앗간 앞은 이른 아침부터 장사진이다. 사람 대신 각종 커다란 그릇들이 줄을 섰다. 김이 물씬물씬 나는 시루와 기계에서 끊임없이 밀려 나오는 가래떡으로 주변은 활기가 넘친다. 어린 눈에 수증기로 가득 찬 방앗간은 신비한 요술 집 같았다."
 
원래 인류의 식사는 청동기 시대부터 온 마을 식구(食口)가 함께 둘러앉아 먹는 것이었다. 우리나라도 가족 단위로 밥을 먹는다는 것은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나 정착된 문화이지 그 전까지 평민들은 마을 공동으로 취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다 보니 밥보다는 떡이 주식으로 알맞았고 오늘날 설음식으로 떡국이 흔적처럼 남아 있는 연유이다.
 
설 연휴가 시작된 오늘, 가슴을 따뜻하게 적시는 우리의 단어 '식구'가 그립고,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글을 소개한다.
 
가족은 영어로 패밀리(family) 입니다. 노예를 포함해서 한 집안에서 생활하는 모든 구성원을 의미하는  라틴어 파밀리아(familia)에서 왔습니다.
즉, '익숙한 사이'라는 의미입니다. 

중국은 '일가'(一家), 일본은 '가족'(家族)이란 용어를 주로 사용합니다.
즉, 한 지붕 밑에 모여 사는 무리라는 의미입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식구'(食口)라는 말을 주로 사용해 왔습니다.
"같이 밥 먹는 입'이란 뜻 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인에게는 '가족'이란 "한솥 밥을 먹는 식사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남에게 자기 아내나 자식을 소개할 때도 '우리 식구'란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볼 때, 한 집에 살아도 한 상(床)에서 밥을 먹지 않거나, 식사를 할 기회가 없다면 엄밀히 말해서, "핏줄"이기는 해도 '식구'랄 수는 없습니다. 

최근 한국 가정의 위기가 심각해지고 있는 것은, 가족 간에 식사를 같이 하지 않는 풍조가 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몇 년 전 뉴스에 나온, 고된 이민 생활 속에서도 6남매를 모두 미국 예일대와 하버드대에 보내, 미국 최고 엘리트로 키운 '전혜성'여사도, 자녀 교육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아침 식사는 가족이 함께 했다"며 "밥상머리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요즈음, 우리 생활을 들여다 보면, 실제로 '식구'가 얼굴 맞대고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밥상머리 뿐인데 오늘 날, 우리나라 가정에서는 온 '식구'가 한 밥상에서 같이 식사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요?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출근시간, 자식의 등교시간이 다르다 보니, 각자 일어나자 마자 허둥지둥,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또는 우유 한 잔 서서 마시고 나가기 일쑤고,

저녁 귀가시간도 각자 달라 저녁식사를  한 식탁에서 하기는 커녕, 언제 귀가했는지 서로 모르고 각자 방에서 잠자기 바쁩니다.
이러한 일상의 연속이니 "밥상머리 교육"은 고사하고, 어떤 때는 며칠간 얼굴 못볼 때도 허다합니다.

1970년대만 해도, 대부분의 가정에서 늦게 귀가하는 '식구'를 위해, 아랫목이나 장롱의 이불 속에 밥을 묻어 두곤 했습니다.

밥의 온도는 곧 사랑의 온도였습니다.
자식이 아무리 늦게 들어와도 어머니는 뜨끈한 국과 따뜻한 밥을 챙겨 주셨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전기밥솥이 그 자리에 대신 놓여 있고, 라면 등 몸에 좋지 않는 인스턴트 제품이 집집마다 있어 필요할 때면, 밤중에라도 각자 알아서 처리하게끔, 너무도 친절하게 배려되어 있습니다.

요즈음, 밤늦게 들어와 아내에게 밥상 차리라고 했다간 이 시간까지 밥도 못먹고 어딜 돌아 다녔느냐고 핀잔 듣기 십상이고, 부엌에 라면 있으니 끓여 먹으라고 합니다.

느닷없이 소낙비 오는 밤, 버스 정류장에는 우산을 받쳐 들고 언제 올 줄도 모르는 '식구'를 기다리는 
그 많은 모습들을 요사이는 볼수가 있는가요?

그러나 요즈음 주부들의 태반이 나름대로 직장과 할 일을 갖고 있으니,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다 해도 현실은 너무 매마른 것 같습니다.

자식이 뭐 좀 해달라는데, 해주지 못했을 때는 "고개 숙인 부모"를 향해 자식은 "도대체, 해 준 게 뭐 있느냐"고 따지고 들 때도 있습니다.

옛날에는 아내와 자식이 가장의 위압적인 언사 때문에 상처 받는다고 하지만, 요즈음 가족들이 던지는 무심한 투정 한 마디에 가장은 속마음에 피멍이 들 때가 있습니다, 
단지, 자기 소치인 냥 말하지 않고 지낼 뿐입니다.

누가 말했던가?
오늘날  "울고 싶어도 울 곳이 없는 사람"이 바로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아버지는 직업 형편상 귀가하는 시간이 대체로 늦습니다.
그래서 '식구'들이 가장을 기다리다가 먼저 잠자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쩌다, 아이들이 깨어 있더라도 컴퓨터나 휴대전화에 정신이 팔려 제 방에서 건성으로 인사만 건넵니다. 

그러니 밥상머리 교육이나 대화는 기대하기 힘들고 나아가 얼굴은 자주 못보더라도 서로 각자의  시간과 생활은 간섭이나 침범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찬바람 불듯, 집안 분위기를 냉각시킵니다.

평소 눈길 한 번 준 일 없던, 애완견만이 한밤중에 쓸쓸히 반갑게 맞아주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품안의 자식 대하듯 애완견 재롱에 푹 빠진 가장을 보면, 뭐라 말할 수 없는 쓸쓸함이 밀려옵니다.

한 집에 살지만, 잠만 집에서 자는 동거인에 불과해진 오늘날 한국가족의 현실이 서글플 따름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생가'(生家) 라는 것이 없습니다.

주소 000번지, 부모가 살고 있는 집에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병원에서 태어나고, 돌잔치, 생일잔치 모두 다 레스토랑이나 호텔에서 갖습니다.

그러다가 회갑, 칠순잔치도 집밖에서 하며, 죽을 때도 병원에서 죽습니다.
이러고 보니 '생가'가 없지요.
전부 다 집밖입니다.

조상과 부모의 체취가 어려있고, 나의 첫 울음소리를 내 품었던 집은 이제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렇게 볼 때 엄밀한 의미에서 나의 '생가'와 나의 '고향'은 어디인가?  

요즈음 가족잔치는 집에서 손수 장만하고 따뜻한 정이 오고 갔던 그런 분위기가 아니고, 

집 대신 외부의  음식점이나 호텔로 손님을 초대하는 사실상 '체면 흥행 이벤트'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고 정진석 천주교 추기경이 평소에 "가정은 신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마련된 성소이니 물질의 노예, 정보의 노예가 되지 말고, 가정 안에서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한 말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해 보면, 가족과 가정의 해체는 결국 '식구'의 소멸과 집의 부재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시대와 사회가 아무리 변해도, 자식이 결혼으로 분가하기까지는 가급적 한 집에서 '식구'들과 지지고 볶는 생활을 갖는 것이 진정한 '식구'이며 진정한 삶의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식구'란 정겨운 단어가 그립고 어릴 때 '식구'들과 빙둘러 앉아 함께 했던 밥상이 정말 그립습니다.

어머니 밥상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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