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창용 한은 총재 지명자
[정재원 기자] 차기 한국은행 총재로 이창용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태평양 담당 국장이 내정되자 한은 안팎에선 "매파(통화 긴축 선호)나 비둘기파(통화 완화 선호)로 구분하기 어려운 중도파에 가깝다."는 평가를 내놓았다. 이 내정자가 아·태 국장으로 근무한 IMF는 완화적인 통화정책 기조 유지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등 대체로 비둘기파적인 성향을 보인다고 평가한다. 
 
그런만큼 통화정책의 연속성을 확보할 수 있는 '무난한 카드'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교수와 행정가·국제기구 간부를 두루 거친 한국의 대표적인 경제통으로, 전문성을 갖추면서도 정치색이 옅어 잡음이 덜할 것이란 기대도 있다. 
 
업계에선 그의 전문성을 두고 이의를 제기하긴 이가 없을 정도다. 특히 이 후보자가 거시경제와 통화정책 전문가라는 점엔 이견이 없다. 학계와 정부, 국제기구에서 폭넓은 경험을 쌓아서다. 
 
이달 말 퇴임하는 이주열 한은 총재도 "학식과 정책 운용 경험, 국제 네트워크 등 여러 면에서 출중한 분"이라고 평가하며 "저보다 훨씬 뛰어나기 때문에 조언을 드릴 것은 따로 없다"고 말할 정도다. 
 
조동철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한국 사람으로서 처음으로 IMF에 최고직에 올라간 사람이다. 거시경제학에 대해 교과서도 썼을 정도로, 거시경제학에 대해 가장 솔리드한(단단한) 백그라운드를 갖춘 (차기) 총재로 보인다. 또 국제기구에서 오래 근무한 만큼 국제적 네트워킹에 굉장한 강점이 있다"고 평했다.  
 
이 후보자는 1960년생으로 서울 인창고,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땄다. 29세이던 지난 1989년 미국 로체스터대 경제학과 조교수가 됐다. 하버드대에서 같이 공부한 김대일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로체스터대에서 강의할 때 '올해의 교수상'을 여러 번 받았다"며 "실력은 물론 인품까지 갖춘 친구"라고 했다. 
 
지난 94년엔 34살의 나이에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임명됐다. 스승인 이준구 서울대 교수와 함께 쓴 '경제학원론'은 경제학도의 '바이블'로 통한다. 2007년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경제1분과 위원으로 참여해 이명박 정부의 경제 정책 틀을 잡았고, 2008~2009년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2011~13년 아시아개발은행(ADB) 수석이코노미스트로 발탁됐다. 2014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국제통화기금(IMF) 고위직(아시아·태평양 담당 국장)에 올랐다. 
 
이 후보와 가까운 인사로는 고등학교인 인창고와 서울대 80학번 동기인 윤종원 IBK기업은행 은행장이 꼽힌다. 특히 윤 은행장은 IMF 상임이사로 재임 시절, 이 후보가 IMF 아시아태평양 국장에 오르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은성수 전 금융위원회 위원장도 서울대 경제학과 80학번으로 각별한 사이고, 이달 말 임기를 마치는 이주열 한은 총재와도 막역한 사이로 알려졌다. 
 
금융위 관계자는 "세계금융위기 극복의 핵심 인물로,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위기 발생을 사전에 감지했고 대응책을 신속히 마련해 금융시장 불안으로 번지지 않게 했다"고 말했다. 조직 통합에도 기여를 했다는 후문이다. 익명을 원한 금융권 관계자는 "금융위 재직 시절에 연배가 높은 국장들과 별다른 갈등 없이 조직을 이끈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글로벌 인맥도 탄탄하다. '경제학의 천재'로 불리는 래리 서머스 전 미 재무장관과는 하버드대 시절 스승과 제자로 인연을 맺었다. 서머스 전 장관은 2013년 박근혜 전 대통령을 만났을 때 그를 IMF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닥터 둠'으로 유명한 누리엘 누비니 뉴욕대 교수는 박사 과정 시절 사귄 동문이다. 올리비에 블랑샤르 IMF 수석이코노미스트와도 친분이 있다. 
 
국내에선 같은 덕수 이씨인 이주열 총재와 사석에서 편하게 만나는 사이로 전해졌다. 신사임당의 후손이란 특이점도 있다. 이 후보자는 신사임당의 막내아들로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아우이며 조선 중기 유명 서화가인 옥산(玉山) 이우(李瑀·1542∼1609)의 16대 종손이다. 
 
190㎝대의 장신으로, 고등학교 2학년까지 배구 선수로 활약했다. 이 후보자는 코로나 후유증으로 한동안 고생했지만, 현재는 업무에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후보자는 국회 인사청문회 등 임명 절차가 순조롭게 진행되면 이주열 총재에 이어 4년 임기의 통화정책 수장이 된다. 하지만 그의 앞에 놓인 환경은 만만치 않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물가를 잡되 경기는 침체시키지 않도록 금리 인상 속도를 잘 조절해야 한다"며 "새 총재에겐 험난한 과제가 놓여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복수의 언론에 따르면 시장에선 기존의 통화정책 기조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올해 두세 차례 금리 인상을 예고한 방향이 바뀔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것이다. 공동락 대신증권 연구원은 "금리 인상 흐름은 이어질 것"이라며 "다만 이 후보자의 금리 정책 입장은 그간의 공직 생활 등을 고려할 때 이 총재보단 '덜 매파적'인 것 같다"고 말했다. 
 
통화 정책의 독립성은 더 강화될 전망이다. 이 후보자는 지난 1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1월6일자 1·8면)에서 "특정 지역의 부동산 가격을 잡으려고 거시경제 전체에 영향을 주는 조세·금리정책을 동원하는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고 말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정부 지출을 늘리기 위해 발행한 국채를 한은이 사들이라는 주장(부채의 화폐화)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그는 "중앙은행을 통해 국채를 매입하면 유동성 증가로 인플레이션 및 부동산 가격 상승, 환율 평가절하 등 다른 부작용을 피하기 어렵고, 국가 부채 비율이 높아지면 경제 위기 발생 시 정부 대처 능력이 제한된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한 언론 인터뷰에선 "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한국이 향후 10~20년 안에 일본과 같은 저성장 구조로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고령화에 대한 경고다. 신얼 SK증권 연구원은 이를 두고 "고령화는 잠재 성장률 하락으로 이어지는데, 경제 성장세를 위축시킬 수 있는 과도한 금리 인상은 경제 구조에 부담이 될 수 있어 급격한 긴축 전개 가능성은 작아질 수 있다"고 했다. 
 
한편 이 후보자는 오는 29일 미국 워싱턴에서 출발해 30일 오후 귀국할 예정이다. 한은은 인사청문회에 대비해 조만간 청문회 태스크포스(TF)를 꾸린다. 이로써 다음 달 1일부터 사상 초유의 한은 총재 공석 사태는 불가피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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