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장 찾은 전두환 전대통령 내외
뭐야? 약속이 틀리잖아!

드디어 ‘백담사’가 국회에 도착했다. 전두환 씨가 이층 귀빈실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총무실을 찾았다. 들어서니 이미 안현태, 허문도, 이양우 씨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여간 삼엄한 게 아니었다. 얼굴들이 모두 상기되어 있는데, 막 내가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 안현태 씨의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런 식으로 우린 못해! 정 그러면 다 쏴 죽여 버리고 나도 죽어 버릴거야!“

여간 흥분한게 아니었다. 그 쪽의 반응으로 봐서 그동안 ‘잘 되었으니 나오시라’며 무마를 시켜놓은 게 분명했다. 참 도대체 어쩌려고 그랬는지 알아가도 모를 일이었다. 이한동 충무의 입술은 이미 바짝 타 들어가 있었다.

“그럼 낸들 어떡합니까...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잖소!

“뭐요?” 그럼 그 동안 약속은 뭐요? 이건 약속이 틀리잖아!“

그 쪽에서 워낙에 흥분하고 나오니 이한동 씨는 말문이 막혀 버린 듯 그 때부터는 아예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흥분한 사람들에게 내가 나서서 뭐라 말을 건넬 수도 없는 일. 나는 일단 이총무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합니까. 일단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얘기를 해 보도록 합시다. 본인이 판단할 문제이고 그러니 일단 얘기라도 해 보도록 합시다.”

‘그래?...가봐! 가봐! 당신이 가봐!“

이한동 총무도 참 난감했을 것이다. 그래도 과거에 모시던 사람이니 그 앞에서 그런 저런 얘기를 한다는 것이 어찌 쉽겠는가.

그래도 내가 제일 만만한 편이었다. 물론 내가 11대 국회의원을 지내기는 했지만 단독으로 마주해 본 적도 없고 정치적으로 크게 빚을 진 것도 아니니 내가 나설 수밖에.

‘전투에는 이기고 전쟁에서는 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나는 이민섭 의원과 함께 귀빈실로 들어갔다. 들어서니, 양쪽으로 경호원들이 쫙 서 있고, 과거 민정당의 고참 의원들이 옆에 앉아 있고, 언제 그렇게들 왔는지 여기저기 의원들이 잔뜩 긴장한 채 서 있는게 아닌가!

특히 과거에 전두환 씨로부터 각별한 애정을 확인 받았던 사람들이 모두 와서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데 완전히 대통령의 국회 방문을 방불케 했다. 이민섭 의원 역시 과거에 전두환 씨와 잘 알고 있었는지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막상 대면하기는 그 때가 처음이었다. 백담사에 오래 있은 탓인지 유난히 하얀 피부가 더 하얀 게 그 분위기 속에서 묘하게 압박감을 주었다. 어차피 공을 던져야 할 사람은 나였다.

“저는 5공 특위를 담당하고 있는 장경우 의원입니다.”

“아!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앉으세요!”

“이제 곧 청문회가 시작됩니다. 문은 이 쪽에 나 있고, 가서 이 자리에 앉으시면 됩니다. 이 자리에는 위원장이 있고 그 밑으로 보조하는 사무처 직원이 있으며 그 밑으로는 증인을 보호해 줄 수 있는 변호사 석이 있습니다. 이양우 변호사가가 앉을 장소입니다. 방청석은 이쪽으로 쭉 있습니다.”

나는 일단 탁자 위에 간단하게 손짓을 해가면서 설명을 했다. 이제 선서를 얘기 할 차례다.

“들어가시면 위원장이 증인 올라오시오, 이렇게 말씀하실 겁니다. 그러면 올라가셔서 위원장 쪽으로 서시지 말고, 방청석, 그러니까 국민을 향해 오른 손을 들고 준비한 선서문을 읽으셔야 합니다.

순간 가만히 듣고 있던 전두환 씨가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리고는 옆 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원래 그런 것 안하기로 했잖아? 어때 당신들, 그렇게 하기로 했지?“

이 말에 갑자기 모든 사람은 벙어리가 되어 버린 듯 한결 같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할 수 없었다. 어차피 나에게 맡겨진 십자가였다.

“웬만하면 우리도 증인 선서만은 없게 해 보려고 바로 오늘 아침 이 순간까지 노력을 계속 했습니다. 그러나 결론이 나질 앉았습니다. 다만 형사 소속법의 선서의 의미를 보니까 양심에 따라 증언하겠다는 약속이기 때문에, 굳이 위원장을 향해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데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여야 간에 잘 얘기가 되어서 결국 선서를 하긴 하되, 국민을 향해서 한다는 것으로 합의가 되었습니다.”

긴 설명을 마치고 나니, 전두환 씨는 체념한 듯 “알았어요!”한 마디를 내던지고는 자세를 조금 고쳐 앉는 듯 하더니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 고생들 하시는구먼...내가 장경우 의원 열심히 잘 하신다는 얘기 들었소. 그리고 이민섭 의원도 오랜만이구먼...그런데 두 분 말이요, 내가 이거 한 가지만 얘기하겠소. 전투에는 이기고 전쟁에는 지는 법이 군대에서는 있소. 내 오늘 이 한 가지만 말하고 싶소,. 그것을 잊지 마십시오.”

“...알았습니다.”

나는 일단 방을 나왔다. 정말 큰 전쟁을 치른 사람은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전쟁이 이긴 전쟁인지 진 전쟁인지 뭐 중요하지도 않은 일이었지만, 왜 내가 그 중간에 끼어 그 고통을 다 받아야 하는지 한숨이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지금도 전두환 씨가 한 마지막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다. 실컷 전투에서 잘 싸워놓고 막상 전쟁에서 지는 일이 없게 하라는 말일 터인데, 그 상황에서 그 말은 과연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을까?

큰 전쟁에서 이기려면 내가 이 정도의 수모는 얼마든지 당할 수 있다는 자기위안이었을까?

아니면 지금까지 여소야대 정국에서 잘 버텨와 놓고는 이제 와서 나를 청문회에 세우는 것은 당신들이 전쟁에 진 것과 같다는 말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정말 순수한 마음에서 한 사람의 정치인에게 던져보는 ‘훈수’였을까?

지금의 나로선 그것을 판단할 수 없으니, 이 또한 내가 아직 정치를 모른다는 얘기일까?

<다음에 계속...>

 

저작권자 © 시사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