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배하는 90년 민주당 그 때 그 사람들. 우측3번째가 장경우 전의원
김영삼과 무너지는 사람들

얼마전 ‘3김 시대’라는 드라마가 한창 방영중이다. 3김씨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우리 현대 정치사를 다룬 일종의 다큐드라마라 할 수 있을텐데 나는 이것을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정치의 상황이 ‘3김’을 만들어낸 것일까?

분명한 것은 우리 현대정치사를 말함에 3김의 ‘존재’는 결코 빼놓을 수 없다는 점일 것이다. 게다가 3김의 삶 자체가 너무 드라마틱해서 아마 이런 현실이 없었던 상태에서 누군가가 이런 드라마를 서냈다고 한다면 ‘야, 그건 너무 비현실적인데?’할지도 모를 일이다.

어떻든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정치는 3김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길고도 긴 이 드라마를 후세 사람들은 과연 뭐라고 평을 할지... 그러나 정치인의 한 사람인 나는 그 드라마의 관객일 수만은 없다. 좋든 싫든 그들과 만나야만 했고 그 속에서 부대껴야만 하는 것이다. 3당합당과 함께 시작된 정계개편의 회오리 바람 속에서 가장 먼저 인연이 시작된 것은 김영삼 씨였다.

태풍의 눈-정계개편

백담사 청문회를 끝으로 일단 ‘청문회 정국’은 일단락 지어졌다.

그리고 새해 벽두, 바로 그 순간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정계개편의 말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사실 정계개편 논의는 총선 직후, 그러니까 여소야대 국회가 막 출범했을 당시 여기저기에서 한창 거론되었던 문제였다. 그러나 바로 청문회가 도입되면서 모든 것은 일순간 정지되는 듯 했다.

아니나 다를까. 청문회가 일단락되기 무섭게 김영삼 씨와 김종필 씨가 한 우산 속을 거니는 사진이 나오고, 김대중 씨는 노태우 씨와 정책연합을 할 것이다는 예측들이 무성하고... 바야흐로 정계개편의 연기가 솔솔 피워 올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그 당시만 해도, 만약 정계개편을 한다면 민정당과 공화당의 합당, 아니면 민정당과 평민당의 정책연합 형식일 것이다는 예측들이 지배적이었다. 그 결과로 중간 평가 문제를 양보해줬다는 설, 청문회 때 어떤 내약이 있지 않았겠느냐는 설... 말 그대로 ‘설’이 무성한 가운데 양당의 의원들 스스로도 ‘결국 그렇게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다 알다시피 그런 모든 예측들은 빗나가고 말았지만 말이다.

단 몇 초만에 바뀐 여야의원

나는 청문회가 끝나자마자 예결위 간사들의 정기적인 해외 순방을 나섰다. 남미 3국인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칠레의 공식방문을 마치고 좀 쉬어가자며 마이애미에 도착했다. 사실 여소야대 정국이 시작되면서 거의 2년 동안 일요일 한 번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좀 느긋한 마음으로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때 함께 동승했던 의원들은 현재 주택공사 사장으로 있는 민주당의 김동규 의원, 평민당의 김봉호 의원, 그리고 공화당의 조부영 의원 등이었고, 민정당에서는 서정화, 조남옥 의원이 함께 했었다. 물론 우리 역시 만약 정계개편이 된다면 민정당과 평민당의 정책연합일 것이다는 예측을 하고 있었다. 때문에 순방기간 내낸 우리는 농담을 주고받기까지 했다. 특히 평민당의 간사였던 김봉호 의원은 각 지역의 대사들에게 애교 섞인 농담을 던지곤 했다.

“이거 이제 우리도 여당될 거니까 지금부터는 우리 우습게 보지 말라구!”

“시집살이 시키는 건 아니겠지?”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세월 좋은 농담들이었다. 그러면서도 설마 그렇게 빨리 정계개편이 되리라는 건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고, 그 모양새가 그렇게 되리라는 것 또한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가 새벽에 마이애미에 도착해 총영사 관저에서 조찬을 시작할 때였다. 총영사가 자꾸 나를 보자고 했다. 내가 여당측 대표간사였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리고는 굳이 나를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갔다.

“이거 좀 보십시오.”

‘청와대에서 민정, 민주, 공화 3총재가 회동 후 3당합당 전격 합의 발표’

딱 한 장의 한 줄짜리 팩스였다. 우리가 도착하기 직전에 전송되어 왔다는 것이다 턱하고 말문이 막혔다. 나는 일단 밖으로 들고 나와 나머지 의원들에게 건네줬다.

순간 우리들 사이에는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침묵이 흘렀다. 단 몇 초 사이에 한 사람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전부 여당 의원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럴 때의 기분은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당혹스러움? 허탈감? 이상한 미안함?... 글쎄 분명한 것은 결코 좋은 쪽의 기분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잠시 후, 김봉호 의원이 일어났다. 그리곤 그 자리에서 직접 김대중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떤 말이 오고 갔는지, 김봉호 시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귀국길에 올랐다. 나는 김동규 씨에게 다가갔다.

“김의원도 YS에게 전화 해 봐야 되는 것 아뇨?”

“...하나 마나 아뇨? 이미 결정 났다는데 뭐하러 전화해요?...안할랍니다.”

김봉호 의원이 귀국하고 나자 우리는 그간 2년 동안 쌓인 긴장감이 한꺼번에 풀리는 듯 했다. 그렇다고 꼭 뭐 좋은 기분이라기보다는 아무튼 갑자기 몸이 노곤해지는 기분이었다. 서울에 빨리 들어갈 필요도 없어져 버린 것이다.

갑자기 느긋해져버린 우리들은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며칠 후 LA에 도착했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서울에서 연락이 왔다. 지금 당장 귀국하라는 것이었다. 아직도 백담사 청문회의 그 소란스러움이 귓전은 울리고 있는, 구정을 며칠 앞둔 시점이었다.

초유의 여소야대에서 초유의 여당 탄생으로

오자마자 바로 3당합당의 실무작업에 뛰어들었다. 3당에서 각자 5명씩 전체 15명으로 <3당합당 실무위원회>를 구성했는데 나는 또 일복이 터져 간사 일을 맡았다. 그 때부터 그 복잡하고 방대한 3당합당의 구체적인 업무가 시작되었다.

당의 명칭, 당헌 당규 제정, 주요 당직자 결정, 3당의 자산 및 부채 통합 문제, 당직자 정리 문제…등등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새로 당을 하나 만드는 것보다 더 복잡하고 어려웠다.

그런데 세상사 인심이 조석으로 변한다더니 정말 무섭게 변했다. 여소야대 때는 그래도 민정당에 대한 국민적 동정이 있었지만 3당합당 후에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 심지어는 당사를 마련하는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건물주들이 쉽게 임대를 안해주는 것이었다. 3당합당에 대한 국민적 여론이 좋질 않은 상태에서, 분명 당사 앞에서 연일 시위가 벌어질 것이 뻔한데 건물에 손상을 입을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게다가 국회의원 200여 명을 가진 거대 정당이 들어갈 사무실이 쉽게 나타날 리도 없었다. 아예 빌딩 전체를 빌려야 하는데 그런 건물이 마땅히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와중에 금융연수원, 구 경기고등학교, 창덕여교 자리까지 물망에 오를 정도였다. 오랜 물색 끝에 결국은 여의도에 있던 한 빌딩에 세들어 살던 사람들을 모두 가락동 연수원으로 이전을 시켜주고 그 곳으로 들어갔다. 그 때까지만 해도 여의도에는 정당이 없었는데, 그 이후부터는 모든 정당이 여의도를 근거로 삼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논란이 되었던 건 역시 ‘지분’문제였다. 긴 논의 끝에 민정당이 5, 민주당이 3, 신민주 공화당이 2 해서 5:3:2라는 당대당 통합지분이 결정되었다. 3당의 3인 대표는 모두 최고위원으로 추대되고 후에 정지 전당대회를 통해 노태우 대통령이 당 총재로 취임하는 걸로 합의되었으며, 김영삼 씨가 대표 최고위원, 김종필 씨와 박태준 씨가 최고위원으로 추대되기로 결정되었다.

주요 당직자를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철저히 각 다의 지분대로 나뉘어졌다. 가령 조직 1국장은 민정당이 하고, 2국장은 민주당이 하고, 3국장은 공화당이 하는 식이었고, 총무국장이 민정당이면 부국장은 민주당이고…하는 식이었다.

훗날에서야 드러난 문제지만, 이렇게 철저히 물리적인 결합을 시켜놨기 때문에, 결국 당 안에 존재하는 ‘계파’ 사이에는 끝내 넘지 못한 벽이 있었다. 민정계, 민주계, 공화게라는 말이 하나의 ‘당’처럼 엄연히 당 안의 분위기를 갈라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당명을 정하는 일에서부터 합당 과정이 쉬운 건 아니었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웬만큼 조정이 되어갔고 드디어 <민주 자유당>죽 ‘민자당’이 탄생되었다. 불과 120여 석에 불과하던 여당의석수가 하루아침에 200석이 넘어버리는, 역시 초유의 거대 여당이 탄생한 것이다.

<다음에 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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