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선희
아, 그 때 그것이 바로!

막상 3당합당이 되고 나자 국민들의 비판이 높아졌다. 그 전에 평민당은 이미 이름을 신민당으로 바꾼 상태였는데, 이제 유일한 야당이 되어버린 그 신민당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고, 국민들 사이에서도 ‘해도 너무했다’는 여론이 비등해지고 있었다. 사실 나도 몇 가지 의문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과반수만 되어도 국정 운영에는 큰 무리가 없을텐데, 굳이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이렇게까지 키울 필요가 있었을까? 그렇다면…이거 정말 개헌으로 가는 것 아냐?’

나뿐만이 아니라 누구나가 그런 의심을 할 만 했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새로운 당 강령을 만드는 작업에서 드러났다. 대부분의 정당들은 강령을 만들 때 ‘국민에게 책임지는 정당이 된다’는 대목을 넣기 마련인데, 그런 대목이 나오면 당시 공화당의 김용환 정책의장 등이 이것을 자꾸만 ‘정부와 내각이 함께 책임지는’식으로 바꾸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제서야 모든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런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사람들은 ‘뭘 그렇게 복잡하게 하려는지 모르겠다’며 심드렁했지만, 내가 볼 때 이것은 분명 ‘개헌을 목표로 한 합당’이고 그 개헌은 다름 아닌 <내각제>임이 분명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은 박준병 사무총장이 중요한 일이 있다며 김종필 최고위원을 찾아 안양의 골프장까지 가서 ‘무엇’인가를 받아왔다. 그리고는 가져온 것은 굉장히 조심스럽게 보관해 두고, 또 김영삼 최고위원에게도 ‘무엇’인가를 받아오곤 했다.

나중에 중앙일보가 특종했던 ,내각제 합의각서>라는 것이 터졌을 때, 나는 그제서야 ‘아 그 때 그것이 바로 그것이었구나’직감할 수 있었다. 물론 항간에는 그것이 ‘가짜다’ ‘아니다’말들이 무성하고, 또 그것이 구체적으로 공개 된 적은 없지만, 어떻든 분명한 것은 <내각제>합의를 바탕으로 3당이 합당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가 있다.

설령 ‘좋다, 내각제 하자’했다 해도 왜 이것을 국민에게 공표하고 공개리에 합당하지는 못했던 걸까? 우리나라에 대통령 중심제가 맞지 않으니 내각제로 가자며 국민 설득 작업에 나설 수는 없었던 걸까? 꼭 굳이 ‘밀실정치’라는 말처럼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 그렇게만 했다면 훗날 문제를 그렇게 복잡하게 만들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당당하게 내각제로 갈 수 있었을텐데, 왜, 꼭, 굳이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

사람들은 바로 그것이 우리나라 ‘밀실정치의 폐단’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렇게 해야만 했던 ‘조건’과 ‘저의’가 선명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아무튼 그렇게 했음에도, 결국 합당의 목표는 무산된 셈이다. 얼마 후부터 김영삼 씨는 본격적으로 대통령 중심제를 부르짖기 시작했고, 그 우명한 말 ‘호랑이를 잡기 위해 굴로 들어간다’는 말 그대로 자신의 목표를 달성했다.

50여 명이라는 소수 계파를 이끌고, 그것도 120여 석의 국회의원과 대통령까지 가지고 있는 민정당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 이 사건은 우리 정치사 속의 하나의 ‘이변’임과 동시에 김영삼 씨의 정치력에 혀를 내두를만한 일이 아닌가 싶다.

어떻든 한 지붕 아래서 잉태되고 있는 그런 다양한 ‘동상이몽’에도 불구하고 민자당은 차츰 안정을 되찾아 갔다. 제1차 지방자치제 선거가 다가오고 있었다.

“오늘 민자 민주 양당은…”

유신 이후 최초로 실시되는 지방자치 선거는 합당 이후 최초의 국민심판이었다. 당시 3당합당은 ‘3당야합’으로 불리면서 선거분위기는 이미 야당에 우세한 쪽으로 흐르는 듯 했다.

당시 야당은, 3당합당시에 동참하지 않았던 이기택, 박찬종, 김광일, 이철희, 홍사덕, 장기욱, 김정길, 노무현 의원등이 구 민주당의 이름을 간직하고 있다가, 이 당이 신민당과 통합하면서 <민주당>으로 새롭게 정비되어 있었다. 물론 의석수는 80석 미만이었지만 여당이 워낙 커서 그렇지 1개 당으로 보면 결코 적은 당은 아니었으며, 엄연히 제1야당이었다.

이때부터 매일같이 뉴스의 멘트는 ‘오늘 민자, 민주 양당은…’으로 시작되곤 했다. 향후 몇 년 동안 지속되는 양당 대결구도가 자리잡은 것이다. 바로 이 양당 대결구도에서 맞이하는 첫 선거가 바로 제1차 지방자치 단체장선거였다.

선거가 돌아오자 또 내 일복이 터졌다. 지자제 선거대책본부장에 맡겨진 것이다. 그런데 상담합당에 대한 비판이 워낙 높다보니까 민자당으로선 꽤나 힘든 선거가 될 것이 뻔했다. 서울의 경우 젊은 층은 아예 민자당을 하지 않으려고 할 정도였다. 그 와중에 마포 지구당이 아예 후보를 못 내고 있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선희가 누구지?

선거는 다가오는데, 서울 한복판이라 할 마포에서 후보를 결정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은 당시 여당에 대한 부정적인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었지만, 사실 선거대책본부장인 나로선 여간 답답하고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마포 지구당은 시의원 후보로 내정되었던 사람이 서전선거운동으로 구속되는 등 말썽이 많았는데, 이렇게까지 되자 나는 위원장인 박명환 의원만 재촉할 뿐이었다.

“어떻게 후보 하나 못 냅니까? 아니 이거 정말 그렇게 밖에 안됩니까?”

“…하겠다는 사람이 없는데 저인들 어떡합니까…”

“아무튼 정 없으면 위원장 때려치고 서울 시의원이라도 하던지 무슨 방법을 강구하셔야지 정말 이러다가 큰 일 나겠습니다.”

“별 수 없이 사무국장이라도 내보내야 할 판인데 그 사람은 워낙 돈이 없어서…‘

참 큰일은 큰일이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이건상 총무국장과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다. 당사 앞 설렁탕 집에서 간단하게 소주 한 잔을 겉들인 점심이었다. 화제는 당연히 내 근심거리였다. 그런데 갑자기 이건상 총무국장이 입을 열었다.

“이선희는 어때요?”

“이선희가 누구야?”

“왜 그 가수 있잖습니까? J에게 부른 가수…”

“이 사람아 남은 가뜩이나 골머리 아파 죽겠는데 농담하지마! 가수 이선희가 무슨 시의원에 나가나? 그리고 어리잖아?”

“어리다뇨? 그래도 대학을 졸업했으니까 나이는 어리지 않을걸요? 요즘 연예인 중에 제일 뜨고 있고, 또 스캔들도 전혀 없고…아무튼 그 가수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아주 인기 좋습니다.”

“설령 그렇다 해도 그 사람이 마포와 무슨 상관이야?”

“왜요? 강변가요제 출신이잖아요. 마포가 바로 강변지역 아닙니까?”

“참내…둘러대기는…거 골치 아파 죽겠는데 농담 그만하라구!”

나는 그냥 흘려듣고 다시 당사로 들어왔다. 그런데 농담하지 말라며 흘려 듣긴 했는데 자꾸만 총무국장 말이 떠올랐다. 이선희라! 나는 일단 고등학교 동창 중에 연예 담당PD로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선희라는 가수 알아?”

“그럼! 요즘 아주 잘 나가는 가수다! 그런데 왜?”

“아니, 그냥 좀…그런데 그 사람 똑똑해? 어디 살아?”

“아니 밤중에 홍두깨라더니…아무튼 호평 받고 있는 가수야. 꽤 똑똑한 편이지…어디 살고 있는 것까지는 모르고, 필요하다면 알아봐서 연락할게.”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시작하자 처음 선입견과는 달리 이외로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바로 나는 이선희 씨가 공연 중인 한 장소를 찾아 공연 모습을 지켜봤다. 잠시 후 약속장소에 이선희 씨가 나타났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아이쿠!’소리가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무대에서 볼 때는 몰랐는데 어쩌면 그렇게 작고, 여려 보이기만 하는지 흡사 ‘불면 날아갈 것은, 다가오는 지자제 선거에서 우리 당 공천을 받아 나갈 의향이 없으신지 그것을 얘기하고 싶어서입니다.”

일단 나는 말을 던져놓고, 이번 지자제 선거의 중요성과 올바른 지방자치를 이루자면 여성의 섬세함과 여성의 특성이 많이 필요하다는 점 등을 설명했다. 한참 동안 얘기를 하는데 듣는 표정이 여간 진지한게 아니었다. 일단은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이제는 한 술 더 떠 아주 당차다 싶을 정도로 묻는 게 아닌가.

“말씀은 충분히 잘 알아 듣겠습니다. 사실 저는 정치란 것은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고, 막상 말씀을 듣고 보니 솔직해 접이 납니다. 일단 몇 가지만 물어보고 싶은 것은…이렇게 아무 것도 모르는 제가 만약 나간다고만 한다면 그 때는 당에서 모든 것을 가르쳐 주고 지원을 해 주시는 겁니까?”

허허…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조직과 홍보는 물론 나아가 ‘자금’지원까지를 모두 포괄하는 얘기임이 분명했다. 과연 주변에서 ‘당차다’ ‘똑똑하다’는 소리를 들을 만 했다. 오히려 그렇게 나오니까 내 입장에서는 더 안심이 되었다.

“자세한 얘기는 차후에 하도록 하고 걱정하시는 부분은 아마 잘 해결될 겁니다. 다만 향후 1개월 동안 일체의 방송활동과 다른 활동은 하실 수가 없을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분명히 해 주셔야 합니다. 정신없이 돌아갈 것이고 또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강도 높은 활동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차피 조직이나 홍보 등의 문제는 당에서 지원해 줄 수밖에 없는 문제고, 문제는 이런 모든 것을 이선희 양이 얼마나 빨리 소화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일단 아버님과 상의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마음은 급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기다릴 수가 없어 나는 다음 날 바로 또 이선희 씨의 아버님을 만났다. 아버님의 입장이야 ‘딸을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지만 걱정이 된다’는 입장이었고, 나는 ‘걱정말라, 잘 할거다’는 말로 안심을 시켰다.

그리고 나서 당 지도부에게 보고를 하고 이선희 씨 공천 여부를 상의했다. 당 지도부 역시 아주 좋은 반응이었다. 잘만 하면 개인의 당선을 넘어 전체 선거 전략에도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겠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리고는 일사천리로 나갔다. 막상 후보등록을 하려보니 호적에 나이가 잘못 기재되어 난리를 한바탕 치른 후, 고향 대천까지 찾아가 증인을 내세우는 한편 치령(齒齡-치아의 年齡)까지 조사 해, 부랴부랴 재판을 받아 겨우겨우 후보 등록일에야 극적으로 등록을 마칠 수 있었다. 그것으로 일단 내 일은 끝난 셈이었다.

이건 작품이라니까요!

막상 보내놓고 나니 내심으로는 여간 걱정되는게 아니었다. 그 앳된 모습으로 과연 잘 해낼 수 있을지…게다가 당시 마포 지구당의 당원들 사이에서는 부정적인 견해도 없지 않았다. 다 좋은데 너무 어리다는 거였다. 그런데 불과 며칠 후 지구당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장의원님! 대성공입니다.! 대성공!”

“뭐야? 무슨 소리야? 차근차근 얘기 좀 해 봐.”

“조금 전에 당원들 앞에서 자기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거든요. 그런데 강당 안이 난리가 났습니다. 아주머니들이 눈물을 흘리고…아무튼 지금 난리가 나 버렸습니다. 역시 장의원님 선택은…이건 완전히 작품이라니까요!”

“그래? 야, 이거 정말 잘 됐구만! 그래 그래…아무튼 잘 지원해 주라구!”

전화를 끊고 나니 나도 여간 기분이 좋은 게 아니었다. 대체 얼마나 잘했기에 저 난리인가 싶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바쁜 와중에 다음 날 시간을 내 유세장을 찾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가 들어봐도 정말 눈물이 나올 정도로 잘 하는게 아닌가! 정치인들의 우세와는 완전히 다르면서도, 조근 조근 얘기를 풀어가는 게 그렇게 설득력이 있을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 어려웠던 시절 얘기며, 연예 활동을 하면서 겪은 어려운 얘기며, 정치를 해 보겠다고 나오기까지의 결심 과정이며…결코 정치적인 애기가 아니면서도 할 얘기는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하고 있었다. 정말 똑똑하고 대단한 아가씨였다.

홍보물 또한 유별나게 멋있었다. 처음 당에서 만들어 준 홍보물을 보더니 ‘이것만큼은 저희들이 해 보겠습니다’ 할 때까지만 해도 ‘그런가 보다’했는데…역시 가수가 다르긴 달랐다. 정치인들의 감각으로는 따라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렇게 잘한다는 소문이 청와대까지 들어가고, 나중에는 김옥숙 씨가 지원 방문을 하기에까지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이선희 씨는 압승을 했고, 시의원으로 의정활동 또한 아주 야무지고 당차게 잘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것을 계기로 이선희 씨 부부는 그 후에도 우리 가족과 아주 친하게 지냈다. 후에 내가 이종찬 씨 경선 선거운동을 하고 다닐 때, 나는 또 급한 마음인지라 시도 때도 없이 불러댔건만 그 때마다 이선희 씨는 말없이 달려와서는 지원 공연을 해 주곤 했다.

그런데 이종찬 씨가 국민회의로 가면서 결국은 이선희 씨도 그 쪽 캠프로 가고 말았으니…우스갯소리로 말하자면 실컷 지워서 남 좋은 일만 시킨 셈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제 1차 지방자치 선거는 이선희의 선전을 계기로 민자당에 등을 돌렸던 젊은 층의 관심을 끌었고, 그런 측면에서 이선희 씨가 당에 기여한 공로 또한 크다 할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선거대책 본부장이었던 나에게도 큰 성공이었다.

한 편으로 당시 선거를 치르면서 나는 원칙을 하나 세웠다. 가뜩이나 여당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은데 그러면 그럴수록 철저히 ‘공명선거를 하자’는 것이었다. 관건선거 운운하는 말이 아예 나오지 않도록 하자는 생각에 안기부나 기관장들에게 직접 요청을 하기까지 했다.

“선거는 우리가 치릅니다. 일체 관여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 과정에서 선거법 위반 사례가 나오면 우리가 먼저 나서서 잡아내고, 구속 등과 같은 법적 제재를 받는 일에도 솔선수범을 보였다. 당에서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입장이 없지 않았지만 나는 아무튼 시종일관 강하게 밀고 나갔다. 나는 적어도 이 부분에 관한 한 지금도 공명선거였음을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래서였을까. 당의 회의적인 분위기와 불안감에도 불구하고, 민자당은 제1차 지방자치제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했다. 서울 지역같은 경우 거의 90%이상이 당선되었으며 호남 지역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압승하는 쾌거를 올렸다. 3당합당을 통한 국회의원200명을 가진 거대 여당의 물리적 기반이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그랬으니 선거대책 본부장이었던 나에 대한 찬사가 터져나오는 건 당연했다. 하루 종일 나는 여기저기에서 축하인사를 받기에 바빴다. 대통령의 격려 전화까지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저녁, 나의 상기된 기분에 찬물을 끼얹는 전화 한 통이 왔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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