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숭호 뉴시스 논설고문.
 ‘소통’. 이 두 글자가 언론에 안 비치는 날이 거의 없다. 지난해부터 그랬다. 앞이나 뒤에 반드시 ‘박근혜 대통령’이라는 글자와 함께 등장한다. 박 대통령이 없었다면 이 단어가 지금처럼 각광받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 6일 ‘소통을 위해 마련된’ 대통령 기자회견을 두고도 그랬다. 한쪽에서는 이 회견에서 대통령이 소통의 장을 마련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한쪽은 대통령이 불통임을 다시 확인했다고 코웃음을 쳤다. 이 정도면 소통이 무엇인지, 어떤 소통이 좋은지 정의 내리기 위한 소통의 장도 필요할 것 같다.

제일 좋은 소통은 ‘이심전심(以心傳心)’일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상대가 알아주는 경지의 소통이다. 서정주가 시 ‘무등을 보며’에서 보여준 ‘지어미는 지아비를 물끄러미 우러러보고/지아비는 지어미의 이마라도 짚어라’의 부부처럼 지극한 사이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불교의 ‘염화시중(拈華示衆)’도 ‘있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뜻이 통하는’ 소통이다. 덕 높은 고승과 마음 맑은 제자들 사이에서만 가능할 것만 같은 염화시중의 미소는 겨울 깊은 계곡을 덮은 두꺼운 얼음장도 깰 만큼 따뜻하리라. 이런 소통 역시 세속에서는 바라기 어려운 것이다.

요즘 화두가 되는 소통은 고향 친구의 표현을 빌리면 ‘제 팔 제가 흔들기’식 소통이다. 똑똑하지만 고집 센 그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도 무슨 논쟁이 오래가면 ‘지 팔 지가 흔드는 거 아이가?’라고 결론 내리고는 말문을 닫아버린다. ‘너는 네 팔 흔들고 나는 내 팔 흔들 듯 대화도 너는 네 말하고 나는 내 말만하는 것 아니냐. 이제 그만하자’는 걸 이렇게 표현했다. 대통령이 소통을 하지 않는다는 사람들의 주장은 대통령에게 ‘만나서 내 팔 흔드는 것만 보여주겠다’는 것 같고, 대통령과 주변 사람들은 ‘만나봤자 내 팔 흔드는 것 외엔 볼 것도, 보여줄 것도 없다’는 생각인 것 같다.

소통을 쉽게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빚어진 건 아닐까. 새우리말 큰 사전은 소통을 ‘서로 사이에서 의견 따위가 잘 이해되어 흐리터분한 점이나 오해 따위가 없이 잘 통함’이라고 풀이했다. 서로가 흐리터분한 점이나 오해가 없을 정도의 사이가 된다는 건 이해당사자들이 같은 생각을 갖게 되고 나아가 같은 편이 된다는 것인데 이게 쉽다고 생각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그리고 그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사람은 또 얼마나 있을까? 열심히 소통하면 새누리당과 민주당, 통진당이 한 편이 되고 박 대통령과 문재인 의원과 안철수 의원, 나아가 이석기 의원이 한 편이 될 수 있을까? 가능하지도 않겠지만 바람직한 건 더욱 아니다. 소통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그런 걸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양성이 풍부한 생태계가 건강한 생태계이듯 사회도 다양성이 풍부해야 건강해진다.

애초에 소통보다는 ‘양보와 타협’이 쟁점이 됐으면 어떠했을까. 소통을 하자는 건 막연한 걸 요구하는 것 같은 반면 양보와 타협은 구체적인 것을 요구하는 것이기에 차라리 더 솔직하게 대화가 진행될 수 있지 않을까. 소통을 위해 만나자고 하는 것보다 양보와 타협을 위해 만나자고 하는 게 더 진일보한 대화법일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지난해 소통 잘못으로 고생한 사람은 축구선수 기성용이다. SNS에 자신의 심경을 솔직하게 밝혔다가 숱한 비난을 받고 많은 안티(ANTI) 팬이 생겨나기도 했지만 최근 들어 뛰어난 실력을 발휘, 다시 좋은 평을 듣고 있다. 소통보다는 실력 혹은 실적이 중요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대통령이나 대통령을 싫어하는 사람 모두 소통보다는 실력이나 실적을 키우는 편이 어떨지? 대통령은 국가발전에 매진하고 반대편은 수권세력으로서의 능력을 키우는 게 그것 아닐까.

*억지사지는 ‘억지로 역지사지(易地思之)하기’를 줄인 것입니다.
정숭호 뉴시스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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