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승국 법무법인 로고스 변호사
어느 도시에 경쟁관계에 있던 장사꾼 두 사람이 있었다. 이들은 아침에 눈뜨고 일어나 밤에 잠들 때까지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망하게 할까 하는 데만 신경을 썼다.

보다 못한 하느님께서 어느 날 천사를 한쪽 상인에게 보내셨다.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고 천사는 이런 제안을 하였다.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큰 선물을 내릴 것이오. 그대가 재물을 원하면 재물을, 장수를 원하면 장수를, 자녀를 원하면 자녀를 줄 것이오. 단 조건이 하나 있소. 그대가 무엇을 원하든 그대 경쟁자는 두 배를 얻게 될 것이오. 그대가 금화 10개를 원하면 그는 금화 20개를 얻게 될 것이오.”라고 말하였다. 천사의 말을 들은 상인은 한참 생각하더니, “제가 무엇을 바라든지 다 그렇게 이뤄진다는 말씀이지요?”하고 물었다.

천사가 그렇다고 하자 상인은 크게 숨을 쉬고는 결심한 듯이 말하였다. “그럼 제 한쪽 눈을 멀게 해주십시오.”(송봉모 신부의 책 ‘상처와 용서’에서)

상대가 얼마나 미우면 자기가 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자기 눈 하나를 희생해서라도 상대의 두 눈을 멀게 하려는가?

사람이 누구를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가를 보여주는 예화이다. 재판을 하다보면 상대에 대한 미움이 지나쳐 무리한 고소를 남발하다 무고죄로 처벌받고, 그럼에도 또다시 고소를 계속하는 사람, 조금 양보하여 화해하고 빨리 자신의 일에 전념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권유하여도 계속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가겠다는 사람,

상속 재판에서 서로 조금씩 양보하여 형제간의 우애를 회복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냐고 권유함에도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법정에서 서로 으르렁거리는 형제 등을 많이 본다.

이들은 상대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굴종이라고 생각하고 어떻게 하든 재판에서 이겨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누구를 용서한다고 한다면 그 사람에게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그 사람의 잘못을 사하여 주는 것이라고만 생각을 하기 싶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해보자. 용서라는 것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가? 위와 같이 용서를 모르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 사건에만 집착하여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다른 일은 못하고, 여기에만 집착을 하다가 건강까지 해치는 경우가 많다.

오죽하면 ‘화병’이란 말이 국제적인 정신의학 용어로 굳어질 정도이겠는가?

송봉모 신부는 가슴에 가득 차 있는 적개심·분노·화는 우리의 몸과 영혼을 죽이는 독소들이라고 한다.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자신 안에 가득찬 바로 이러한 독소를 배출하는 제일 좋은 방법이다.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 ‘일흔 일곱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하신 말씀이다. 지금 미움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가?

지금 당장 미움을 내려놓고 용서하자.

그래서 미움과 분노의 굴레에 묶여 고통 받고 있는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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