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공원에서 열린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 기념탑 제막식'에서 이종찬 우당장학회 이사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
이종찬을 대통령으로!

정치에 들어온 후 나는 모두 세 번의 대선을 치렀다. 첫 번째 87년도의 대선 때에야 내가 잠시 정치를 떠나 있다가 복귀하기 위해 안산을 뛰어 다닐 때였으니까 대선 과정에 그렇게 휘말릴 일도 없었다.

또 따져보면 바로 얼마 전의 97년 대선의 경우 역시 결과적으로 놓고 보면 그래도 한발 빠져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92년 대선은 달랐다. 물론 정치인이니까 어떤 식으로든지 대선바람을 피해 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맞이했던 그 바람은 굳이 표현하자면, TNT 백만톤의 폭발력에 해당한다는 메가톤급 태풍이었다고나 할까. 그것도 그저 내 앞으로 불어오는 것까지는 좋은데, 아예 그 한가운데로 끼여 들어가 회오리치는 속에 서 있는 꼴이 아닐 수 없었으니 그 충격과 여파를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정작 대선의 ‘주자’도 아닌 사람이 그랬으니 이제 와서 생각하면 참 어처구니 없다 싶기도 하다. 어떻든 나는 92년의 대선을 기점으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정치의 길로 들어서야 했으니 그것은 내 정치인생의 크나큰 모험이자 일종의 혁명이었다.

보이지 않는 전쟁

지방자치 선거가 끝나자 당내에서는 바로 대선을 향한 이른바 ‘보이지 않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가시화된 것은 잘 알고 있듯이 월계수회를 이끌고 있던 박철언씨와 김영삼 씨의 상호 견제와 갈등이었다. 드디어 김영삼 씨가 소련을 방문했을 때 그 갈등이 최초로 터져 나왔다.

당시 박철언 씨는 정무장관으로 김영삼 씨의 소련 방문에 함께 수행했다. 그런데 코스코바에서 김영삼 씨는 일방적으로 자신의 루트를 통해 고르바쵸프와의 만남을 성사시켰다. 다분해 대선을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북방외교의 주역으로 평가 받던 박철언 씨는 자신이 전혀 몰랐던 이 사실 앞에서 불쾌감을 표현하기에 이르렀고, 국내에 돌아와서까지 서로 언론에 이런 저런 정보를 흘리며 상대방을 거의 공개적으로 견제하는데까지 이르렀다. 그 때부터 만인이 봐도 다 알 수 있는 ‘불편한 관계’가 시작되었다.

당시 부총장을 맡고 있었던 나는 아무래도 젊다 보니까 박철언 씨와 자주 만났고, 정무장관으로서 내 추진력을 항상 격려해 주는 입장이었으며, 또 의사가 잘 맞아 아무튼 이래저래 잘 통하는 사이였다. 그런 입장에서 두 사람의 당내 표정관리부터 시작해 언론 플레이까지 낱낱이 지켜보자니 난처한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보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볼 때 박철언 씨는 아주 차갑고 냉정한 사람이다. 특히 회의석상에서 김영삼 씨를 향해 정색을 하고 포문을 열어놓을 때면 듣는 나까지도 서늘할 정도였다. 그러면 김영삼 씨는 아예 못들은 척 옆 사람과 다른 얘기를 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 자리를 넘기곤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견제가 심해지면서 드디어 김영삼 씨가 당무를 거부하고 상도동에 칩거하는 사태로까지 비화되었다. 그에 때맞춰 언론과 여론은 박철언 씨가 대통령의 ‘친인척’임을 지적하며 견제하는 목소리가 높아져 갔다.

그러자 당내에서도 ‘박철언 씨가 너무 심하다’는 분위기로 돌아섰고, 결국 중진들의 건의에 의해 박철언 씨가 정무장간을 사퇴하고 제 2선으로 물러서는 선에서 당장의 갈등은 해소되는 듯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결국 훗날 박철언 씨는 김영삼 씨의 집권과 함께 감옥에 가는 상황이 벌어졌으니 두 정치인의 갈등관계는 꽤나 비극적으로 마감된 셈이다.

<다음에 계속..>

저작권자 © 시사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