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중원 변호사

나는 여태껏 기독교 개신교 교회 또는 천주교 성당에 나가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불교 사원에도 종교적 목적으로는 가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내가 유대교도이거나 무슬림일 리가 없다. 그러면 나는 무신론자인가? 유일신 (유대교에서 말하는 야훼나 기독교의 하나님, 무슬림의 알라신 말이다)을 배척할 이유가 있는가? 특히 기독교의 하나님을. 기독교는 나와 가장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이 신 없이도 살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 제기를 한다. 그러니까 인간의 삶에서 신은 실존의 조건이 되는 것인가? 그런데 모든 종교는 예외 없이 각기 고유의 신을 가지고 있으므로 (따라서 자신의 신이 없는 종교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모든 종교인은 유신론자라고 할 수 있지만 무슨 종교가 없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무신론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경우처럼 인간들은 각자의 신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유일신을 믿는 종교들이 이 세상 곳곳에 전파된 사실 (이슬람교의 경우만 보더라도 전 세계 신자의 수가 16억 명을 넘어서고 있지 않은가)을, 그렇게 많은 사람을 개종시킨 사실을, 그들 종교가 그토록 성공한 사실을, 지금도 나날이 번성하고 있고 그 종교적 권위가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고 있는 사실을, 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피비린내 나는 투쟁을 전개한 사실을, 잔혹한 폭력과 악행, 피도 눈물도 없는 비열함, 피를 부르는 싸움, 전쟁의 원인이 바로 유일신을 믿는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유일신을 부정한다고 해서 그렇다고 해서 무신론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타협의 여지가 전혀 없는 무신론자가 아니다. 솔직히 고백하건데, 나는 세상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신은 없고, 신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은 없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으니 의심할 나위 없이 독실한 범신론자이다.

체스터 턴은 ‘사람들은 신을 더 이상 믿지 않을 때, 사람들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믿는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나는 유일신을 믿지 않게 되면서 무수하게 많은 모든 신을 믿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신들이 없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두렵다. 내가 신들의 존재를 믿기까지는 가혹하고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말이다. 아무리 첨단 과학과 테크놀로지가 발달해도 이 세상과 우주는 여전히 불가해한 경이와 신비, 공포, 광기, 미신으로 가득 차 있으니 누가 감히 신들이 없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나는 생명 현상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격렬하게 요동치는 것― 이 세상을 지탱하는 기본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미만해 있는 모든 생명체에는 자신 속에 신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 생명력이 바로 신적이거나 신 자체인 것이다. 모든 생명체 속에 신이 들어있지 않다면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신은 그 생명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자연선택설에서 말하는 유연성을 능굴능신能屈能伸하게 발휘하는 것이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이 가치 있고 아름다운 이유는 살아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생명력에는 아름답다는 느낌, 경이롭다는 느낌, 수수께끼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우리는 약동하는 생명의 힘 속에서 기쁨과 평화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살아있는 모든 것에서 경외감을 느낀다. 삶을 넘실거리게 하는 생명에 대한 외경심 없이 어떻게 이 험난한 인생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생명은 마지막 순수이고 인간의 지성이나 상상력으로는 꿰뚫어 볼 수 없는 어떤 신비스러운 현상이기에 신성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생명의 파괴를 시도하는 것, 살인의 광기 그것보다 더 큰 부도덕성, 인간 사회의 부조리를 상상할 수 없다. 이 지구는 오직 인간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아담은 안식일 저녁에 만물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창조된 것이 아닌가. 하찮은 벌레인 모기까지도 인간보다는 먼저 창조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만을 위한 세계를 만들려고 시도한다면 우리 역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슬람의 이교도, 이슬람의 주정뱅이, 그러나 진정한 신비주의자인 수피교도들도 역시 유일신인 알라신을 믿으니까 범신론자는 아니다. 그들 스스로 범신론을 부인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어디에서나 신을 본다. 천지사방에는 생명체가 가득하니까 도처에 신의 흔적이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신은 진정한 모습이며, 스스로 존재하고 개체를 초월해 있으며, 신성하고 불변하며, 자유로우며 파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신이란 신이기 때문에 설명이 불가능하고 이해가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카프카는 ‘신과 말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을 것이다. 물론 그 신은 내가 말한 신이 아니라 다른 신이긴 하지만.)

 

그러므로 리처드 도킨스 같은 진화생물학자가 신의 존재를 부인할 뿐만 아니라 종교란 진화적 적응이 아니라 진화적 부산물에 불과하여 정신적 바이러스, 정신적 기생충 또는 해로운 기생충이라는 그의 과격한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그 신은 생명력이 그 본질이긴 하지만 그러나 인격신도 아니고, 위대하지도 않고, 절대적인 신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숭고한 영성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 내가 종교인이거나 신앙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신의 존재를 확신한다고 해서 외경의 감정을 갖고 나아가 그것에 수반하는 의식, 행사에 참여하고 어느 이상한 교단에 소속된 적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유럽 쪽에서, 가령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면 틀림없이 성당에 열심히 다녔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일상생활에서 굳건한 관습이고 오래된 문화의 일부이니까. 그리고 교리에는 회의적이었겠지만 경건한 의식과 음악만은 좋아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의 범신론적 견해에 따라) 신의 속성이 생명력이고 시간과 영원 속에 영원히 꺼지지 않고 존재하는 불멸성 immortality에 있다고 본다면, 온갖 생물은 모두가 영구불변하는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모두가 신을 가지고 있거나 신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왜, 어째서, 그 신이 인격적 존재여야하고 만물의 창조주이고 전지전능해야만 할 것인가?

그러나 유일신은 위대하고 절대적이고 전지전능한 인격신이다. 그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신이 눈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직접 또는 신의 섭리에 의해 이 세상을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통제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리처드 루벤스타인은 아우슈비츠에서 홀로코스트를 경험하고 나서야 인류의 역사를 움직이는, 정의나 윤리 또는 인간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이는 인격적인 신은 존재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도스토앱스키는 ‘만약 신이 없거나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그 신의 존재를 역설한 것이다. 반면에 엘리 위젤은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신이 죽었다고 믿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신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다.’라고 반박했다. 나는 그 신을 믿지 않는 처지이므로 이 말이 타당하다고 본다. (우리는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북한의 김일성과 그 아들, 손자에게서 그 현저한 예를 똑똑히 목격할 수 있지 않은가.)

나는 그 신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큰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저편의 무엇인가를, 훨씬 더 위대한 무엇인가를 믿고 싶다.

그런데, 우주 전체를 포괄하는 원천적인 법칙, 다시 말하면 ‘세계 공식’ 또는 ‘만물의 이론’을, 그러니까 (무릇 ‘왜?’라는 질문이 궁극적으로 소멸하는 이론인, 아인슈타인이 생애 말년에 머리를 싸매고 추구했었고 지금도 세계적 물리학자들이 찾기를 열망하는) ‘궁극의 이론 ultimate theory’을 인간들이 찾아낼 수 있을까. 그건 모든 생명체를 포함한 우주의 모든 것의 존재 법칙을 궁극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므로 신들의 신, 최고의 신일 것이다. 그 신은 우주의 지배자인 황제이고 그 왕권을 상징하는 홀 笏을 손에 쥐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끝내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불가해한 블랙 물질이 지배하는 우주는 광대하고 무한하고 변화무쌍하므로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알아야 하리라. 진짜 전지전능한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만이 4차원 또는 10차원 그 이상의 공간으로 이루어진 우주 설계도를 알 수 있지 않을까.

 

(범신론자 혹은 다신론자인) 에피쿠로스는 일찍이 말했다. “신들은 존재한다. 그런데 그 신들은 전혀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들은 자신들의 안위와 기쁨 이외에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신들은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 신들이 잘못을 행한 사람들에게 벌을 내리고 착한 사람들에게 보상을 해주는 일로 고민하리라고 상상하는 건 참으로 어리석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러니 신들에 대해서는 전혀 두려워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 세계를 설명키 위해 신을 끌어들일 필요는 전혀 없다.”

그랬으니 위대한 유일신을 섬기는 기독교는 에피쿠로스를 신앙의 가장 위험한 적으로, 영적 지혜를 위해 극복해야 할 적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기독교는 자신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 무슬림이나 유대교도를 이교도로 간주하여 배척하고, 범신론자 역시 무신론자와 똑같이 취급하고 배척한다. (그건 유대교도 이슬람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나 역시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무신론자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유일신을 믿는 자들은 범신론자를 이교도 또는 회의론자, 신성 모독자, 신실하지 못한 자, 무신론자, 범죄자, 저주 받을 자로 죄악시한다. 그래서 지옥의 불구덩이 속으로 떨어져야 할 자로 낙인을 찍었다. 그들은 말했다. “지옥에 떨어진 자들은 불구덩이 속에서 활활 태워지지. 불의 호수에 깊이 잠길 것이다. 오! 고통이여!, 고통이여!, 고통이여! 형용하지 못할 고통이여!, 상상하지 못할 고통이여!, 끝없는 고통이여!”

지옥은 범신론과 그들의 종교를 가르는 핵심 교리였던 것이다. 그들은 지옥 풍경 The sight of hell에서 지옥을 불타는 송진과 유황이 흐르고, 곳곳에서 불꽃이 튀며, 불길이 안개처럼 드리워진 곳으로, 깊은 구덩이, 붉게 달궈진 쇠로 만든 바닥, 뜨거운 인두, 팔팔 끓는 솥, 불꽃이 타오르는 오븐 속에서 각기 다른 고문들이 행해지고, 고통에 짓이겨진 영혼들은 사자처럼 울부짖으며, 뱀처럼 쉭쉭 거리고, 개처럼 짖어대고, 용처럼 울어댄다고 묘사하였다.

(그러므로 가톨릭 교리에 심각한 회의를 품고 사제복을 벗어버린 사람, 범신론적 세계관에 빠져 종교재판을 받고 화형에 처해졌던 조르다노 브루노 Giordano Bruno를 기억해야 하리라. 그는 시뻘겋게 달군 칼이 살을 파고들어 살을 찢을 때에는 터져 나오는 울음을 집어 삼켰고, 그의 코를 자를 때에는 어깨를 조금 으쓱 했으며, 그의 오그라든 남근을 뽑았을 때에는 앓는 듯한 긴 신음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그의 몸은 마지막에 불태워졌고 남은 재는 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이 세상엔 절대 진리도, 절대 신도 있을 수 없는데도 유일신을 믿는 자들은 그 신만을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여기고 그것을 비판하거나 혹은 부정하는 것은 절대로 용서 받지 못할 신성 모독으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맑스 레닌주의 역시 붉은 교회의 종교적 교의로 변신해서, 권력이 신격화 되면 권력은 저절로 자신의 고유 종교를 만들어 내니까 그에 대한 비판은 신성 모독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의 짧은 식견으로는 예수가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그 순간부터, 혹은 성령에 의해 잉태되어 태아로 형성된 어느 단계에서부터 곧 하나님이라는 (그러니까 핏덩이가 신이었다는) 기독교 교의와 소위 삼위일체설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아예 이해조차 할 수 없다. 그러니, (유명한 교회의 집사인 친한 친구가 늘 교회에 나와 용서받으라고 권했지만) 어떻게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마호메트(무함마드)처럼 진지하게 자신은 신이 아니라 일개 하찮은 인간에 불과한 존재라는 걸, 그래서 육욕을 억제할 수 없어서 10여명의 여자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러나 마지막 위대한 예언자로서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알라 신의 말씀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면 이 얼마나 솔직 담백하고 모순이 없는가.

히브리 민족은 인간의 한계를 훨씬 초월했던, (이집트인에게 열 가지 끔찍한 재앙을 내리는 권능을 가졌던) 신적 인간인 모세마저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 즉 예언자로 여겼지 신으로 간주하지는 않았고, 예수에 대해서도 ‘현명한 사람’ 또는 ‘진리의 친구’라고 하였지 신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인간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여기서 히브리 민족의 비범한 통찰력과 날카로운 지성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붓다는 최고신을 인정하지 아니하였다.

“만일 세상이 이쉬바라 신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슬픔이나 재난 같은 것은 없어야 할 것이며, 선을 행하거나 악을 행하는 것도 없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순수한 행동과 불순한 행동 모두가 이쉬바라 신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 만일 이쉬바라 신이 창조주라면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인내를 가지고 창조주의 권력에 묵묵히 굴복해야 할 것이니, 선을 행할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선을 행하든 악을 행하든 똑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보다시피 이쉬바라에 대한 생각은 이렇듯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붓다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나 독생자에 대해 무관심하였다. 다만 바른 지식을 향해 다가가는 자기 노력에 의한 방법밖에는 인간을 구원할 다른 방법이 없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이방인(나는 로마인을 말한다.)들이 유독 예수를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으로 만들었다.

하나님은 ‘나는 시작이요, 마감이다. 나밖에 다른 신은 없도다.’ (이사야 44: 6)이라고 하였는데, 예수도 하나님이고 하나님도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두 사람이나 있는 게 아닌가.

신의 본질적 특성인 즉, 불사불멸인데 인간은 필사필멸이 아닌가. 예수가 신이라면 어떻게 해서 자기 제자의 밀고에 의해 그따위 나무 십자가에서 허망하게 죽을 수가 있었겠는가.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예수는 지극히 사소한 것이라도 단 하나의 인간적인 죄, 인간적인 과실을 지은 사실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가 인간이면서도 죄와 과실을 지을 수 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커다란 모순이 아닌가. 누구의 말마따나 인간성과 (신의 속성인) 무죄성, 또는 무오류성은 서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성모 마리아가 동정녀였고 오로지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하였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요셉은 예수의 아버지가 아니다. (그의 정액에 의해 예수가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의붓아버지일 뿐이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어머니는 성모 마리아이지만 요셉은 성부가 아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왜 어떻게 해서 성모 마리아가 아니라 아무 혈연관계도 없는 요셉의 혈통을 추적하고 가계도를 나열하고 있는 것인가.

왜, 이 문제 때문에 전통과 이단이 뒤섞여서 혼란인 것인가.

그러므로, 말씀은 하나님을 뜻하고 그 말씀이 인간의 육체를 취하여 지상에 내려왔다면 (소위 육화를 말한다.), 하나님 아들인 예수는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물질적인 육체와는 결코 결합할 수 없는 존재이고, 단지 외관상 육체의 형태를 취한 오로지 신이라는 주장 (예수의 인간적 속성을 부정한 가현설 假現說)이 타당하지 않을까. 간단명료하고 솔직해서 우리 같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는 삼위일체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보기에 예수는 온전한 인간에 불과하였다. 다시 말하면 예수는 인간이지만 가끔 신성이 깃들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서기 431년 그는 예수가 영구불변의 신성을 가지고 있지 않고 이중적인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른 것은 온당치 않다는 것이다. 그는 말했다. “나는 어린 소년인 하나님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이단으로 배척되어 아시아 쪽으로 쫓겨 갔다.

 

그렇다. 예수는 순수한 인간일 뿐이다.

예수의 생애를 돌이켜보면 알 수 있다. 예수는 BC 4년 헤롯 대왕이 죽기 직전에 탄생하였다. (그러나 정확한 탄생 일자는 확정할 수 없다.) 성경은 법적 아버지 (또는 의붓아버지)인 목수 요셉을 돕는 12세의 예수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가 약 30세가 되던 때부터 공적 사역을 시작했고 그 사역은 3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33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12세부터 30세까지 18년 동안 예수는 그 자취를 잃어버린다. 이것이 예수의 공백기 the lost years of Jesus의 문제이다. 그는 그 기간 중 어디서 무엇을 하였던가.

정통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강력 배척한 (윤회론자인) 그노시스파는 인간 예수가 그때 인도로 가서 브라만교 성직자로부터 베다 경전을 배웠고 그 후 불교로 옮겨가서 불교 경전을 공부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윤회 철학을 받아들였고 그곳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 결혼하고 함께 이스라엘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예수의 나이 29세 때였다. (또는 그때 예수는 아프리카나 이집트에 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예수가 신이라면 이 기간 동안에 예수는 무엇을 하였다고 추론할 수 있을 것인가.

또, 예수가 인간이 아니었다면 (의심하는) 도마한테 인간의 상처를 만져보라고 말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푸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지 않으냐?” 이렇게 말하고는 손과 발을 그들에게 보였다. (누가복음 24장 36~43절)

그런데 그 당시 로마의 역사가인 타키투스는 본디오 빌라도의 명령에 따라 예수를 사형시킨 상황을 꾸밈없이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역사적 사실임에 틀림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의 부활에 대해서는 도저히 그 진위를 밝힐 수 없을 만큼 너무나 이설이 많다. 그러니까 서기 495년 겔라시우스 교령에 의해 이단으로 금지 된 위경僞經 복음서인 ‘도마행전’에 의하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그때 어떤 이유로 죽지 않았고 (그러니까 죽고 나서 부활한 것이 아니라 당초에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16년 뒤인 기원 후 49년에 도마와 함께 어떤 결혼식에 참석하였다고, 주장하였지 않은가.

그노시스파는 공개적으로 그런 사실을 토론했고, 교황 요한 23세는 ‘기독교 신앙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며,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가 프랑스의 렌 르 샤토 지역에 정착해서 일곱 아이를 낳고 89세까지 살았다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

그런데, 예수는 그때 인류의 죄 때문에 죽었다고 하지만, 왜, (더욱이 기독교의 운명 예정설에 의하면) 인간은 각자 미리 정해진 자신의 운명에 따라 삶을 살아갈 책임이 있는데 예수가 다른 사람의 운명까지 떠맡아야 할 것인가.

부활과 관련해서는 또 하나 의심스러운 사실이 있다.

식물이건 동물이건 모든 생물은 반드시 죽는다. ‘생 生’ 속에는 필연적으로 죽음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했다. ‘만물은 유전하며 머물러 있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그렇다면 예수는 인간이었다. 예수는 죽었다.) 그런데 인류가 450만 년 전에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수십억의 인간이 태어나서 죽었는데 오직 한 사람만 부활했다는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수십억분의 일. 정말 기적이 일어난 것일까. 2,000년 전 골고다 언덕에서 일어난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적. 예수가 부활했다는, 암흑의 시대인 2,000년 전의 주장이 지금까지 유효하다는 것은 인간 지성에 대한 심각한 모독행위가 될 것이다.

그리고, 왜, 어떻게 해서 (인간) 예수는 로마 가톨릭이나 개신교 교회에 걸린 성화에서처럼 정말 미남이고 근사하게 생긴 33살의 젊은이여야만 하는가. 수없이 반복적으로 재현되는 영웅처럼 너무나 잘생긴 남자. 그들 화가 중에서 누가 예수의 실물을 보기는 한 것인가.

‘그는 메마른 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이라고나 할까?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퇴박을 맞았다. 그는 고통을 겪고 병고를 아는 사람,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고 피해 갈 만큼 멸시만 당하였으므로 우리도 덩달아 그를 업신여겼다.’ (이사야 53:2~3)

나사렛 예수는 역사적으로 부재자不在者가 아니라 실재자實在者이다. 예수는 더할 나위 없이 참 인간이었으니 (그러므로 예수는 하나의 ‘관념’이거나 ‘그리스도 신화’가 아니다.), 심지어 악과 부정을, 간음과 살인을 할 수 있는 그리스 신들처럼 그러한 인간이었다. 영원한 형벌을 받아 한없이 깊은 구렁텅이에 빠질 수 있는 인간이었다. 그는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은 혁명가로서 위대한 인간이었지만 동시에 가난하고 불쌍한 인간이었으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던 것이다.

전통 기독교 (또는 현대 기독교)는 (놀랍게도 예수 자신은 단 한 줄의 글도 남긴 바 없으니) 예수를 만난 적도 없고 예수를 알지도 못하는 로마 시민이고 독창적 신학자인 바울의 인식과 견해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이다. 2,000 여 년 동안의 기독교의 발전을 돌이켜보자면 종교 권력을 넘어 세속 권력까지 쟁취하고 확대‧유지하려고 한 탐욕적인 로마인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교리가 선택‧해석 되었다. 그런데 예수는 누추한 마구간에서 태어나 평생을 맨발로 걸어 다니며 가난하게 살다 죽었는데 그를 찬양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는 왜 그리 거대하고 화려함의 극치인가. (여의도의 순복음 교회나 서초동의 사랑의 교회는 또 어떠한가.)

따라서 기독교는 예수가 창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꿈과 이상은 사라지고 로마인들이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종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초기 가난했던 기독교의 순수성으로 돌아갈 수 없을까. 그러면 나도 교회에 나가 나의 죄들을 고백하고 회개하며 용서를 빌지 않겠는가.

 

그러나 근본주의자들도, 신비주의자들도, 아무도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도대체 증명이 불가능하다. 증명이 불필요할 것이다. 믿으면 진실이 되는 것이다. 오직 왜곡된 믿음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1,500여 년 동안,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철석같이 믿었으니 그것은 진실이 되었다.

어쨌거나 유일신 종교들은 인간의 발명품이고, 아마도 인류가 만든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불신론자 또는 회의론자들이 유일신을 둘러싸고 그 신이 존재하느니 않느니, 그 신은 진즉 죽었다는 등 논쟁을 벌이게 된 것은 그나마 불과 얼마 전 인간의 이성이 눈을 뜨기 시작한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서였다. 그때서야 마녀 사냥과 종교재판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후 종교에 신물 난 세기인 20세기에 태어났으므로 무신론자이기는 하지만 화형식을 면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축복받은 행운인가. 그러나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역사는 반복되고 순환되는데 몇 십 년 후 또는 몇 백 년 후에는 다시 변형된 형태의 종교재판과 화형식이 부활할지를?

가장 최근의, 지금도 진행 중에 있는 기나긴 이라크전쟁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1,000년 전에 일어난 중세 십자군전쟁의 변형된 재판 再版이고 반복 아닌가.

하여간에 나는 (종교를 비극적이고 불행한 형벌,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일종의 강박관념으로, 그래서 종교에서 웃음기, 기분 좋음, 즐거움을 빼앗아 버린) 극단주의자들, 순진한 척하지만 위선과 허위의식으로 가득 찬 이상주의자들, 영웅과 독재자들을 혐오하고, 반영웅적 태도를 취하는 자, 냉소주의자와 회의론자, 불신자, 그들을 더 선호한다.

태생적인 반역자, 배교자 또는 모든 무법자들.

그들은 유일신과 광신적 근본주의자들, 영웅, 완고한 교황과 그 사제들, 왕과 귀족들, 독재자, 정의에 반하는 악법을 집행하는 자들에게 정면으로 맞서서 저항했다. 우리는 그들과 파렴치한 범죄자들을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들은 거대한 악에 맞서 부조리한 사회의 변혁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들이야 말로 (예수님처럼) 진정한 혁명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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