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각한 YS
YS의 반란과 만 천하가 다 아는 ‘민정계’

그 와중에 김영삼 씨는 기회 있을 때마다 ‘내각제는 안된다’는 입장을 천명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이 나라의 상황에서 대통령 중심제만이 살 길이라며 이른바 대권을 향한 발걸음을 한 발 한 발 떼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3당 합당 당시의 합의가 내각제임이 분명했던 만큼 이에 대한 견제가 없을 리 없었다. 그러자 두 번째의 당무 거부 사태가 발생했다. 이번에는 마산이었다. 김영삼 씨의 입장은 ‘이런 식으로 나오면 탈당하겠다’는 것을 전제로 한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나중에는 아예 노태우 씨에게 저돌적으로 부딪히기에 이르렀다. 김영삼 씨의 사활을 건 대선쟁취 투쟁이 중반전에 들어 선 것이다.

그 와중에 결국 노태우 씨가 그런 김영삼 씨의 손을 들어주는 일이 발생했다. 김영삼 씨와의 주례회동을 정식화 한 것이다. 여당 대표가 대통령과 주례회동하는 관례가 이때부터 생겨났다. 이미 내각제 합의는 물건너 갔음이 확실시 되고 있었다.

게다가 또 마침내는 92년 1월 신년 기자간담회를 통해 앞으로 민자당의 대선 후보는 ‘민주적 절차에 따른 경선에 의해 뽑는다’는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합당 당시 200석이 넘는 국회의원 중 불과 50여 명의 계파를 이끌고 있었던 김영삼 씨로선 정말 대단한 정치력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훗날, 끝내는 대통령이 되고야 말았으니 아직까지는 그 고도의 정치력 발휘가 시작도 안된거나 마찬가지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 와중에 도 14대 선거가 다가왔다. 92년은 총선과 대선이 겹치는 숨가쁜 해였다.

나는 이미 당내에서 중진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또 13대 선거에서 무식하다 싶을 정도로 열심히 했던 탓인지 어렵지 않게 당선될 수 있었다. 그런데 민자당은 또 참패를 하고 말았다. 두 번째의 여소야대가 탄생한 것이다.

물론 그 때의 여소야대는 정국을 뒤흔들만큼의 것은 아니었다 여당이 과반수를 조금 못 미치는 수준이었는데, 민주당 역시 90여 석을 차지하는 선전을 했음에도 과반수가 안되었으며. 나머지는 전부 무소속이었다.

그 해는 이상하게 일본에서부터 무소속 바람이 불더니 우리나라까지도 그 바람이 연결된 모양이었다. 아무튼 여소야대라고는 하지만 13대처럼 일대 혼란이 일 정도는 아니었고, 무엇보다 여당은 물론 모든 정치인의 관심이 다가오는 대선으로 집중되어가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그 총선이 나에겐 하나의 시작이었다.

선거를 치르다 보면 당 지도부이 지원 연설이 있다. 그런데 내 지역구에 김영삼, 김종필, 박태준 씨 등의 세 대표최고위원이 서로 오겠다고 연락들이 오기 시작하는데 참 나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는 이미 대권을 향한 계파간의 갈등이 시작된 터였다. 그러자 그 동안 물 밑에서 흐르던 계파의 흐름이 ‘언제 한 식구였냐!’는 듯, 서서히 물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으니…나 또한 원하건 원하지 않건 그 흐름에 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는 만천하가 다 아는 ‘민정계’였던 것이다. 그것도 11대부터 민정당이었으니 골수 민정계라고나 할까

그렇게 되다보니 나는 자연히 김영삼 씨의 지원유세가 난처해지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나는 ‘나는 걱정 마시고 다른 지역구 지원에 신경쓰시라’거나 ‘시간이 안 맞는다’ 어쩐다 하면서 회피했다. 그 와중에도 박태준 씨는 두 번이나 지원유세를 다녀갔고 김종필 최고위원이 한 번 다녀갔다.

사실 박태준 씨는 내가 11대 때 재무위원장을 지낸 터여서 인연이 오래되었고 그런 저런 인연이 겹쳐 당내에서도 가깝게 지내던 터였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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