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자동 사랑방 주민자치단체는 협동조합을 조직, 한 달에 46만원의 기초수급비만 받아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1억원을 모을 정도로 성공적인 자활 케이스를 보여주고 있다.
450여명 1인당 기초수급지원금 46만원으로 사업 1억원대 모아

지하철 1, 4호선 서울역 11번 출구를 나와 후암동 방향으로 난 경사길을 오르면 대로 양옆으로 30층 안팎의 초고층빌딩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한때 호사가들은 이 빌딩들이 일구어낸 하늘선을 바라보며 "제2의 강남이 될 것"이라고 했다.

'한다, 안 한다'를 오락가락하던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이 지난해 백지화로 일단락됐다. 그런 소린 쑥 들어갔다.

용산개발을 통해 '대박'을 꿈꾸던 사람들은 탄식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이들도 있다. 스카이라인의 후면, 동자동 쪽방촌에 거주하는 주민들이다. 이들은 용산개발이 본격화되면 뿌리내린 곳을 떠나야 한다는 불안감에 가슴을 졸여야 했다.

올겨울 들어 가장 춥다는 9일 정오를 코앞에 두고도 수은주는 영하 8도를 가리켰다. 초고층빌딩들의 옆구리 사이로 빠져나온 겨울바람이 빈자(貧者)의 거리를 사정없이 휘감았다.

서울역쪽방상담소의 현황 자료에 따르면 동자동에만 54개의 건물에 1049개의 쪽방이 있다. 1~2평 남짓한 쪽방 하나에 1명씩 산다고 치면 유례없는 인구밀도가 아닐 수 없다.

대개 지은 지 30~50년 된 건물들은 선뜻 보면 중구난방이었지만 벽이 무너지면 나무를 덧대고, 창문이 깨지면 비닐을 쳐 바람을 막는 것은 공통된 인테리어였다.

망치로 툭 치면 그대로 허물어질 것 같은 건물. 그 안에 늘어선 수십 개의 쪽방은 철저히 개별적인 공간이다. 요즘 같은 겨울이면 화장실과 세면장을 빼면 이웃 간에 마주칠 일도 드물단다. 고독사는 바로 옆방에서 이뤄지는데, 시체 썩는 냄새로 뒤늦게 확인된다.

동자동 쪽방촌은 한국전쟁 직후 가난한 이들이 판자를 엮어 거처를 만들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반세기를 넘는 세월 동안 높아져가는 주변 건물들 속에서 곪은 상처처럼 남아있었다.

서울역쪽방상담소 정수현 소장에 따르면 900명 안팎으로 추산되는 주민들의 53%가 기초생활 수급자이다. 나머지는 일용직이거나 겨울철 추위를 피하기 위해 15만~25만원의 월세를 감수하고 찾아드는 거리노숙인들이다. 80% 이상이 홀로 사는 남성이며 50~70대가 역시 전체 주민의 80%를 넘는다.

언제까지나 가난이 고착화될 것 같은 이곳에서 최근 수년 사이에 자활의 움직임이 꿈틀거리고 있다. 후암로 91-5에 자리 잡은 동자동 사랑방이 그 진원지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새해 첫날 이곳을 찾은 뒤 틈만 날 때마다 이곳 얘기를 했다.

박 시장은 "동자동 사랑방이라는 주민자치단체에서 조직한 협동조합이 있는데 어마어마한 자생적인 노력을 하고 있었다"며 "한 달에 46만원의 기초수급비만 받아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1억원을 모았다고 한다"고 감탄했다.

이어 "쪽방촌 협동조합에서 붕어빵 등을 만들어 팔기도 한다. 이것은 시에서 조금만 지원을 해주면 자생할 수 있는 국제적인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본다"고 전했다.

과연 박 시장의 감탄은 합당한 것일까.

정수현 소장의 안내에 따라 찾은 동자동 사랑방은 쪽방촌 보다는 그나마 생활수준이 한단계 높다는 여인숙촌 어귀에 있었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선 사무실은 쪽방 4개 정도를 한데 엮은 정도의 크기였다. 8명 정도가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책상을 중심으로 복사기와 서류더미 등이 쌓여있었다.

박 시장이 말한 협동조합, 정확히 사랑방마을 공제협동조합은 인권상담, 수급자 발굴, 마을행사 등을 운영하는 동자동 사랑방이 대출업을 하기 위해 만든 별도조직인 셈이다.

사무 공간은 구분 없이 같이 쓴다. 사랑방 회원 태반이 조합원이다. 대출도 이들을 사이에서 이뤄진다. 김창현(50) 동자동 사랑방 대표는 이태헌(58) 사랑방마을 공제협동조합 이사장을 도와 교육이사를 맡고 있다. 그래서 명함 앞쪽은 대표, 뒷면은 교육이사라고 인쇄되어 있다.

공제협동조합은 조합비를 거둬 긴급한 자금이 필요할 때 대출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조합이다.

많게는 100만원 적게는 몇 만원의 소액을 개인 처지에 따라 빌려준다. 금리는 고작 2% 수준. 상환기간도 탄력적이다.

하루하루 먹고살기 빠듯한 쪽방촌 사람들이 왜 이 같은 공제협동조합을 만들었을까.

"주민의 70~80%가 신용불량자야. 수급비 월 46만원을 받아 아껴서 푼돈이 남아도 은행거래를 할 수 없거든."

이태헌 이사장이 우선 던진 말이다.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역시 용산국제업무지구에 대한 사회적 기대가 부풀어 있을 때였단다.

이 이사장은 "옆 동네에 B빌딩 들어설 때 거기 있던 세상물정 모르는 노인들한테 용역들이 1만원씩 주면서 맛있는 것 사 잡수라고 내 보낸 뒤 순식간에 다 때려 부쉈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언제든 길거리로 내몰릴 수 있다는 현실적 공포가 생겼다. 그 자신이 사업실패로 98년부터 노숙인으로 전락했던 처지였다. "이대로 멍청히 앉아 있다가 겨울철 쫓겨나기라도 하면 꼼짝없이 얼어 죽을 것 같았다"고 이 이사장은 전했다.

"2010년 1월에 아는 사람이 놀러가자, 술 마시러 가자고 꼬셔서. 갔더니, 공제협동조합 아카데미였다. 3박4일 동안 붙잡혀 꼼짝없이 교육을 받았지. '이게 우리 동네에서 가능할까?' 생각했지만 용기를 내 2010년 2월에 주민들에게 설명회를 가졌어. 3월1일, 삼일절에 창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2011년 3월19일에 창립한 거야. 조합원 317명으로 말이야."

연혁을 보면 쪽방촌 주민인 김모, 박모씨가 그를 거들었다. 회의를 거듭할수록 예비조합원을 자처하는 이들이 빠르게 늘어났다.

"나는 초등학교도 졸업 못한 무식쟁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지만 조합의 이력을 읊을 때는 자신감과 확신이 넘쳐흘렀다.

지난해 3월 23일 열린 제3차 정기총회 회의록을 살펴보면 2012년 말을 기준으로 사랑방마을공제협동조합 총 자산은 출자금 434만9690원에 대출금 1513만원을 합해 5737만5318원으로 되어 있다.

이 이사장은 "기본구좌는 5000원이다. 2만원~3만원 내는 사람도 있다. 한 달이면 300여만원이 넘게 들어온다"고 말했다.

조합원으로 등재된 이들만 460명이며 현재 활동하는 조합원은 380명이다. 동자동 쪽방촌 주민의 절반 가까이가 조합원인 것이다.

박 시장의 말처럼 조만간 이 조합이 운용하는 기금은 1억원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동자동 사랑방에서 나름 주력사업(?)으로 시작한 붕어빵장사도 벌이가 쏠쏠해 조합의 살림을 키우고 있다.

다가오는 설날에는 쪽방촌 중앙 공원에서 주민들 모두를 모아놓고 잔치를 벌이려고 한다.

이날 오후 들어 조합원 서넛이 사랑방을 찾아 이 이사장과 함께 설잔치의 내용을 채우느라 흥겨운 설전을 벌였다.

"먹을 걸 먼저 내놓으면 다 금방 가지 않을까?, 팔씨름 대회를 열어볼까?, 노인네들이 무슨~, 마지막에 노래자랑은 어때?"

155cm에 50kg이 채 알 될 것 같은 작달만한 몸으로 어떻게 푼돈을 긁어모아 운용기금 1억의 기적을 일구어냈을까.

"봄 가을에 행사를 해. 5월 어버이날 어르신들께 카네이션 달아드리기 행사를 하고, 한가위 때 마을잔치를 열지. 처음에는 사람들이 뭐 사기꾼이 아닌가, 욕도 많이 먹었지. 그래서 고물을 모아서 국수를 끓여 노인들에게 대접했어. 때마침 선거철이 코앞이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하고 선관위 직원들이 나왔기에 그냥 쫓아냈다. 우린 떳떳했거든, 이제는 영화도 보여주고, 온천도 같이 가."

따로 월급을 받지 않는다는 이 이사장은 "그럼 어떤 재미로 일하느냐"는 질문에 "오고가는 현찰 속에 싹트는 우정"이라고 웃어보였다.

조합원들에게 협동조합(동자동 사랑방)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일이 생겼다.

오후 3시께 소매치기를 하다 감방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는 A씨가 이곳을 찾아 "집행유예 기간 동안 식당주인한테 밥 달라고 얘기하다가 주인이 일부러 함정에 빠뜨려 '업무방해죄'로 고소해 서부지검에 출석해야 한다"며 이 이사장과 김 대표에게 교대로 푸념을 했다.

그가 스스로 말한 집행유예는 김 대표와 벌인 싸움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김 대표에게 "욕설 한 마디 해 본 적이 없다"며 "(식당주인을)무고죄로 고소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눈에도 그와 띠동갑은 되어 보이는 앳된 아내가 갓난아이를 등에 업은 채 남편을 걱정스레 바라봤다. 이 부부가 의지할 곳은 동자동 사랑방, 공제협동조합뿐이 없어보였다.

시선을 돌려 포스트 잇을 붙여놓은 게시판을 둘러보았다.

'오는 놈만 오고 안 오는 사람은 안 오고 행사 때 모이고 단합해야 하는데, 단합이 안 된다', '울고 슬픈 일 있거나 괴로운 사람이 오면 위로해주고 잘 됐으면 좋겠다', '컴퓨터 하나 둘 있습니다. 좋겠습니다', '주민들과 서로 소통하는 장소가 되어서면 좋겠습니다', '쪽방주민들에 있어서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장소입니다' '차 커피있어 좋아습나다'

비문에 오탈자 투성이 문장이었지만 조합원들의 마음을 대변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2012년 12월부터 시행된 협동조합기본법은 협동조합의 업무분야에 제한을 두지 않아 다양한 협동조합이 설립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따라 기본법이 제정되기 전에는 법적 실체가 불분명했던 협동조합들이 법적인 지위를 부여받게 됐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공제협동조합만은 여전히 법 밖의 임의단체로 남아 있다.

금융·보험업종의 협동조합은 기본법이 적용되는 업종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합이 사업을 중단하고 청산하게 되면 조합원이 낸 출자금을 법적으로 보호받을 길이 요원해진다.

이 때문에 박 시장의 관심에도 불구하고 일선 공무원들이 사랑방마을 공제협동조합을 바라보는 시선은 탐탁지 않다. 특정 세력이 주도하는 이익단체로 보는 시선도 엿보인다.

이날 오후 늦게 전모씨 등이 조합이 자랑하는 붕어빵 노점으로 안내했다.

넉살 좋은 전씨가 "여기까지 취재 왔으면 붕어빵이라도 몇 개 사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농을 던졌다.

현금이 없던 기자가 머뭇거리자 빵모자를 쓴 70대 조합원 할아버지가 봉지 한가득 붕어빵을 담아 건네주었다. 염치불구, 영하의 차가운 날씨 속에서 입에 넣은 붕어빵은 더할 나위 없이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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