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월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공원에서 열린 '조선어학회 한말글 수호 기념탑 제막식'에서 이종찬 우당장학회 이사장이 축사를 하고 있다.
뚜껑을 열어보니!

다시 그 해 얘기로 돌아가자.

92년 5월 19일로 이미 전당대회 날짜는 잡혔다. 공화계를 이끌던 김종필 씨는 안 나오겠다는 의사를 이미 밝혔고, 그 때부터 민정계는 박태준 씨의 주관 하에 매일 구수회의가 열렸다. 이종찬, 이한동, 박철언, 박준병, 양창식, 심명보 씨 등 민정계의 중진이라 할 의원들은 다 모이는 회의였다.

화두는 물론 누구를 경선주자로 내세우느냐였다. 일단 세 명으로 좁혀졌다. 이한동 씨와 박철언 씨. 그리고 이종찬 씨였다. 10여 일간의 회의 결과 결국은 이종찬 씨로 결정이 났다. 그 날로 <이종찬 경선 대책위원회>가 구성 되었다. 바야흐로 최초로 실시되는 여당의 대선후보 경선의 닻이 오른 것이다. 당시 대책위원장에 채문식 씨, 명예위원장에 박태준 씨, 경선대책 본부장에 심명보 씨, 그리고 내가 부본부장을 맡았다. 경선을 채 한 달도 남겨놓지 않은 시점이었다.

나는 사실 처음에는 그렇게 비관적인 입장은 아니었다. 그래도 민정계 의원이 제일 많았고, 이종찬 씨의 대중적인 인기도 또한 괜찮았다. 그런데…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이건 상황이 전혀 달랐다.

제일 먼저 민정계 의원들을 접촉하기 시작하는데, 당연히 올 줄로 알았던 사람들이 만나보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이것저것 핑계를 대면서 전화통화 자체가 힘든 게 아닌가. 오히려 호남 출신 원외 위원장들은 이종찬 캠프로 오는데, 정작 와야 할 의원들은 좀처럼 오지를 않는 것이다.

게다가 원칙대로 하자면 월계수회가 다 와야 되는데 일부는 두문불출하면서 다 오는 것도 아니고, 이한동 씨 계보도 왠지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고, 결과적으로는 11대부터 민정계였던 사람들만 오는 형편이었다.

그 때 민자당의 의원수가 140여 석이었는데 무려 100여 명이 민주계 캠프 쪽으로 가고 이쪽으로는 겨우 3,40여 명만 올 뿐이었다. 그러자니 주로 원외 위원장들이 많았고 원내는 적은 것이, 막상 뚜껑을 열어놓았을 때의 민정계 캠프 상황이었다.

민정계 후보조정을 하는 사이에 어는 틈엔가 청와대와 안기부가 상당수의 민정계를 YS앞으로 이미 줄 세워 놓은 후였던 것이다.

상황이 가뜩이나 어려운데 본부장이었던 심명보 의원의 건강에 이상이 왔다. 훗날 경선이 끝나고 끝내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암인 것까지는 몰랐었다. 그러나 건강에 이상이 온 이상 다시 본부장역할은 부본부자이었던 나에게 다 떨어지고 말았다. 역시 내 팔자는 어디가나 일하라는 팔자인 모양이었다.

이것이 자유경선이라고?

지난 번 대선 때, 신한국당의 대선후보경선 과정에서 박찬종 씨 등이 ‘이것은 불공정이다’ 어쩐다 말들이 많았을 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내가 혼잣말로 한 말이 있다.

“참 당신들 행복한 투정하고 있소.”

정말 그랬다. 그래도 명색이 여당 최초의 경선이었던 그 해 경선은 불공정정도가 아니라 아예 완벽한 위장 경선이었다.

막상 뚜껑을 열어봤을 때 우리가 받았던 당혹감음 결국 그 원인이 드러났다. 그것은 외견상으로는 완전 자유경선과 중립을 부르짖던 청와대의 보이지 않는 ‘입김’과 민주계의 치밀한 ‘방해’공작이었다.

아예 위원장들을 만나보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전화통화 자체가 어려운 것까지는 그래도 견딜만했다. 가령 우리가 각 지역별로 ‘정견발표를 며칠 날 간다.

그러니 대의원들을 좀 모아 달라’ 요청해 놓고 막상 그 곳에 도착해 보면 대의원들이 전혀 모여 있지 않았다. 그럼 이제 개별적으로라도 만나보자 하면 아예 만날 수조차 없었다. 심지어는 후보등록을 하기 위해 전체 시도지부의 추천서를 받아와야 하는데, 그것까지 무턱대고 막아대는 바람에 아예 추천서를 받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의원을 만나 정견 발표를 할 기회조차 주질 않으니, 그게 무슨 자유경선이고 민주주의란 말인가! 정말 뛰다 죽을 일이었다.

드디어 덜미가 잡혔다. 부산의 지구당에 내려갔을 때였다.

도착해 시민회관에 들어서는데, 현관 앞에는 문정수 지부장만 혼자 달랑 나와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는 ‘안에 대의원들 있습니다.’ 한 마디만 던져 놓고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한 당 안에서 무슨 원수 사이도 아니고 참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 들어가는 수밖에. 그런데 탁 문을 열고 들어서니, 이게 웬일인가! 첫 눈에 봐도 그들은 대의원들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섣불리 나설 수도 없고, 나는 잠시 후 연단에 올라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여기에 계시는 대의원 여러분의 신분을 좀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대의원증을 제시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우당탕탕…아니나 다를까,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루루 일어서더니 의자들을 밀치며 빠져나가는데 난리 난리 그 난리가 없었다. 전부 ‘가짜’들이었던 것이다. 우리 쪽에서 ‘대의원 자체를 못 만나게 하는 게 무슨 횡포냐!’며 하도 강하게 나가니까 겨우 짜낸 묘안이 그것이었던 모양이다. 말문이 막혀왔다.

“정말 이런 식으로는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자유경선이라고? 이게 무슨 자유경선입니까?”

결국 우리는 성명을 냈다. 만일 계속 이런 식으로 끌고 간다면 중대결심을 하겠다는 성명이었다. 신문에서는 대서특필을 하고, 중대결심이 뭐냐는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 부산 일 말고도, 손주환 정무수석이 김영삼 씨에게 유리한 발언을 하는 등 경선 불공정 사례는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결국은 정무수석이 경질되는 상황을 맞이했다. 그런 저런 일이 겹치면서 우리는 정말 ‘분노’의 수준을 넘어 경악에 경악을 하고 있던 터였고, 그러면서도 사태는 전혀 나아지지 않아 매일 매일이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그 때는 또 아직 젊은 탓이었는지 그런 저런 일에 나는 ‘악발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강하고 강경하게 밀고 나갔다. 이미 십자가는 지워진 셈이었다.

반장선거도 소견발표가 있는데…

성명 발표를 하면서 우리 쪽에서 하도 강하게 나가자 새로 부임해 온 김중권 정무수석으로부터 노태우 대통령이 이종찬 씨를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경선을 불과 일주일여 남겨놓은 시점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급하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일단 만나보는 게 수였다. 마침 이종찬 의원은 강원도 강릉으로 선거운동을 가 있었는데 돌아오는 대로 당일 저녁 청와대에서 만찬을 하기로 일정이 잡혔다.

나는 공항으로 마중을 나가 이종찬 씨에게 ‘만나면 해야 할 얘기’를 조목조목 적어가면서까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첫째, 경선이 일주일도 안 남았는데 그 동안 만난 대의원이 손에 꼽을 정도이니 이게 말이나 되는가, 그러나 다 좋다, 다 좋은데 5월 19일 전당대회 전 날 꼭 전야제를 하자, 그리고 그 자리에서 두 후보의 정견발표를 하기로 하자,

보충질의도 받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당일 날 또 한 번의 정견발표를 하게 해 달라, 이것만 지켜준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불리함은 다 감수하겠다, 정리하면 첫째 전야제 보장, 둘째 경선당일 날 정견발표 보장, 셋째 보충질의 토론답변 보장이다,

그리고 만약 이것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우리는 ‘이거다’…나는 마지막 ‘이거다’에 빨간 펜으로 언더라인까지 쳐 가면서 설명을 했다. 물론 그것은 ‘중대결심’이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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