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찬 전 국정원장
‘민자당 위장 자유경선 규탄대회’와 ‘깨끗한 거부?’

그런 저런 말들이 오가는 동안 나는 나대로 ‘중대행동’에 들어갔다. ‘경선을 거부하고 난 후 과연 그 수습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적어도 이것이 얼마나 불공정한 경선이고 위장경선인지 그것만은 국민에게 밝힐 필요가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부터 사태가 결코 쉽게 풀리지 않을 것으로 봤기 때문에 이미 그 때부터 행동에 들어갔다. 물론 어는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혼자서 내린 결정이었다.

일단 18일에 동대문 운동장을 임대했다. 서울 및 수도권의 각 지구당에서 청명씩만 동원되더라도 3만 5천에서 4만 명이 될 수 있었고, 이 정도면 동대문 운동장도 가득 메울 규모였던 것이다. 무대를 설치하고 봉고차와 확성기 장치 30대를 준비시켰다. 그리고 동시에 신문에 낼 5단 광고 문안을 작성했다. 직전 행사로 테너 임웅균 교수와 이선희 씨를 초청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른바 <민자당 위장 자유경선 규탄대회>가 열리는 것이었다.

대회가 끝나면 확성기를 부착한 봉고차를 선두와 중간 중간에 넣고 동대문 운동장에서부터 파고다 공원까지 행진하면서 위장경선을 폭로하는 전단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서를 채택하는 등의 계획도 세웠다. 틀림없이 이 행사의 결과는 당에 대한 항명으로 결정 날 것이고 출당은 분당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던 것이다.

나의 준비 속에서 이종찬 경선본부의 ‘중대회의’는 밤늦도록 계속되었다. 세상에 민정계가 이렇게 죽을 수도 있나 하는 한숨 섞인 말들도 오고 갔다. 그러나 어떻든 결론은 하나였다.

“이런 식의 경선은 말이 안 된다! 경선을 거부해야 한다!”

나는 이때다 싶어 말문을 열었다.

“거부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 뒷수습을 어떻게 하실 겁니까? 질 것 같으니까 생떼 쓰는 걸로 몰아세우면 끝나는 것 아닙니까? 뭔가 별다른 조치가 있어야 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나의 말에 당연히 동의를 표할 줄 알았는데 반응은 전혀 달랐다.

“경선 거부하면 그만이지 뭘 자꾸 하고 그럽니까? 거부하면 그냥 깨끗이 거부합시다. 그리고 장의원이 뭔가 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

“예. 벌써 아셨군요. 그거야 당연한 순서 아닙니까? 연설 할 기회를 달라는 게 당연한 요구인데, 이것을 거부하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이것을 폭로해야만 하고, 솔직히 우리가 거부했다고 이 깊은 속사정을 누가 압니까? 싸우다 질 것 같으니까 슬그머니 물러앉는 것이 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장의원 말씀이 백번 옳은데…아무튼 그거 안했으면 좋겠어요. 그냥 우리 깨끗이 거부합시다!”

박준병 의원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런데 더욱 놀랄 일은 박준병 씨의 의견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하는 게 아닌가! 바로 여당 사람들 특유의 성격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여기에서 그 특유의 성격을 과연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을지…그렇다고 뭐 뒷심이 약하다거나 이런 말로는 절대로 표현이 안되고, 그럼 지나치게 안정 희구파다? 너무 순치(馴致)된 탓이다? 그것도 아니다. 그럼 군대식 사고방식? 그래서 한 번 결정 나면 그것으로 끝이고 어떻든 위계질서는 지켜져야만 한다는 바로 그런 군대식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도 그것을 선명하게 말할 재주가 없다. 다만 ‘느낌’으로 오는 그 특유의 성격들이 분명 있긴 한데 말이다. 그것은 사실 어찌 보면 굳이 골을 만들지 않으려는 정치력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꼭 그것만도 아니다. 그저 왠지 그런 일이 어색하고 낯설고, 몸에 맞지 않는 것 같은 막연한 생각, 바로 그런 것은 아닐까, 그 정도 밖에 설명할 재간이 없다 아무튼 그 때 민정계는 그랬다.

이종찬의 외로운 결단

그런 저런 얘기가 오고 가는 가운데 어떻든 결론은 이미 ‘경선 거부’로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임박한 시기의 경선 거부라면, 그리고 굳이 폭로대회를 하자는 것도 아니요, 탈당해서 출마하겠다는 것도 아니라면, 그것은 포기였다! 그러나 아직 그것을 확인하기에는 너무 많은 아쉬움이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밖은 어렴풋한 여명이었다. 그 때 이한동 씨가 조용히 일어났다.

“나는 경선 거부했으니 더 이상 앉아 있을 필요가 없는 것 같고…이만 퇴장할랍니다”

그리고는 나가 버렸다. 그 뒤를 이어 박준병 씨도 일어섰다. 그리고 같은 말을 하고는 막 문을 나서려는 순간, 박태준 씨의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당신이 무슨 별 넷이야! 그래, 이제 와서 나가버리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그러나 결국 박준병 씨도 끝내 방을 나갔다. 역시 민정계라는 이름하에 함께 모여 있긴 했지만 각 각 적잖게 ‘동상이몽’을 꾸고 있었던 상황이 막판에 와서 더욱 선명해지고 있었다.

결국 주사위는 당사자에게 던져졌다. 역시 ‘후보’란 외로운 법이다. 말없이 창가를 서성이며 자꾸 나만 쳐다보는데…그럴수록 나는 계속 ‘한 번 해 보자!’는 입장을 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무엇이었든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밖은 이미 환해지고 있었다. 드디어 이종찬 씨가 내 앞으로 왔다.

“당연히 해야 하는데…분위기가 이러니 일단 취소합시다! 대신 그 모든 것을 성명에 담아 발표하기로 합시다.”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는 끝이었다. 당시 이종찬 후보의 견딜 수 없는 외로움과 고독한 결단들은 필설로 옮기기 어려운 것이었고, 그것이 곧 한국정치의 현주소였다.

의미없는 후일담

더 웃지 못 할 일은 그 후에 벌어졌다. 이미 경선을 거부하는 성명까지 냈는데, 막상 경선투표장에서는 ‘명목상’의 경선이 이뤄진 것이다. 상대 후보도 없고 정견발표도 없는 선거였다. 경선 거부사실 자체를 끝까지 부정하고 싶었던걸까? 그런데 그 결과는 더 의외였다. 후보도 없는 그 경선에서 이종찬 씨가 34.3%가 나와 버린 것이다.

훗날 사람들은 말한다. 그 때 끝까지 경선을 갔더라면 모를 일이었다고. 그리고 적어도 끝까지 갔더라면 이종찬 씨가 당내 2인자로 자리를 굳힐 수 있었던 것 아니냐고.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다르다.

먼저 끝까지 갔더라면 혹시 몰랐다는 의견은, 대의원이라는 존재를 잘 몰라서 그런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데, 그렇게 한 순간에 자신의 선택이 쉽게 바뀌고 그럴 수가 없다. 그 한 표에는 수많은 정치적인 판단과 자기 이해가 담겨있는 것이고, 그만큼 그것은 쉽게 바뀔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후일 내가 경기도지사 사건을 겪으면서도 뼈저리게 느낀 사실이다. 대의원이라는 사람들이 그렇게 간단한 사람들이 아니라는게 적어도 현재까지 내가 본 대의원들에 대한 판단이다.

그리고 당내 2인자로 자리를 굳히지 않았겠느냐는 의견은, 글쎄 나는 그 역시 그렇게 보지 않는다. 후일 박철언 씨가 감옥으로 가는 모습을 보면서, 또한 정주영 씨와 현대가 수많은 제재를 받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내가 보아왔던 김영삼 씨의 성격을 유추해 볼 때 그것 또한 무책임한 전망일 뿐이다. 나로선 오히려 그 정도에서 끝났기에 그 선에서 마무리 되었지 더 나갔다가는 오히려 더 안 좋은 사태로까지 발전했을 것으로 본다. 글쎄 이것이 나만의 생각일까?

어떻든 경선도 끝났고 대선도 끝났다.

나는 그 과정을 그 한가운데서 뚫고 지나며 절대 권력, 최고 책임자의 공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느꼈다. 그리고 김영삼 씨는 자신이 쟁취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노태우 씨의 지원과 합당을 통한 민자당의 물리력에 깁2한 당선이었다. 뒷날 이것을 그리도 열심히 부정하는 모습은 결코 아름답지도, 정치가답지도, 정정당당하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다만 이 두 가지가 그 메가톤급 회오리바람을 겪은 내가 하고 싶은 의미없는 후일담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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