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새 한국당>과 <새정치 국민연합>

지금 집권당의 이름은 <새정치 국민회의>고 또 한나라당의 전신은 <신한국당>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 이름이 낯설지가 않다. 이 이름들이 탄생되기 훨씬 전이었던 6년 전, 내 주변에서 생겨나고 무너졌던 이름들이기 때문이다.

당시 이종찬 씨는 탈당 후에 <새정치 국민연합>이라는 정치단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탈당 후 우리가 만들었던 이름이 <새한국당>이었다. 당시 우리는 신한국당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새한국당으로 할 것인지 오래 토론한 후, 그래도 한국로 하자며 <새한국당>이라는 당명을 정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년 후 한쪽은 <새정치 국민회의>로, 또 한쪽은 <신한국당>으로 ‘회의’와 ‘신’자만 바뀌어 걸리게 되었으니, 참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또 그 때 그 이름들을 탄생시켰던 주역들의 뒷날 행보를 보면 또 효하게도 그쪽으로 가게 되었으니 따져놓고 보면 꼭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이것은 아무리 머리를 짜내가며 궁리에 궁리를 해 봐도 결국은 그 근저리에서 돌고 도는 정치권의 ‘뻔한’ 속사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에피소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어떻든 우리는 <새한국당>을 창당했다. 집단 지도체제를 택해 최고위원에 이종찬, 이동진, 김용환, 박철언, 이자현 씨 등이 추대되었고, 대표 최고위원은 채문식 씨, 고문에 윤길중 씨가 추대되었다. 나는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국민후보를 찾아라

당시 우리는 이미 탈당 전부터 국민후보 영입문제에 대해 충분히 토론을 해 오고 있었다. 이종찬 씨 같은 경우는 일단 민자당 내 경선을 통해 너무 많은 상처를 입은 상태였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내려졌고, 결국 새로운 ‘국민후보’를 찾아야만 했다. 그 때 국민후보로 우리가 거론했던 사람들은 김준엽 씨, 강영훈 씨 등이었다. 김준엽 씨는 초반에 고사를 했고, 강영훈 씨 같은 경우는 할 듯 할듯하면서도 결국은 안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한편으로 우리는 아직 민자당에 남아있던 안무혁 의원이나 김종인 경제 수석 등을 계속 영입하려 노력했는데, 결국 나중에는 그런 것들이 다 문제가 되었는지 김영삼 씨의 집권 후에 그들은 일정한 견제를 받아야만 했다.

일단 일차로 올렸던 국민후보들이 여의치 않게 되면서 우리는 다시 박태준 씨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당시 박태준 씨는 광양에서 은둔하다시피 하고 있었는데, 광양까지 찾아가 국민후보 영입의사를 타진했다. 그런데 박태준 씨는 이상하게도 김영삼 씨를 그렇게 싫어하고 또 김영삼 씨의 집권자로서의 한계를 누구보다도 걱정하면서도 정작 당신은 할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박태준 씨는 군 생활을 오래해서 그런지 자신이 한 번 뱉은 말에는 두 번 다시 되돌아보지 않는 측면이 있다. 노태우 씨와의 독대를 통해 거의 출마를 포기 ‘당하다’시피 한 이후, 자신은 그 때의 약속을 번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김영삼 씨의 손을 들어주는 것도 또 아니었다. 당시 김영삼 씨가 서청원 씨와 함께 박태준 씨를 찾아가 당내로 복귀해 줄 것을 원했을 때, 박태준 씨는 냉정하게 거절했다. 단 ‘그렇다고 다른 곳에서 나가지도 않겠다. 나는 일단 정치를 떠나겠다’는 말을 남기고 싱가폴로 떠나버렸다.

국민후보 김우중?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후보가 떠올랐다. 바로 김우중 회장이었다.

사실 김우중 ‘카드’는 처음 듣는 얘기가 아니었다. 탈당 전에 국민후보 영입문제를 논의하던 때 나는 이미 그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그 때 김용환 씨와 이지헌 씨와 나 이렇게 세 사람이 애기를 나누던 중이었는데 그 때 두 사람이 말문을 열었다.

“만약 거론한 사람들이 안될 경우 김우중 회장은 어떨까?”

나로서는 전혀 생각해 본 바도 없었고 과연 김우중 씨와 합의가 되었는지의 여부도 알 수 없었다.

“합의는 된 거요?”

“그거야… 아무튼 김우중 회장 같은 경우 이번 선거는 아닌 것 같고, 차기 선거를 바라보면서 해야 될 거야.”

그 정도에서 얘기를 마쳤는데 영입후보들이 다 무산되면서 다시 두 사람이 김우중 카드를 꺼낸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대안을 찾다가 어쩔 수 없이 김우중 카드를 생각해 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물밑 얘기들이 오고 갔고 마지막에 그 얘기가 올라 온 것이다.

“영입후보들이 다 안된다고 하는데 대통령 후보없이 어떻게 정당구실을 하겠는가. 이번에 당선이 안되더라도 차기를 위해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바로 김우중 씨다.”

당시 나는 이 의견에 회의적이었다. 이미 정주영 씨의 국민당이 출범을 한 이 후였기 때문에, 그에 질세라 이제 김우중 씨까지 가세할 경우 재계의 두 인물에 대한 차별성도 없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정치를 표방하는 새한국당의 정치이념에도 맞지 않는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때 내가 낸 제안은 이런 것이었다.

“김우중 씨와 정주영 씨의 차별성이 문제다. 만약 한다면, 가지고 있는 모든 주식을 처분해서 대우는 전문경영인에게 넘겨주고, 처분된 돈으로는 새로운 정치학교를 새운다는 신념으로 당에 다 헌납하는 헌신이 필요하다. 만약 그렇게 할 경우, 스스로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는 모범을 세울 뿐만이 아니라, 미래의 정치학교를 만드는 기분으로 정당을 만들겠다고 한다면, 국민들에게 충분히 납득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내 의견이 당론으로 모아지자, 이제는 의외로 김우중 씨도 적극적으로 나왔다. 거의 어느 정도 내락을 받는 상태에까지 이르른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사고’가 나고 말았다.

‘김우중 - 새한국당 대통령 후보로!’

조선일보 일면 톱기사로 이런 기사가 나가 버린 것이다. 나는 지금도 이 정보가 어떻게 흘러들어갔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다만 김우중 씨가 연대 동창회장인 조선일보의 방우영 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선에서 흘린 말이, 그만 기자들의 냉정한 정보사냥에 걸려버린 것이 아니가, 그렇게 추측해 볼 뿐이다. 어떻든 신문에 연일 대서특필 되면서 회사도 청와대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청와대에서 자금 숨통을 조여오기 시작했고, 여기저기에서 견제와 압력이 들어가지 시작하자 회사는 회사대로 난리고, 각계의 반응 또한 부정적인 쪽으로만 흘렀다.

그런데 더 알 수 없는 것은 그 때 이종찬 씨의 반응이었다. 모두 알다시피 이종찬 씨와 김우중 씨는 절친한 40년 친구사이였고, 시실이야 어떻든 김우중 씨가 이종찬 씨의 후원자로서 적잖이 역할을 하고 있다고 외부에 알려진 상태였다. 이자현 씨와 김용환 씨의 말에 의하면 ‘이종찬 씨도 분명 동의했다.’고 하는데 나는 지금도 과연 김우중 씨가 이종찬 씨와의 합의하에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알지 못한다. 아무튼 당시 이종찬 씨의 반응은 ‘안된다’는 것이었고, 그것도 아주 강경한 반대였다.

결국 된다 안된다, 나온다 안 나온다…. 이런 저런 말들이 오가며, 그 꼬리를 물고 크고 작은 일들이 벌어지면서 이제는 나올래야 나올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결국 마지막에는 김우중 씨가 출마 포기 선언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우리는 있는대로 ‘냄새’ 만 피우다 정작 그 음식은 먹어보지도 못한 채 물러서야만 했다. 다만 그 때 김우중 씨가 정말 우리의 포부대로 대우를 헌신적으로 정리하고 나왔다면 우리 정치는 또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저런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볼 뿐이다.

두 가지의 오해

새한국당은 창당은 되었으나 대통령 후보를 만들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선거 일자는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자 이제는 정주영 씨의 국민당과 당대당 통합 협상이 당내 일각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그것만은 못하겠다’고 입장을 정리했다. 새로운 정치를 해보겠다며 민자당에 탈당해 그 어려운 고비를 다 넘기며 당을 만들었는데 기껏 이제와서 국민당과 합당한다는 사실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골국 당은 다시 찢어졌다. 나와 이동진, 오유방, 김현욱, 이영일, 윤길중, 이종찬 씨만 남고 채문식, 이자헌, 박철언, 김용환, 유수호 씨 등은 국민당에 입당을 한 것이다. 당 대표가 가버렸으니 최고위원 중에 남아 있는 이종찬 씨가 당연히 대표가 되었다. 이영일 씨는 오유방 씨 등은 당시 다 원외였기 때문에 현역 의원으로는 이종찬 씨와 장 경우, 단 둘밖에 남지 않은 셈이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에게 이상한 두 가지의 오해가 싹텄다. 하나는 이종찬 씨가 새한국당을 만들었다는 오해인데 그건 아니었다. 기나긴 토론과 확인을 통해 민자당을 탈당한 30여 명의 원내외 위원장은 물론이고,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에서 김대중 후보에 반대했던 한영수, 임춘원 의원 등과 같은 야당 출신들, 그리고 처음부터 무소속이었던 정호영, 강창희 의원 등이 참여해서 만들었던 당이었다. 그러나 대통령 후보를 만드는 과정에서 하나 둘씩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그 우여곡절 끝에 이종찬 ㅆ시가 대포가 된 것이었다. 이것은 곧 한국정치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도 하나의 오해는 ‘이종찬 하면 장경우’ 하는 식의 선입견이 이때부터 생겨났다는 점이다. 그것은 당내에 현역의원으로 유일하게 둘만 남아있다 보니 그런 선입견이 생겨난 것 같다.

아무튼 대선은 다가오고 있는데 정작 정당이라고 이름을 내건 당에서 후보를 못내고 있으니, 우리는 당의 존립 자체가 위험해지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바로 그 시점부터 내가 앞으로 맞이하게 될 긴 정치적 방황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종찬의 두 번째 도전

당시 내 의견은 분명했다. ‘정당일고 해서 곡 후보를 내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느냐, 더욱이 선거 경비는 또 어떻게 충당할거냐, 법정 선거비용은커녕 그것의 반절도 못 모을 상황이 아니냐, 게다가 우리가 후보로 내세운다면 이제 천상 이종찬 씨인데 이 후보는 상처가 너무 많다, 나가지 말자, 우리는 김영삼 씨 등 나머지 후보들의 선거운동을 감시하고 공명선거 캠페인을 하도록 하자, 그것도 새 정치를 하겠다는 우리의 원칙과 맞다… ’이런 의견이었다.

물론 당시까지만 해도 내가 바라보는 이종찬 씨는 ‘상처는 입었지만 차세대 지도자로 손색이 없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었다. 독립유공자의 자손으로서 정통성도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원내 총무 당시 교육법 개정과정을 통해 집회 및 시위법으로 학생들을 다 묶으려 했을 때 끝까지 그럴 수 없다며 밀어부친 것 등은 나에게 상당히 신선한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그랬는지 여당 정치인치고는 대중적으로 일정하게 인기를 모으고 있었다.

당시 시대상황 속에서 여당 의원이 대중 속에서 인기를 얻는다는 것은 거의 무모한 바램이라고 할 수 있었다. 민주와 반민주, 독재와 반독재라는 큰 틀의 정치상황 속에서 여당 정치인은 곧 반민주요 반독재라는 틀 속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고 그런 속에서 대중 정치인으로 성장하기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종찬 씨의 경우는 달랐다. 그런 만큼 탈당 전 민자당 내에서는 이종찬 씨에게 적대적인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이종찬 씨에게 정치 선배로서의 매력을 느꼈다. 대중정치인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점, 또 여당 정치인과는 좀 다른 일련의 행동들이 나를 끌어당겼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92년 대선 출마를 반대했던 이유는 그런 모든 판단과 철학이 바뀌어서가 아니었다. 그 당시 상황으로는 도저히 대선후보에 등록한다는 것은 무모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대선후보 없는 정당이 무슨 정당이냐, 당의 정치철학이 표현되는 것이 바로 대선인데 어떻게든지 후보를 만들어내야만 한다’ 는 의견 역시 팽팽했다. 사실 나는 이종찬 씨 경선 때부터 너무 지쳐있었기 때문에 ‘그럼 그렇게 하라, 나는 모르겠다’ 며 칭병을 핑계 삼아 당을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강력하게 반대하던 사람이 나가질 않으니까 당론은 쉽게 모아졌고, 그 와중에 후보등록을 해버렸다. 기호도 나왔다. 1번 김영삼, 2번 김대중, 3번 정주영, 4번 이종찬, 5번 박찬종… . 기호 4번의 대통령 후보가 탄생된 것이다. 등록은 했다는데 또 모른 척 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사람이 없으니 또 내가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대권을 향한 이종찬 씨의 두 번째 닻이 올려 진 것이다.

당원이 제대로 있는 것도 아니지, 지구당 숫자도 적지, 그렇다고 자금이 있는 것도 아닌, 참으로 힘들고도 무모한 대권 도전이었다. 그 속에서 적은 실무진으로 선거운동 하랴, TV토론회와 찬조연설 나가랴, 정말 눈 코 뜰새 없는 날이 시작되었다. 바쁜 것이야 문제가 아니었다.

자금 때문에 치러야 했던 고초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심지어는 현수막을 걸어야 하는데, 그것을 걸어 줄 사람의 인건비가 없다 해서 명색이 선거대책본부장이라는 내가 직접 들고 나가 걸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신문사의 광고료를 메꾸지 못해 내가 멱살을 잡히는가 하면, 새벽에 눈을 뜨면 오늘은 또 어디 빚을 갚아야 하나…. 이런 걱정하는 게 일과의 시작이었다. 그래도 어떡하랴, 당에서 결정난 일이니 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 계속...>

 

저작권자 © 시사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