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찬 전 국정원장
이종찬의 두 번째 백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면 될수록 기다렸다는 듯이 ‘유혹’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국민당의 봉두완 씨와 김동길 씨 등은 아주 적극적으로 계속 ‘합치자’는 제의를 해왔다. 그러나 내가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정작 가장 먼저 접촉을 해온 쪽은 김대중 씨의 민주당이었다.

당시 민주당의 강창성 씨는 중앙정보부 차장 시절 이종찬 씨가 보좌관을 했던 인연이 있었는데, 후보 등록 직후에 이종찬 씨를 만나 ‘함께 하자’는 의견을 전했다고 한다. 이종찬 씨는 그 말을 그냥 흘려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계속 언론에 이 말이 돌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렇게 말렸는데도 나온 이종찬 씨였으니 어떻든 끝까지 간다는 것에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고, 나중에야 알게 된 그런 저런 전후사정을 몰랐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흘려들었다. 그런데 드디어 하루는 조선일보의 최보식 기자가 나에게 독대를 요청했다.

“이종찬 후보 언제 그만둡니까?”

대뜸 터져 나오는 말에 나는 아연실색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지금 한창 뛰고 있는 사람에게 언제 그만두냐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어? 이거 우리 부장이 취재 근거가 있다고 하던데요?”

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연락을 취해 이영덕 부장을 만났다.

“아니 도대체, 지금 한창 뛰고 있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아니 모르세요? 강창성 씨와 이종찬 씨가 이미 만났다는 것 정말 모르세요?”

기가 막혔다. 그렇게 말려도 출마한 사람이 이제 와서 왜 또 강창성 씨를 만났단 말인가! 정말 이해도 할 수 없고, 무엇보다 갖은 고초 겪으며 견디고 있는 상황을 생각하자니 화가 치밀어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이종찬 씨가 유세가 끝나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늦은 저녁 이종찬 씨가 들어왔다. 단 둘이 앉아 나는 말을 편하게 했다.

“아니 형님! 이거 어떻게 된 겁니까? 중간에 포기할 후보를 왜 등록했습니까?”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이종찬 씨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나는 전후 사정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이종찬 씨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 이거 참… 강창성 씨야 한 때 내가 모시던 사람이고, 보자고 하는데 굳이 안 만나겠다고 하는 것도 또 그렇더라구… 그런데 막상 마주 앉자 계속 그쪽에서 ‘함께 하자’고 하길래 내가 그냥 거절하기도 힘들고 그래서, 좋다 그럼 김대중 씨가 내각제에 합의를 해 준다면 그렇게 하겠다, 그냥 그렇게 쉽게 말한 건데, 그 말이 또 그렇게 도나?… 정말 무섭구먼!”

“… 아무튼 후보 입장에서 그런 소리를 그렇게 하시면 됩니까? 어떻든 그런 저런 소리가 돌기 시작하면 저 사람 끝까지 갈사람 아니다는 얘기로 비화되기 마련이고…이거 잘못했다가는 5번에게도 집니다. 아무튼 다시는 그런 얘기 하지 마십시요!”

얘기는 그렇게 끝났다. 그러나 한 번 돌기 시작한 소문은 걷잡을 수 가 없었다. ‘이종찬 후보는 끝까지 안간다’ 는 말이 거의 공공연한 비밀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국민당 측과 민주당 측에서 적극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상황이 그렇게 전개되면서 이종찬 씨나 나나 마음은 ‘만약 포기한다면 DJ다’ 는 쪽이었다. 그러면서 막판에는 민주당 측과의 만남도 잦아질 수밖에 없었다. 협상 대표는 당시 민주당의 사무총장과 대통령 선거대책본부장을 역임하고 있었던 한광옥 씨였는데 일정이 바빠지자 한광옥 씨는 얼마 후 김원기 씨에게 역할을 넘겼다. 여의도의 중국집 ‘외백’에 나와 함께 셋이 둘러앉았다.

“새한국당과 통합하는 문제는 김이사장도 충분히 동의하고 있으니까… 앞으로 모든 것은 여기 김원기 의원에게 맡겼으니까 두 분이서 잘 상의해 얘기를 잘 매듭지어 보세요.”

그렇게 김원기 씨와 협상이 시작되었다. 우리쪽은 ‘그렇다면 합당 형태로 하자, 공동대표를 맡는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민주당 측에서는 처음에는 괜찮다는 식으로 나가다가 나중에는 ‘지금 전당대회를 할 수가 없다’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합당은 전당대회의 권한인데 전당대회를 할 수 없다면 합당 형식을 가질 수 없다는 얘기였다. 윌는 다시 ‘그렇다면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일단 선언을 하고 전당대회는 나중에 하자’는 쪽까지 양보가 되었다. 그러자 그 쪽에서도 ‘그런 방법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겠느냐, 좋다. 노력해 보자’는 입장이었다.

몇 차례 만남이 더 이루어진 결과 대체적인 실무합의는 다 마쳐진 셈이었다. 김원기 씨는 법률 전문가인 박상천 의원과 상의를 하면서 당내 절차를 밟은 후 김대중 후보의 최종 결심을 곧 알려주겠다고 했다. 당시 이 사실은 김대중 씨와 이종찬 씨 양 당사자와 한광옥, 김원기 의원과 나, 그리고 동아일보의 이도성 기자만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렇게 합의를 하고 돌아간 김원기 씨로부터 일주일 가까이 연락이 없는 것이다. 함흥차사가 따로 없었다. ‘이상하다? 사실 급한 쪽은 쪽인데?’ 나중에는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동아일보의 이도성 가자를 통해 김원기 씨의 근황을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엉뚱하게 광주 등 호남지역의 선거운동에 바쁘고 다음 주에나 올라올 것 같다는게 아닌가!

‘아! 이건 의사가 없다는 얘기구나!’

당시 나는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에도 국민당 측에서는 김동길, 봉두완, 정남 씨 등이 꾸준히 이종찬 후보를 설득하고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나중에는 이종찬 후보의 부인인 윤장순 여사를 못견디게 졸라댔다고 한다.

당시 우리 상황은 거의 ‘포기’상태에 이른거나 마찬가지였다. 강창성 씨와 이종찬 씨가 만났던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끝까지 가지 않을 사람’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던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무엇보다 ‘자금’ 문제가 제일 컸다. 유세를 다니는데 여관비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그러자 이종찬 씨 역시 심각한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대통령 해보겠다고 나왔다가 주변 사람들을 있는대로 고생만 시키고 있으니 누구보다도 마음이 편치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민주당 측으로부터는 아무 연락이 없자 우리는 결국 윤길중, 김현욱, 오유방씨 등과 함께 회의를 한 결과 국민당과 합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그리고는 바로 이종찬 씨와 정주영 씨가 공개적으로 만난다는 약속이 잡혔다.

그런데 그 소식이 알려지자 바로 김원기 씨에게 연락이 왔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어떻게 된 일이라뇨? 아니 그렇게 합의를 다 해 놓고 가신 분이 일주일이 넘도록 연락이 없으니 우리는 생각이 없는 걸로 판단 할 밖에요.”

“아무튼 다시 만납시다.”

“이미 늦었어요. 당 내부회의를 통해 이미 다 결정난 일이고…아니, 그렇게 기다릴 때는 연락이 없다가…참 내…어떻든 이미 늦었어요.”

그렇게 했는데도 민주당에서는 쉽게 포기를 하지 않았다. 김원기 씨를 이어 이부영 씨가 오고….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결국 이종찬 씨는 정주영 씨를 만나 합당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종찬 시의 두 번째의 백기 선언인 셈이었다.

당시 국민당과의 협상 결과는 이런 것이었다. 당대당 통합을 원칙으로 하고, 공동 대표를 맡는 것이었다. 그리고 선거 과정에서 우리 당이 지고 있었던 채무관계를 합당된 당에서 책임져 주는 것까지 합의가 되었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그 빚을 혼자 해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대선을 8일여 남겨 놓은 시점이었다.

막상 그런 합의를 다 마치고 정주영 씨와 헤어져 나오자 허탈감이 밀려왔다. 내가 그렇게 허탈한데 이종찬 씨야 어떻겠는가. 당사로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가족들 얼굴 볼 용기도 나지 않는다면서 이종찬 씨는 시내의 모 호텔을 잡아 들어갔다. 그렇다고 나까지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든지 수습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당사로 옮겼다.

당사는 이미 말 그대로 ‘눈물바다’였다. 이미 이 상태로는 더 이상 선거를 치를 수 없다는 판단들을 수없이 해왔지만 막상 그렇게 되자 새삼 우리들의 비참한 처지가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밀려오기는 당원들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어떤 청년 동지는 내 앞에서 무너지며 울부짖었다.

“굶으면서라도 하겠습니다. 정말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습니다.”

이제 당원들은 아예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바로 이종찬 씨의 부인과 아들도 당사로 들어섰다. 허탈감과 알 수 없는 분노가 일기는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로 붙들고 하염없이 눈물만을 흘릴 뿐이었다. 그렇게 울부짖는 당원들 사이에서 나는 무섭게 밀려오는 허탈감과 싸우며 그 밤을 하얗게 지샜다. 우리는 다시 한 번 그렇게 무너졌다.

그리고 이틀 후인가 마침내 이종찬 씨가 당사로 나왔다. 그리고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어려운 결정과 심경을 고백하자 다시 당사는 눈ㅂ물바다로 변했다. 그 때 허탈감과 싸우며 서 있던 이종찬 씨의 모습, 그리고 울부짖은 가족들과 청년동지들의 모습은 지금도 내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아, 정치란 게 이런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그 속에서도 정치 일정에 따라야만 했다. 국민당으로 가야만 했고, 환영식을 치른다며 꽃다발들이 쏟아졌다. 그렇다고 참담한 기분이 나아지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 속에서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협상 결과를 발표하고 마침내 합당 선언을 했다. 그리고는 남은 일주일여 동안 함께 선거운동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렇게 했음에도 국민당은 결국 대선에서 패배했다. 그런데 도 묘한 것은 그 후에 보인 정주영 씨의 태도였다. 정주영 씨는 ‘대선에 패배했으면 끝났다’는 듯, 합당선언을 통해 약속된 사항에 대해서는 전혀 얘기하지 않았다. 결국 합당 선언은 말 그대로 ‘선언’으로 끝난 채 우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고 만 것이다. 명분은 명분대로 잃어버리고 게다가 그 어떤 실리도 챙기지 못한 채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을 때의 그 참담함을 뭐에 비교할 수 있으랴. 그 때부터 내 앞에는 더욱 외롭고 힘든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때 민주당은 왜 연락을 끊었던 것일까? 나는 그것 역시 지금도 모른다. 다만 추측을 해 보건데, 당시 민주당은 이기택 씨의 작은 민주당과 합당한 후 김대중 씨와 이기택 씨가 공동 대표로 있었고, 여기에 또 새한국당의 이종찬 씨가 붙을 경우, 당내에서 나름대로 ‘야심’이 있는 중진들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로 당내에 복잡한 상황이 전개 될 것을 우려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에 대한 정치적 판단 때문에 연락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던 상황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추측해 보는 것이다.

당시 협상 창구였던 김원기 의원은 과연 종합적인 진전 상황을 김대중 후보에게 옳게 전달했을까? 또 이 협상을 처음 지시했던 김대중 후보는 과연 어떤 보고 때문에 계속 밀어붙이지 않았던 걸까? 그 때 김대중 씨는 이런 상황을 알았던 걸까? 만약 알았다면 그래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을까?

물론 그때 몰랐다 해도 지금쯤은 다 알았을 것이고, 도 이종찬 씨가 김대중 씨와 누구보다도 가깝게 있게 된 상황으로 되고 말았으니, 이런 저런 추측도 다 소용없는 지난 얘기지만 말이다.

<다음에 계속...>

 

저작권자 © 시사플러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