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성을 적나라하게 이야기하며 세상을 도발한 '버자이너 모놀로그'와 '필요한 목표물' '굿 바디' 등 희극 작품, '나는 감정이 있는 존재입니다'와 '마침내 불안정한' 등의 정치적 회고록을 남긴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오비 상(Obie Awards) 등을 수상한 극작가 이브 엔슬러가 고통스러웠던 7개월간의 자궁암 투병기 '절망의 끝에서 세상에 안기다'를 펴냈다.

'절망의 끝에서 세상에 안기다'는 엔슬러의 진실하고 용기 있는 암 투병기이자 강간과 폭력, 전쟁과 파괴로 무너진 세상의 아픔을 드러내는 동시에 우리의 책임과 의무를 이야기하는 일종의 선언문이다.

이브 엔슬러는 콩고에서 활동하는 중에 끔찍한 강간과 폭력 사태, 광물 약탈 등을 목격했다. 이어 그는 자궁암 판정을 받는다. 그리고 7개월 동안 고통스러운 수술과 치료 과정을 겪으며 그토록 부인해왔던 자신의 '몸'을 강하게 인식한다.

엔슬러가 인식한 몸은 사람들이 찌르고, 구멍 내고, 자르고, 단층촬영을 하는 몸이다. 자신의 병과 생명력을, 지구 파괴와 인류의 회복력과 연결하는 엔슬러는 마침내 자신의 몸과 세상의 몸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한다.

그가 경험한 세상의 몸은 어떤 관념이나 상징에 머무는 몸이 아니다. 세상의 몸은 인간의 신체처럼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땅이나 나무, 생명을 의미한다. 따라서 실체를 가지고 우리와 함께 존재하며 인간의 몸과도 하나로 연결돼 있음을 엔슬러는 강조한다.

책의 배경인 콩고에서 발생한 끔찍한 이야기들은 세상의 몸을 구멍 내고 파괴하는 인간의 부조리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것을 보고 하늘을, 하늘의 세포막과 그 오존층에 뚫린 구멍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은 '구멍 내는 기술자'가 되었다.

총알로 낸 구멍, 드릴로 뚫은 구멍, 상처를 줘 낸 구멍, 탐욕과 강간으로 만든 구멍"이라는 엔슬러의 표현은 이러한 파괴가 단지 콩고에 국한하지 않고 우리가 모두 직면한 비극이라는 문제의식을 뒷받침한다.

구멍이 생기는 곳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몸이기에 우리와 무관하지 않고,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정소영 옮김, 256쪽, 1만3000원, 자음과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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