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중원 변호사
1. 이제 친구들과 어울려 골프를 치고, 바둑을 두면서 소일을 할 나이이다.       그런데 왜 힘들게 소설을 쓰는가.

• 다시 말하지만, 나는 골프도 칠 줄 모르고 바둑도 모른다. 고스톱도 할 줄 모르니 하는 도락이나 잡기가 하나도 없는 셈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오락이 없는 인생이란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다. 오직 읽고 쓰기만 한다면, 그 무의미한 인생이란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그래서 내 인생은 조롱거리밖에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두주불사하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나는 지난 30여 년 동안 한 주에도 수십 장의 글을 썼다. 변호사의 주 업무인 소장이나 답변서, 준비서면, 가끔 형사 고소장, 법률의견서 등을 쓰는 일 말이다.

그것들은 모두 한결 같이 너무나 직설적이고 명쾌하며, 한 치의 빈틈도 있어서는 안 되는 논리 정연한 존재들이었다. 법은 아주 단순명쾌한 것이다. 유죄이면 유죄이고 무죄이면 무죄이다. 유죄도 아니고 무죄도 아닌 중간 영역은 있을 수 없다. 애매모호한 것이 존재해서는 안 된다. 법은 단순명쾌하기 때문에 강력한 것이다. 그러니 법률문서도 단순명쾌해야 하는 것이다.

나도 지금쯤은 그 지겨운 흑백논리의 멍에를 벗어나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는 분명히 중간 영역인 회색의 영역이 무수히 존재한다. 세상을 살다보면 흑백논리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희끄무레한 영역이 존재한다. 그래서, 완전히 검거나 완전히 희거나, 완전히 나쁘거나 완전히 좋은 건 이 세상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다. 나는 그것이 이 세상을 가장 정직하게 바라보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 내 나이 60을 넘어서니 이제 서야 철이 들었다는 느낌이 들고 세상일에 조금씩 눈을 뜨게 된다. 그리고, 꼭 쓰고 싶다면 세상을 알아야할 만큼 알게 되었으니까, 이제는 소설을 잘 쓸 수 있을 거라는, 초라한 자신감이 생긴다.

유능한 작가란 작가 자신이 내면적으로 어느 정도는 성숙해야만 세상과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고, 그래서 서로 상극하는 모순된 목소리와 세계관들이 생생하게 얽히고설키면서 좋은 소설이 탄생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좋은 글을 쓰지는 못할 것이라는, 결국 실패할 거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희망이 있기는 하다. 어차피 대부분 작가들은 실패하니까. T.S. 엘리엇은 비평가들이란 대부분 실패한 작가들이라는 말을 듣자 “하지만 작가들 대부분이 그렇지요.”라고 하였다. 

• 나는 소설을 쓰면서 입체파 화가들처럼 입체적 플롯, 자기 내면이 강한, 규범적이고, 고독한, 특별한 성격의 작중 인물, 인간 삶의 근원적인 것에 물음을 던지는 주제, 무엇보다도 나만의 독특한 컬러를 가진 미학적이고 예술적 형태를 띤 서정적이면서 아름다운 문체에 집착한다. 나는 서사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산문에서 소설과 시의 중간쯤인 서정성이 풍부한 글을 쓰려고 무진 애를 쓴다. 항상 적절한 단어와 문구는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문제는 그것들을 어떻게 배열해서 완벽한 문장과 문단을 만드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하여 내가 바라던, 나의 예술가적 영혼을, 내 온전한 애정을, 내 모든 증오를 집어넣은 가상의 세계를 구성한다. 그리고 허구가 아니고 모두 진짜 현실인 것처럼 꾸미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작가적 진실성으로 독자를 현혹시키기 위해 머리를 싸맨다. 소설에는 다른 예술의 형식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독특한 영역이 있다.

나는 나의 소설이 구축한 세계에서 창조주, 신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나에게 글쓰기는 글 읽기와 마찬가지로 강박관념이다. 거의 병적인…….
 
2. 독자들 중에 유중원 변호사가 소설을 써? 모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소설가 유중원이 지금까지 어느 정도 소설을 썼는지 소개해 달라.

• 지금까지 장편소설 ‘사하라’와 단편소설들을 모은 ‘이별’을 이미 몇 년 전에 발표 하였고, 그러나 이들 소설을 여전히 붙잡고 수정을 하고 있다. 금년에는 장편소설 ‘시인의 죽음 (가제)’과 단편소설과 에세이를 묶은 ‘달빛 죽이기 (가제)’를 발표할 예정으로 원고는 이미 정리가 된 상태이다. 그러나 출판 사정이 열악하여 어떻게 될지는 예측하기 곤란하다.

지금(2015년 현재)은 대한변협신문 인터넷판과 법률신문 인터넷판이 기회를 주어서 원고료 없이 그 신문에 단편소설과 에세이를 연재하고 있다. 지금까지 30여 편을 연재하였는데 계속하면 100편, 200편, 300편이 넘지 않겠는가. 다만 그것은 독자들이 계속 열심히 읽어준다는 전제가 있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러시아 작가 체호프는 자신의 소설은 불과 7년 정도 읽히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후로는 곧 잊혀지게 될 거라는 이야기이다. (그건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그는 600여 편의 단편소설을 남겼는데 많은 소설이 발표 되자마자 곧 잊혀졌지만, 벚꽃동산, 세자매 등은 100년을 훨씬 넘어서 지금까지 명작으로 회자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의 경우는 어떨까? ‘하나님, 저는 소리이고 싶습니다. 소리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나서는 사라질 뿐입니다. 잊히고 싶지 않아 발버둥치는 데서 타락과 변질이 시작됩니다. 저는 소리처럼 메시지를 전달하고는 사라지고 싶습니다.’

3. 법률가의 글쓰기와 비교하여 소설가의 글쓰기는 무엇이 다른가. 소설을 쓸 때의 기분은 어떤가. 그리고 자기만족을 위한 소설쓰기를 하는가, 아니면 소위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것을 꿈꾸는가.

• 말랑말랑한 감성적인 글을 쓰는 일은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학술논문이나 준비서면을 쓰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글이건 글을 쓸 때마다 언제나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오직 손으로 고통스럽게 쓰면서 내 몸과 글이 견고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느낀다. 그때 말들이 내 몸에서 흘러나온다.

지금 이 나이에 한심할 정도로 무명작가일 뿐이다. 어떻게 하여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 내 책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된다면 기쁘기는커녕 무척 당혹스러울 것이다. 그런데 베스트셀러는 소설의 문학적 가치 또는 책으로서의 완성도와 일치하지 않다.

대부분 상업적 수단에 의해 만들어질 뿐이고 여기에 대중의 변덕이 뇌화부동 한다. 결국 베스트셀러는 작품이 아니라 상품일 뿐이다. 

나는 독자가 필요할 뿐이다. 단 몇 사람이라도. 내 소설의 배경과 가치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소설 속에서 독자 나름의 분석과 해석, 추론을 통해 창조적 행위인 작가도 모르는 메시지를 스스로 만들어내고, 의미를 찾아내는 진지한 독자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내가 알고 있는, 독일의 해석학자인 가다머, 그리고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인 자크 데리다의 해체주의적 독해법이 아니겠는가. 나는 내 소설의 작가이면서 동시에 가장 진지한 독자이다. 나는 내 소설을 끊임없이 독자의 관점에서 새로 읽고 그 텍스트를 새로 해석한다.

그래서 작가의 논리와 주제, 담론에 무작정 따라가지 않고 독자의 관점에서 새로운 해석, 또 다른 해석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것이다. 

4. 언제쯤 ‘사하라’의 주인공 김규현의 세계를 탈피할 생각이십니까? 이것은 상호 텍스트와 관련 있겠습니다. 그런데 왜 사막이 무대가 되어야 하지요?

• 지금까지 나온 내 작품들에는 소위 말하는 상호 텍스트적 요소들이 여기저기 흩어진 채 들어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새로운 자료와 주석을 참고하고 상상력을 발휘해서 내가 구축한 세계를 더욱더 확장하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담론을 심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이야기의 뒤에는 그 인물들의 또 다른 삶이 있다.

사막에는 완벽한 침묵이 존재한다. 사막에서 유일하게 귀중한 말은 침묵이다. 그곳에서 인간의 목소리는 언어가 되기 전에 먼저 침묵과 조우한다. 대지에서 울리는 느낌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에 사막은 인간의 영혼을 사로잡는 주술적 마력을 갖고 있다.

5. 법률가로서 성공한 이후에 2모작으로 작가에 도전하고 있는 것을 보인다. 작가관이 궁금하다. 작가란 누구이고, 무엇인가, 작가는 고독해야만 하는가.

• 내가 법률가로서 성공했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성공이란 게 무엇인가. 이쯤 해두자. 작가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작가란 항상 실패할 것이라는 느낌에 사로잡혀 있으니까 결국 패배주의자이고, 작품을 쓴다는 일에 중독되어 열중하고 있으므로 센티멘탈리스트이고, 니힐리스트이고, 불면증 환자이다. 그래서 그는 실패자나 낙오자 이야기를 쓰게 된다.

작가의 글쓰기는 ‘인생을 어리석게 사는 확실한 방법이며 스스로를 일상으로부터 고립시키고, 어느 누구에게도 필요치 않고 아무도 원치 않는 일’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건 폴 오스터가 한 말인데 나는 그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하여 가상의 세계를 구성하고 그때 미학적 쾌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나는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을 작품을 쓰게 되지 않을까, 서사 능력이 고갈되어 쓰다가 막히면 결국 미완으로 남을 것이 아닌가, 하고 항상 근심 걱정을 하고 있다.

작가에게는 고독이 필요하다. 작가란 결국 자기의 내면을 끝까지 파고들어야 하니까.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내야만 한다. 그러므로 자기중심주의자, 나르시시스트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작가는 허황된 소리에 불과한 ‘영감’이 아니라 끈기와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터키의 속담처럼 ‘바늘로 우물 파기’라는 끈기와 인내가 필요하다.

6. 자신이 쓴 소설 또는 에세이가 마음에 드나요? 독자들에게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 나의 소설이나 에세이의 첫 번째 독자는 나 자신이다. 지독하게 꼼꼼하고 냉철한 독자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작가로서 진실을 추구한다. 그 진실이란 것이 인간 삶의 진실 혹은 죽음의 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글이 어렵다는 것은 첫 번째 책임은 필자에게 있다. 독자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글을 필자는 이해하고 썼을까? 필자는 남의 것을 베끼거나 또는 훔치면서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했고 또한 그것을 표현하는데 역량 부족으로 요령부득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독자에게는 문제가 없을까? 독자 역시 성실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도 않았으면서, 읽다가 중간에서 그만 뒀으면서, 대충 읽고 나서 어렵다고 하면 그건 독자 탓일 것이다.

7. 소설의 시대는 마감되지 않았는가요? 현대소설을 어떻게 보아야만 할까요? 변호사님은 어떤 소설 또는 어떤 책에서 영감이나 감명을 받은 적이 있나요.

• 요즈음, 하찮은 일상을 지저분하게 늘어놓은 수필이나 에세이 류, 여행기 또는 신변잡담을 늘어놓은 일기장 같은 소설, 자폐증에 걸린 사람의 중얼거림 같은 소설, 새로운 것, 신기한 것에 강박관념이 든 나머지 얼토당토 않는 해괴망측한 소설들이 넘쳐 난다. 그래서 독자들이 지겨워서 떠나고 있는 것이다.

그랬으니 현대 소설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시와 비교하면 그 역사가 극히 짧은 젊은 장르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일부 평론가들과 작가들 스스로 소설에 사망선고를 내린 것이다. 경제적 관점에서 보자면 수요는 늘어나지 않고 계속 줄어드는데 이상한 소설은 공급과잉인 것이다.

그런데 호모 사피엔스가 탄생한 이래 수만 년 동안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명의, 익명의, 이름 있는 이야기꾼, 작가들이 이미 수백 번, 수천 번을 넘게 똑같은 형식과 내용, 재료,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우려먹었으니, 단언컨대 새로운 것이 남아 있을 리 없다. 모든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의 변형이고, 변주일 따름이다. 모든 것이 이미 쓰여 졌다.

우리는 다만 과거를 기억하고, 모방하고, 가끔 훔칠 뿐이다. 그러니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은 헛된 일이거나, 자기기만에 불과한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는 남의 것을 훔치고 모방을 하며 배운다. 내가 무슨 탁월한 상상력이나 번뜩이는 영감이 있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주로 누구로부터 모방을 하고 배우고 있는가. 그 동안 수천 권의 책을 읽고 또 읽었고, 지금도 매일 눈이 짓무르도록 매일 책을 읽고 있으니,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그 수많은 경우를 어떻게 기억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야기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음식 섭취에 대한 욕구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이다. 우리는 천일야화를 읽으면서 인간의 그 욕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물론 19세기 소설의 전성시대를 기대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현대에 와서는 영화나 드라마가 소설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정확한 세부 묘사를 통하여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마술적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소설일지라도 처음과 끝이 있는 이야기여야 할 것이다. 소설은 현실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성실해야 한다.
 
8. 소설 ‘사하라’와 에세이 ‘나는 무신론자’인가를 보면 신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종교관이 궁금하다.

• 플라톤이 말했다. ‘젊어서 무신론자가 늙어서도 무신론자인 경우는 하나도 없었다.’ 나 역시 나이가 들자 유신론자가 되었다. 그러나 유일신은 믿지 않는다. 그 신은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너무 두려운 것이다. 나는 소박한 범신론자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의 조건은 신의 문제를 외면하고는 그걸 따질 수가 없다.

9. 행복이란 무엇인가요? 변호사님은 행복했던 때가 있었던가요?

• 행복은 바로 순간일 뿐이다. 우리가 행복에 도달하는 순간 우리는 그걸 잊어버린다. 그러므로 행복을 추구하는 일은 바보짓이라고 본다. 나의 경우 행복은 열정적으로 몰입할 때이다. 모든 것들, 사람들, 사건들, 사물들, 관계 등을 잊어버리니까. 나는 책을 읽을 때와 글을 쓸 때 그리고 섹스를 할 때만 오로지 열정적으로 몰입한다.
그러나 카프카는 ‘Post coitum omne animal triste (교미 후에는 모든 동물이 슬프다.)’라고 하였으니.   

10. 원로 선배로서 젊은 변호사들에게 멘토로서 한 마디 해달라. 다이내믹한 삶을 살았다. 혹시 나중에라도 자서전을 쓸 계획은 있는가.

•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자칭 원로가 득세하고 있다. 당연히 나는 원로 변호사가 아니다. 내가 무슨 경험과 공로가 많은 변호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인간은 고독한 존재이고 언제나 혼자이다.

모든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소위 원로들이 멘토 운운하는데 그들 스스로가 멘토가 될 자격이 있는지 되돌아봐야할 것이다. 남에게 충고와 조언을 많이 하는 사람일수록 위선자인 경우가 많다. 자서전은 자기 자랑을 하기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닌가. 모든 자서전에는 과장과 미화가 너무 심하다.

그러니까 전혀 솔직하지 않다. 우리나라 전기는 유명한 사람의 자손이 조상을 기리기 위해서 대필 작가에게 많은 돈을 주고 쓰게 한다. 그러니 제대로 쓸 수 있겠는가. 공자님이나 예수님인 것처럼, 인간적 결점이 단 하나도 없는 것처럼 써야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손들이 무척 화를 내니까. 그리고 대필료 잔금을 주지 않으려고 할 것이니. 그러니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우리 사회는 언제쯤 더욱 성숙해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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