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찬
그런 저런 일을 겪으며, 나는 오랫동안 ‘무소속’의 설움(?)을 겪었던 터라 오랜만에 맛보는 당원으로서의 푸근함이 참 좋았다. 특히 어디를 가나, 뭐가 되었든, 일단 열심히 뛰어야 비로소 사는 것 같은 내 성격에 참으로 오랜만에 국회 <통신과학기술 위원회>의 상임위원장으로 할 ‘일’이 쏟아져 오니 그 또한 오랜만에 맛보는 행복이었다.

무엇보다 한평생 야당을 하면서 잔뼈가 굵어온 당의 선배들과 동료들이 풍기는 이른바 ‘야당 분위기’에 호기심을 느끼며 하나하나 배워가는 재미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만족감에 빠져 있는 것도 잠시, 나는 이종찬 씨와의 약속을 지키지 위해 뛰어야만 했다. 처음에는 ‘빨리 들어오라’며 이종찬 씨를 빨리 영입하려던 민주당 내의 움직임은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밖에서 군소정당을 모아 힘을 모아보려던 이종찬 씨의 노력도 잘 되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일 년여가 지나자 당에서는 이제 아예 영입하려는 의도조차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야권통합 분위기가 사그라들자 당내 지도부에서 여러 가지의 정치적 저울질, 그러니까 과연 이종찬 씨의 영입이 득이 될 건지에 대한 판단이 고려되기 시작된 것이다.

특히 당시 이기택 총재는 동교동계의 견제를 뚫고 당내 입지를 마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시점이었다. 나는 이렇게 가다가는 안되겠다 싶어 이기택 총재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이종찬 씨는 어떻든 한번 대선에 나갔다가 상처를 받은 사람입니다. 지금 이때 안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솔직히 이 총재님과 이종찬 씨야말로 삼김 시대의 정치인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다음 세대의 정치를 열어갈 당사자들이 아닙니까?

흔히 말하는 4.19세대들이고, 한글세대의 장남들이기도 합니다. 또 그 뒤에는 저희같은 6.3세대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종찬 씨가 들어온다 해도 설마 동교동계로 갈 리가 있습니까? 여당에 있을 때부터 이종찬 씨는 일관되게 양김청산을 부르짖으며 새정치 운동을 주장해 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나와 어려운 고비를 함께 넘겨온 사람이니 내가 그렇게 하자고 하면 할 겁니다. 그러니 빨리 전당대회를 열어 영입을 합시다.“

나는 계속 그렇게 설득을 하면서 동시에 이종찬 씨와 이기택 씨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셋이 만난 자리에서도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자, 지금이 시기입니다. 빨리 입당하도록 합시다.”

결국 이종찬 씨는 김근태 씨와 함께 입당을 했다. 오유방 씨와 이영일 씨 등도 함께 입당을 했지만 아무튼 그 전당대회는 이종찬 씨와 김근태 씨를 위한 입당처럼 되어 어떻든 나는 이종찬 씨와 했던 약속을 지킨 셈이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이종찬 씨와 한 식구가 되었다. 그러나 결국은 그로부터 엄청난 비극이 초래되리라는 걸 어찌 그 때인들 상상이나 했으랴.

아, 그 사건!

나는 나대로 열심히 한다고는 했지만 국민들이 과연 ‘장경우’라는 사람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날 그 사건을 겪으며 ‘장경우’는 일약 유명해져 전국적인 인물이 되고 말았다.

그 날 이후 장경우하면 많은 사람들은 ‘아, 그 경기도지사 사건’이라며 내 이름을 떠올린다.

바로 1995년에 있었던 6.27지방선거 때의 일이다. 내가 정치권에 남아있는 한 결코 잊을 수도 떨쳐낼 수도 없는 바로 그 사건! 울분과 통한없이는 결코 떠올릴 수 없는 바로 그 사건을 나는 이제 다시 말한다.

내가 이 한 권의 책을 쓰게 된 것 역시 어쩌면 바로 그 사건을 말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 사건은 내 일생일대 최고의 수치요, 최고의 배반이었으며, 최고의 상처였고, 최고의 절망이자 분노였다. 그리고 나는 그 속에서 가장 추악한 정치의 이면을 보았다.

TK 민주당?

먼저 내가 이기택 총재와 부쩍 가까워지기 시작한 일부터 얘기를 해야겠다. 95년 4월의 일이었다. 당시 국민당은 김복동 씨가 총재로 있었다. 그런데 그 즈음 야권통합 논의가 다시 시작되면서 국민당과의 통합 운동이 시작되었다.

만약 두 당이 통합할 경우 100석이 넘는 거대 야당이 탄생되는 셈이었다.

유준상, 강창성 씨와 내가 그 협상대표로 나가기 시작했다. 국민당 측에서도 의외로 적극적으로 나오면서 회의는 무척 빠른 속도로 진행되어 갔다. 사실 당시 민주당의 당수였던 이기택 총재는 이 회담에 적극적일 수박에 없었다.

당시 김대중 이사장의 정계복귀설이 심심찮게 터져 나오면서 이기택 총재는 나름대로 자신의 당권을 지킬 수 있는 방법으로 TK 기반의 국민당과의 통합을 생각했던 것이다.

거의 통합이 완료되어 갔다. 협상 내용은 당대당 통합을 원칙으로 하고, 곧 다가올 지자제 선거와 관련해서는 서로 일정지분을 할애하고, 이기택, 김복동 두 사람이 공동대표를 맡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공동대표를 하는 것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바로 지자제 선거가 다가오는데 공동대표일 경우 혼란을 겪을 수 있다는 우려였다.

공동대표를 할 경우 후보 공천자에 대해서 두 사람이 다 사인을 해야만 하는데, 만약 공천자에 대해서 양 당의 대표가 합의하지 않을 경우 공천장도 못주는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 광정에서 나온 결론은 이랬다. 정치적으로는 두 사람이 공동대표를 하고, 다만 법률적으로만 이기택 씨가 대표를 맡는 방법이었다.

합의는 잘 되었다. 마지막에는 김복동 씨와 이기택 씨와 나 셋이서 만나 합당의 기본합의서를 작성했고, 마침내 국회 귀빈식당에서 합의문 낭독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불과 2,3일 후 국민당 측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법률적으로도 공동대표를 맡지 않으면 절대로 통합할 수 없다는 거였다. 급히 최고위원회의가 다시 열렸으나 민주당 측에서도 역시 법률적으로까지 공동대표를 주는 것은 절대 불가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결국 모든 합의는 무산되고 말았다.

통합이 물 건너가 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기까지 그 이면에는 또 다른 정치적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동교동계의 견제였다. 이기택 총재가 국민당과의 통합을 추진했던 이유가 동교동계에 대한 견제였던 만큼, 동교동계 역시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던 것이다.

만약 그 때 이기택 씨가 “이미 국민 앞에서 정치적으로 선언한 거니 어쩔 수 없다”며 조금만 더 강하게 나오면서 그 합당이 잘 추진되었다면 세상은 또 달라졌을 것이다. 민주당이 커지면서 이기택 씨의 위상은 더 높아졌을 것이고, 여기에 TK 기반의 국민당 의원들까지 들어와 있다면 김대중 이사장의 정치 복귀도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오늘날의 자민련도 탄생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역시 ‘만약에’일 뿐이니, 정치란 수많은 이런 가능성 속에서 과연 어떤 줄기로 나아갈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아무튼 협상 테이블에 나갔던 나는 그 과정에서 이기택 총재와 자주 만날 수밖에 없었다. 자주 만나면 정도 들기 마련, 그 속에서 나는 이총재로부터 뜻밖의 제의를 받기에 이르렀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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