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
이기택 총재의 뜻밖의 제의

어느 날 이기택 총재가 나를 불렀다.

“장의원! 이번 지자제 선거가 중요한거야 두말하면 잔소리 아니겠소? 그 중에서도 서울과 경기도에서 만큼은 꼭 우리가 이겨야 할텐데 말이요. 현대 경기도지사의 경우는 안동선 씨가 강하게 원하고 있는데…내가 볼 때는 말이요, 이 사람으로는 여당을 꺾기가 힘들 것 같다 이거란 말이오. 현재 국민들 사이에는 반YS감정이 고개를 들고 있는데…어때요? 장의원! 당신이야말로 YS와 싸우고 나온 사람 아니요? 여야 경험도 풍부하고, 또 반YS라는 선명성도 있고…나는 말요, 당신이 이번에 나갔으면 좋겠는데!”

“예? 아이쿠, 저는 그런 생각 해 본 적 전혀 없습니다.”

“왜? 생각을 안해 봤다면 이제부터 생각해도 되잖아?”

“그런 생각을 그렇게 빨리 할 수 있습니까? 저는 아무튼 생각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찾아보시죠.”

“그렇게 말을 자르지 말고 좀 생각해보라구!”

“글쎄요…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좀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을 찾아보세요!”

나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정말 생각해 본 적도 없고, 또 생각해 본다 해도 왠지 내키지도 않았다. 그런데 일주일 쯤 지났을까? 당에서 이기택 총재를 만났다.

“장의원! 왜 답이 없어?”

“예? 뭐요?”

“허허! 이사람이…지난번에 했던 말 말야!”

“아! 그거요? 제 의견이야 말씀드렸고…더 이상은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요?”

“허허! 참내, 그게 말이나 되요?”

“아이쿠, 자꾸 부담 주지 마십시요! 정 그러시면 일단 제가 사람을 추천할께요!”

“그래? 누구?”

“…반YS기치야 저 혼자 들었던 것도 아니고…평택의 이자헌 의원도 있잖습니까? 경기도에서 4선이니까. 그래도 가장 많이 당선된 사람이고 지금 무소속으로 있으니까 영입해서 하면 될 것 같구요. 또 이재창 씨도 좋지 않아요? 얼마 전에 경기도지사도 지냈겠다, 또 환경부장관도 지냈겠다…좋을 것 같은데요? 저야,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고맙고 그렇지만, 민주당에 온 지 불과 1년 반밖에 안되었고, 또 평소에 도지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적도 없고요.”

“…흐흠! 당신이 그렇게 정 싫다면 어쩔 수 없긴 없는데…”

그리고 나는 또 잊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자헌 씨는 자신이 별로 원하지 않아서 아예 접촉을 안한 것 같고, 이재창 씨같은 경우는 거의 내락을 다 받아 놓은 상태였는데 막판에 그만 이재창 씨가 포기했다고 한다. 그 역시 후에 안 일이지만 청와대의 모 수석이 이재창 씨의 학교 선배였는데 그 선을 통해 만류가 들어왔던 모양이었다.

1995년 4월27일, 이기택 총재로부터 천안의 유관순 기념관에 동행하자는 연락이 왔다. 아우내 장터의 만세사건을 추모하는 행사장에 가는 길이었다. 나와 조순형 씨가 부름을 받고 톨게이트에서 기다리다 합류를 했다. 그런데 이기택 총재가 자꾸만 자신의 차를 타라고 권했다. 일단 나는 이기택 총재의 차에 탔다. 그리고 그 차안에서 다시 그 얘기가 시작되었다. 내가 추천했던 사람들이 다 안되었으니 이제 ‘당신이 책임지라’는 농담반 진담반의 얘기였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그 앞에서 자꾸만 못한다고 말하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결구 나는 “일주일만 시간을 주십시오. 제가 일단 최종적인 검토를 해보고 결정을 내료 말씀드리겠습니다”고 말했다.

그 역시 상상이나 했으랴!

나는 일단 이종찬 씨를 만났다.

“뜻밖에 이런 출마 권유를 받았는데… 아시다시피 나가려면 당내 경선을 거쳐야 하고, 그렇다면 입당한 지 1년 반밖에 안 된 나로선 대의원들도 낯설고…어떻게 해야 하는 거요?”

“걱정하는거야 알겠는데…당 총재가 그래도 두세 차례 권유하는 걸 덮어놓고 거부만 한다는 것도 그렇잖아? 긍정적으로 검토해보지 그래?”

이찬 씨의 대답은 의외로 쉬웠다. 그러나 내 걱정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렇다쳐도 선거 치르려면 돈이 제일 문제인데… 아시다시피 내가 여당 떠나 야당하면서 돈 다 쓰고, 또 선배 대선과정에서 여기저기 신세 다 지고, 솔직히 돈을 끌어올래야 끌어올 데도 없잖습니까? 솔직히 남아있는 힘이 없어요 그리고 경선만 해도 그렇습니다. 안동선 시야 몇 십 년 야당한 사람인데 그 사람은 모든 대의원들을 다 알 것 아니요? 나는 겨우 1년 반된 사람인데 솔직히 게임이 되겠어요?"

"이 사람아, 무슨 경선이 꼭 대의원들을 알고 모르고가 그렇게 중요하나?"

"물론 그렇지만 일단은 꼭 그렇다는 얘기죠."

"그리고 말야, 이기택 총재가 그렇게 나가라고 했으면 그 쪽에서 뭔가 대책이 있으니까 그럴 것 아냐? 대의원들 문제는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 같고… 아무튼 긍정적으로 검토 해 보라구!"

이종찬 씨의 대답은 적극적인 권유였다. 그러나 그 역시 그 후에 겪게 될 일을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좋습니다! 한번 해 보죠!

이종찬 씨까지 이렇게 나오자 나는 그제서야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먼저 가까운 동지들과 함께 여러 가지 데이터를 놓고 판가름을 해 보았다. 마지막에는 이런 저런 여론조사까지 실시를 해 봤다. 당시 여당에서는 이인제, 임사빈, 이해구 씨 등이 출사표를 던져 놓고 당내 경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우리가 조사한 여론 조사에 의하면 여당 후보가 이인제 씨일 경우는 오히려 내가 이기는 것으로, 그리고 임사빈 씨 경우는 좀 힘들긴 해도 역시 이기는 것으로, 이해구 씨의 경우는 상당히 경합이 예상되는 것으로 나왔다. 여론조사의 결과를 놓고 볼 때는 최소한의 선거자금을 가지고 해 보면 '해 볼만 하다'는 결론이 나온 것이다.

더군다나 그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주변에서 막 결심을 촉구하고 있던 시기에, 여당에서는 이미 이인제 씨로 결정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큰 걱정거리였던 선거자금 문제도 조금 부담이 덜해졌다. 최소한의 선거비용으로 해 볼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나는 이기택 총재를 만났다.

"좋습니다. 하겠습니다! 단 당내경선에 관한 한 총재님이 도와주셔야만 합니다. 일단 제가 알고 있는 대의원도 적을 뿐 만 아니라 야당 대의원들의 분위기도 잘 알지 못합니다. 당내경선 과정에서만 도움을 주신다면 본선에서는 제가 알아서 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국가에서 허용하는 선거법정비용만큼은 당에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돈이 없습니다."

'좋아! 그런 것은 걱정 말고 아무튼 장의원은 빨리 준비를 하라구!"

그렇게 나는 몇 가지의 단서를 달고 경기도지사 당내경선 출마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바로 공식 출마선언의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불편한 관계의 전주곡

내가 출마 약속을 한 다음 날, 불과 하룻만의 일이다. 갑자기 당시 민주당 최고위원이었던 한광옥 의원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한광옥 씨와는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다. 약속 장소는 맨하탄 호텔이었다. 앉자마자 한광옥 씨가 먼저 말을 꺼냈다.

"신문에 보니까 도지사 나간다던데… 정말이야?"

"이총재가 자꾸 권하는데 계속 거절하는 것도 여의치 않고… 그래서 이런 저런 검토를 해봤더니 또 해볼만 하다는 결론이 나오더라구, 그래서 최종적으로 바로 어제 결정을 내렸지, 지금 공식 출마선언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야."

그런데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한광옥 씨가 갑자기 물었다.

"만약 이종찬 씨가 나오면 어떨까?"

"뭐?… 그 양반이 어떻게 나오나? 다 알다시피 그 양반이야 서울이 근거지고, 그래도 대선 후보까지 갔던 사람인데, 서울시장 후보라면 몰라도… 아마 그 양반이 하라고 해도 안 할걸?"

"… 지금 권노갑 의원과 그런 저런 얘기를 하고 있을거야!"

"그래? 나야 뭐, 그 양반이 한다고만 한다면 좋지!"

정말 그것은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런 저런 상황 속에서 결정한 일이지만, 만약 이종찬 씨가 한다고만 한다면 나로서도 아주 흔쾌히 반길 일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이종찬 씨로부터 다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약속장소는 서교호텔이었다. 역시 이종찬 씨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어제 저녁에 갑자기 권노갑 의원이 왔더라구! 그러면서 김대중 이사장 뜻이라며 경기도지사 출마를 권우 받았는데… 도대체 어떡해야 하는 거야?"

"나는 또 선배가 해보는 방향으로 하라고 해서 이것저것 검토해보니 해 볼만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총재에게 하겠다고 말을 했죠!"

"했어?"

"그럼 했죠!… 솔직히 나 어제 한광옥 씨 만났어요… 이거 도대체 무슨 일인지… 그나저나 어떻게 할거요?"

"어떻게 하긴! 내가 무슨 경기도지사야… 안 그래? 경기도하고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인데…"

"아, 그래 나도 그런 말도 하긴 했는데… 어떻든, 어떻게 하실거요?"

"… 아무튼 내가 김대중 이사장을 만나보고 와서 당신과 다시 만나기로 하지!"

나는 사실 그 때까지만 해도 이종찬 씨와 흉허물 없이 지내는 사이였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 말을 가려가면서 하는 처지도 아니었다. 상황이 좀 묘하게 풀린다 싶기는 했지만, 설령 묘하게 풀려 뭔가 강등구조가 일어난다 해도 역시 이종찬 씨와 나는 그 갈등구조의 한편에 있지. 우리 둘 사이에 그런 갈등구조가 생기리라는 걸 전혀 상상하지 않았다.

"만약 이선배가 하고 싶다면 괜히 상황 이상하게 만들지 말고, 지금이라도 뜻을 밝혀주세요, 괜히 또 우물우물하다가는 선배하고 나 사이까지 이상해지니까…"

"참내, 당신까지 자꾸 그러면 어떡해? 내가 어떻게 경기도지사를 나가나, 이 사람아!"

지금 생각해봐도 나는 이종찬 씨가 당시까지는 자신의 말 그대로 전혀 뜻이 없었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는다. 게다가 당시 여당 후보였던 이인제 씨만해도 나같은 경우에도 어리게 봤던 후배였으니, 어쩌면 경기도지사에 나가라는 얘기가 불쾌하게 들렸을 수도 있었다.

물론 정치에 선후배가 정해져 있는 건 아니지만, 정서상으로 느껴지는 그런저런 느낌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않은가! 아무튼 당시까지도 이종찬 씨가 전혀 생각을 안했던 건만은 분명하다. 그 다음 날 그것은 확인되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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