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함을 호송하라!

그 때 대의원 사이에서 고함 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야, 지부장 뭐하는 거야? 빨리 방맹이 두드리고 개표히야할 것 아냐!"

당시 경기도 지부장은 이규택 의원이었다. 그 고함 소리에 이규택 의원이 막 단상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드디어 그 우명한 난동사건이 터졌다. 우루루 달려나오더니 지부장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가기 시작하는데… 난리 난리 그런 난리가 없엇다. 이규택 의원은 아예 와이셔츠가 다 찢어진 상태에서 넥타이가 붙잡힌 채 끌려가고 있었다.

( 부총재로 있던 지도부의 모 의원은 아예 그 앞에 나와 진두지휘를 하고 있었고, 전국구로 당선된 한 여성의원은 역시 전국구였던 강창성 의원은 고함을 질러댔다.)

"야! 너 국회의원 뺏지 누가 달아줬어!"

폭언과 폭행으로 강당 안은 전쟁을 방불케 했다. 순간 나는 이미 모든 것은 '늦었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일이 된 상황에서 이것은 누가 양보를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벌떡 일어나 참모들에게 지시했다.

"당장 경찰 부르고, 투표함 전부 봉인하고 이서해서 중앙당으로 호송하시요!"

그리고 나는 사람들을 밀쳐내고 이규택 의원을 데리고 나와 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당사로 가 참모들을 위로하고 집으로 돌아오니 새벽 1시였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참모들은 중앙당으로 호송된 투표함을 지키기 위해 교대로 밤을 새웠다고 한다. 그렇게 내 일생일대 최고의 악몽의 하루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마침내 국민배우(?)가 되다!

다음 날 아침! 내 얼굴이 그렇게 신문에 많이 나는 것은 아마 이 후에도 없을 것이다. 1면부터 끝 면까지 신문은 온통 민주당 경기도지사 '사태'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갑자기 내가 온 국민이 손가락질하는 국민배우(?)가 되어 버린 것이다.

'야당의 경선대회-돈봉투와 폭력으로 얼룩지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신문은 온통 여당편이 되어서 야당을 두드려대고 있었고, 마치 장경우가 돈봉투를 뿌린 것처럼 묘사를 해대고 있었다. 너무 기가 막혀 분노도 일지 않았다. 나는 그저 하늘만 바라 볼 뿐이었다. 정말 하늘이라도 원망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졌기에, 한 때 판단 한 번 잘못해 이제와서 이런 망신을 당하는가! 정말이지 '해보겠다'고 이총재 앞에서 말했던 그 순간이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원망은 원망이고, 신문의 보도만은 분명 바로 잡아야 했다. 나는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당으로 나갔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당사자는 지금 경찰에 있지 않습니까? 대변인! 당신 당장에 성명 내시오! 철저히 조사해야만 하고, 나 또한 조사를 받겠다고 하시오. 정말 돈봉투를 준 사람이 있는지, 그 사람이 누군지 밝혀내라고 관계당국에 촉구하시오. 그리고 전날 합숙건에 대해선 이장희 의원에게 물으면 정확한 답이 나올 것이오. 아니 야당의 전통이었던 대의원 합숙을 문제 삼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란 말이오? 아마도 모든 저의가 있는 모양인데, 어떻든 이것은 당내 절차에 따라 밝히면 될 겁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떠나 어떻든 일단 대의원들의 투표권 행사의 내용은 밝혀져야만 합니다. 나는 이것만큼은 걸대 양보를 못합니다!"

그러나 결국 그 날도 개표는 안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안동선 의원 측에서 성명을 냈다. '나는 개표와 상관없이 물의에 책임을 지고 후보를 사퇴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개표 전부터 사퇴를 하자고 말했던 안동선 씨였다.

결국 모든 것이 각본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물러설 수 없었다. 이제 이것은 누가 되고 안되고의 문제를 떠난 것이었다. 이것은 상식과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3일만의 개표

마침내 이기택 총재가 당시 선거관리 위원장이었던 홍영기 국회부의장에게 공개적인 개표를 촉구했다. 전 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 홍영기 씨의 주관 하에 개표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1차 투표 당시 과반수에서 2표 모자라던 내 표는, 그 우여곡절을 다 겪으면서도 오히려 표가 늘어 과반수를 넘고 있었다. 의외의 결과가 나와 버린 것이다. 나는 '대의원'이라는 사람들에 대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공표분위기 속에서, 게다가 제3의 후보였던 정관희 씨가 저쪽을 지지한 마당인데…대의원들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표를 지켰던 것이다.

어떻든 대의원들의 투표는 3일 만에 개표가 되었고, 당선자는 장경우로 확정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나의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당선과 공천의 거리

다음에는 이제 '공천 안주기'였다. 당내경선을 통해 당선이 확정된 사람이 이제 공천을 받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공천을 결정하는 당 최고위원 회의에서 공천을 결정하는데 그로부터 무려 한 달이 걸렸다. 그 한 달 내내 연일 신문의 정치면은 열었다하면 '경기도지사 사건'이었다.

내 생전에 그렇게 유명세를 타보기는 그 때가 아마 처음일 것이다. 제일 속이 상한 것은 집안 식구들이 느끼는 고통이었다. 그 때는 미국에 유학 가 있던 큰 아이까지 다 들어와 있던 상황이었다. 하루는 큰 아이가 조용히 서재로 건너왔다.

'아버지! 그만 두세요. 이러다가 더 망신당하실까 그게 겁나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정치하면서 바쁘다며 언제나 집 안은 아내에게 맡겨둔 채 밖으로 나돌 수밖에 없었고, 또 게다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선거 때면 온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기 일쑤였던 부족한 아버지였는데, 이제 자식들에게 이런 고통까지 줘야 하나 하는 걸 생각하니 차마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 덮어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가 여기서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나는 더 이상은 정치를 못한다. 내가 여기서 포기를 하면 나는 돈봉투를 뿌린 사람이 되고, 마치 내가 함량미달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도지사 출마 여부는 둘째 치고라도 이것만은 분명하게 확인되어야 한다. 정치를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이렇게 그만둘 수는 없다. 우리 힘들더라도 조금만 더 견뎌보자!"

정말 눈물이 났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이제와서 아이들에게 왜 이런 아픔을 줘야만 한단 말인가! 민자당을 탈당하고 난 후 그 힘든 시간도 잘 견뎌왔는데…

그 와중에서도 당에서는 또 자체적으로 조세형 씨를 위원장으로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매일같이 보고서가 나왔다. 이미 다 밝혀진 사실을 가지고 자꾸만 양쪽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고서가 나오니 내가 항의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보고서가 나오면 조세형 씨에게 쫒아가 항의하고, 이제 돈봉투 문제가 마무리 지어지면 다시 폭력문제로 보고서 나오고, 다시 쫒아가 항의하고…그렇게 한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여당의 이인제 후보는 야당이 그런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는 사이 이미 선거운동에 돌입해 있었다. 특히 야당의 후보가 없으니 TV토론회가 성사가 안되었고 그러다 보니 아예 거의 독주하다시피 하면서 선거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민주당에는 또 사건이 터졌다. 당시 경기도지사 뿐만 아니라, 각 시장 군수 등의 공천에도 문제가 많아 매일 당사 앞에서 항의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 한 번은 시위대가 당사의 총재 방까지 밀려들어와 이총재의 사진을 발로 밟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내 사건과는 관계없이 벌어진 떠 하나의 사건이었다.

마침내 이기택 총재가 폭발하고 말았다. '이건 동교동계에서 시킨 일이다'고 판단을 하고 '나는 이런 식으로는 당 대표 못한다'는 선언을 남긴 채 지방으로 내려가 버린 것이다. 그러자 동교동계에 비상이 걸렸다. '이러다가는 조순 서울시장 후보도 망한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러자 한광옥, 권노갑, 박지원씨 등이 이기택 씨의 귀향길에 마중을 나갔다. 그리고는 '내일 경기도지사 공천도 발표하고 다 합시다. 김대중 이사장님도 다 양해가 된 사항입니다'고 사과성 발언을 했다.

이쯤해서 사태가 정리되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기택 총재 쪽에서 강수를 뒀다. '권노갑 의원이 당을 떠나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결코 복귀 않겠다!'고 선언을 해 버린 것이다. 거의 당이 분열되느냐 마느냐의 상황으로까지 전개되고 말았다. 서로 당을 그만두네 마네 하는 상황 속에서 도지사 선거는 어디로 갔는지 아예 입 빡에도 거론 안되면서 또 다시 일주일!

겨우겨우 동교동계가 사과를 하고 또 이기택 통재도 양보를 하고 하면서 수습이 되는가 싶었다. 그러면 이제 결정이 나겠지! 그런데 이제 동교동계가 또 마음이 바뀌었다. 그러면서 이종찬 씨 얘기가 또 나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김대중에게 잘 보여야 정치한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다시 이종찬 씨 얘기가 나오자, 이제는 적반하장 식으로 오히려 내가 더 문제아처럼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처음 말이 나오는 순간부터 무려 1달 반 동안, 계속 이종찬 카드를 흘리니까, 이제는 주변에서 서서히 피곤해지기 시작하고, 그러자 '거 장경우 의원이 한 발 물러서면 끝나는데!'하는 식으로 생각들을 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사실 제3자야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당사자 입장에서 과연 그것이 그렇게 쉬운 문제일까? 그 아비규환의 틈바구니 속에서 나 역시 하루에도 몇 번씩 '그래 때려치자, 그만두자!'는 유혹에 시달렸다. 그러나 내가 눈물 흘리는 아들 손을 붙잡고 말했듯이 나에게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생명이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물러선다면 나는 있는 대로 상처만 받고, 그 상처를 해명해 볼 기회도 영영 잃고 만다. 그리고 어떻게 정치를 한단 말인가. 여기에서 만약 내가 굴복한다면 나에게는 정치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내 판단이었다. 나는 일년과도 같은 그 한 달을 하루에도 몇 번씩 유혹에 시달리면 견뎌내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하루는 고교 후배인 정대철 씨가 보자고 해서 나가니, 김원길, 박정훈 씨등 고교 동기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그러면서 하나같이 하는 얘기는 그거였다.

"장의원이 이종찬에게 양보하지!"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정대철 씨가 일생일대 최고의 실언을 했다.

"형님! 형님이 여당에 계셔서 잘 몰라서 그러는데…여기에서 정치하려면 어차피 김이사장에게 잘 보여야 하는 거유. 이쯤해서 모른 척 하고 양보하쇼!"

나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내가 알고 있는 정대철 의원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 정의원이 그런 식으로 말할 줄은 몰랐소. 나는 당신이 국민들로부터 정말 신망을 받고 있는 민주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그런데 당신이 어떻게 나에게 그런 말을 강요할 수 있는 건지 정말 실망했소… 그리고 다들 나에게 양보하라고만 하는데, 대체 날 더러 뭘 양보하라는 거요. 내 이방에서 한번들 생각해 보시오. 우선 공천자를 확정해 줌으로써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게 입증이 된 다음에야, 그 다음에 뭐를 하더라도 할 수 있는 것 아니요?"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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