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뿐인 영광

두 사람의 만남이 이뤄지고 있는 동안 나는 국회에 앉아서 오랜만에 참으로 마음이 편해졌다. 둘이 얘기가 잘 될 것이고, 나는 어떻든 그 결과에 따르면 된다는 입장이었고, 경기도지사 출마는 거의 체념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당내의 영향력이나 이런 걸 놓고 볼 때 이총재가 김 총재의 뜻을 거부하기는 상당히 힘든 상태였다. 게다가 수많은 소문에도 불구하고 김 총재는 은퇴를 할 상황이기 때문에 이 총재는 나름대로 대권에 대한 야망이 있었다.

그런데 어차피 전당대회를 통해 디선후보 지명을 받으려면 대주주인 김대중 씨의 지원을 받아야만 했고, 나는 그걸 위해 '내 문제는 포기하라'는 말을 이미 전한 상태였다. 그것이 나를 영입하고 추천한 이기택 총재에 대한 보답이랄까, 뭐 나는 아무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솔직히 마음은 편했다.

마침내 두 사람의 회의가 끝났다. 그리고 두 사람은 기자들 앞으로 활짝 웃으며 나왔다. 바로 회담 결과가 나왔다. '경기도지사 문제는 김 이사장이 전적으로 이 총재에게 맡겼다'는 것이었다. 이 총재는 '맞다, 나에게 맡겼다'며 재차 확인까지 했다. 그런데 그것은 두 정치가의 또 한 번의 '동상이몽'이었다.

사실 김대중 이사장은 계속 이종찬 카드를 얘기했고, 이기택 총재는'잘 알았습니다.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하고 그 자리를 마친 듯하다.

그러니 김 총재는 김 총재대로 '내 말을 잘 알아들었겠지!'한 것인데, 또 이 총재는 이 총재대로 생각이 달라 기자들 앞에서 '나에게 다 맡겼다'는 확인을 받는 후 '나에게 맡겼으면 내가 결정하는 것'이지 했고, 급기야 이기택 총재는 당으로 돌아와 선언을 해 버렸다.

"민주당의 경기도지사 후보는 장경우 후보로 결정났습니다."

한 달만의 확정! 그 날이 바로 6월 6일이었다. 6∙27지방선거였으니까 20일을 남겨둔 시점이었다. 하필 나는 또 그 때 장모님이 돌아가시는 불운을 겪었다. 그야말로 안팎으로 정신이 없는데… 기자들은 달려와서 회견을 요구하고… 막막했다.

나는 의원회관에서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2시간여 동안을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까지 상처투성이를 만들어 놓고, 이제와서 한 달도 못 남겨놓은 시점에서 나가 싸우라면 어떤 사람이 나가서 당선이 되겠는가!

한참 후 이기택 총재가 쫒아왔다.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 빨리 나가서 기자회견 해야할 것 아냐?"

"좀 앉아보십시오. 사실 공천이 확정 안되면 누명을 뒤집어쓰는 상황이라 지금까지 버텨오긴 했습니다만, 이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20일 남겨둔 시점에 출마를 한다고 하니까 솔직히 막막합니다. 홍보물이 만들어졌습니까? TV토론이 준비되었습니까? 하다못해 광고가 준비되었습니까… 한마디로 나가면 낙선을 예측해 놓고 뛰는 것인데 정말 이렇게 나가야 하는 겁니까?"

"허허! 이 사람아! 야당이 다 사움도 하고 그러는 것이지. 당신 야당 사람들을 몰라서 그러는데… 이제 또 뛰면 만사 제쳐놓고 뛰는 사람들이라구. 자 빨리 나가자구!"

사실 그 당시에 내 입장은 참 난처했다. 내가 거기에서 출마를 포기하면 이제 내 문제는 그만두고라도 이기택 총재의 입장은 또 워가 되는가!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원하지도 않았건만 이상하게 당내 갈등 사이에 끼어들어, 있는 대로 상처만 다 받고 이제 또 나가서 싸워야 한다니… 그러나 지금에 와서 내가 이기택 총재의 입장을 뒤집는 다는 건 정치인의 도리가 아니었다.

"… 좋습니다. 어차피 총재께서 그리 결정하신 것이니 제가 나가긴 나가겠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어려운 싸움이 되리라는 건 잘 아실 겁니다. 세상에 떨어질 것을 예측하고 뛰는 선거처럼 맥빠진 선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야당에 올 때 무슨 영화를 바라고 온 것도 아니고… 이번에 야당동지들은 깊이 사귄다는 걸로 생각하고 열심히 뛰긴 뛰겠습니다. 그러나 설사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은 총재와 당이 감수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나는 나가서 기자회견을 했다. '상처뿐인 영광이지만 이것을 계기로 우리당이 단합되어 좋은 성과를 거둘 것으로 믿는다'는 것이 내 출마변의 요지였다.

경기도가 더 이상은 서울의 봉이 될 수 없다

드디어 6월 10일 경선대회가 치러졌던 그 악몽의 안양문화회관에서 또 다시 도지부 대회를 열어 최종후보를 확정하고 새로운 시작을 다짐하는 대회가 열렸다. 선거 17일을 남겨둔 시점이었다.

나는 그 상황에서 내가 얼마나 힘겨운 선거전을 펼쳤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다 말하고 싶지 않다. 실제로 나에게는 17일이라는 선거 기간이 남아 있었는데, 경기도의 지구당만 해도 37개 지구당이었다.

강원도 접경인 가평으로부터 남쪽으로는 안성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경기도의 시∙군을 다 한 번씩 돌아보기에도 부족한 시간이었다. 새벽에 유세를 시작하면 어떤 지역은 아예 한밤중에 도착해 늦게서야 귀가하는 사람들을 붙들고 유세를 해야만 했다. 그나마 아예 찾아가지 못한 곳도 많았다. 선거운동을 할 시간도 없었던 것이다.

또 경선의 후유증이 얼마나 큰지는 이번에 한나라당에서도 나타나서 잘 알겠지만, 나는 당이 깨지느냐 마느냐까지 간 상황에서 그 난리를 치르었으니 오죽 심했겠는가! 성남 부천의 경우는 내 현수막이 3일 동안이나 걸리지 않을 정도로 비협조적이었다. 아예 홍보물을 돌리지 않는 지구당도 많았다.

그 와중에 유권자를 만나러 다닐 시간도 부족한데, 당의 동지들을 만나 설득하는 것에 시간을 빼앗겨야만 했다.

심지어는 홍보물을 쫒기며 갑작스럽게 만들다 보니 수량을 못 맞춰서 무려 17만 세대가 내 홍보물을 받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주로 신도시 아파트 지역에 아예 뭉텅뭉텅 빠져 버린 것이다. 그 정도였으니 다른 것은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러나 나는 안산에서 <중소도시 발전 연구소>를 했던 경험을 최대한 살릴 수가 있었다. 그 때 내가 내 건 슬로건은 '경기도가 더 이상은 서울의 봉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안상에서 의정활동을 하면서 뼈저리게 느낀 바지만, 경기도라는 곳은 마치 서울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는 곳처럼 되어버린 것이 실정이다.

서울의 인구 과밀화를 막기 위해 자족도시로서의 전망도 전혀 세우지 않고 대규모의 아파트만 들어서다보니 도시는 베드타운으로 전락했고, 그러다보니 출퇴근 시간대에 교통 대란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며, 서울의 중소기업들은 공해산업이라 해서 전부 경기도로 쫓겨 오고… 그뿐인가? 서울에 맑은 물을 대기 위해 상수원을 보호한다며 경기도 일대의 재산권이 침해받고 있으며, 쓰레기 매립장도 전부 경기도로 밀려오고 있던 상황이었다.

경기도가 더 이상은 서울의 봉이 될 수 없다! 그렇게 힘겨운 선거전을 치르면서도, 나의 이 슬로건은 차츰 유권자들에게 호응을 받기 시작했다.

DJ의 지지연설

내 첫 번째 유세는 평촌의 뉴코아 백화점 앞이었다. 마침 그 날은 정당연설회여서 김대중 씨가 연설을 하기로 되어있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 날 김대중 씨의 연설은 정계를 떠난 이후 3년 만에 처음으로 한 대중연설이지 않았나싶다. 김대중 씨가 다시 정계에 복귀할 것이다 말 것이다 하는 얘기들이 많이 오가던 바로 그 때였다.

과연 김대중 씨의 대중 동원력은 대단했다. 벌써 햇살이 따가웠는데도 정말 구름처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김대중 씨가 도착하기 전 나는 내가 느끼는 경기도 정책의 문제점 등을 주제로 연설을 시작했다. 그런데 연설 도중 저 쪽에서 김대중 씨가 입장하고 있었다.

'지금 여러분이 그렇게 보고 싶어 하셨던 김대중 이사장님께서 오고 계십니다. 3년 만에 다시 여러분 앞에 서는 이 지도자에게 우리 아낌없는 박수를 보냅시다!"

김대중 씨가 마침내 연단에 올라서 인사를 했다. 3년 만에 모습을 나타낸 김대중 씨였던 만큼 언론의 취재 열기도 대단했고, 유권자들의 환호 또한 정말 대단했다. 어떻든 조금 진정되자 다시 내 연설을 이어갔다. 그리고 다시 마이크를 넘겼다. 김대중 씨 역시 오랜만에 하는 대중연설이라서 그러는지 목이 상당히 쉰 듯 하면서도 표정은 상기되어 있었다.

김대중 씨가 참여하는 연설회는 항상 그런 식으로 진행이 되었다. 내가 한 10분 정도 연설을 하면 김대중 씨가 도착을 하고, 그러면 내가 연설을 멈추고 소개를 하면 인사를 하고, 나는 마저 한 5분 정도 연설을 마무리 지은 후 다시 김대중 씨에게 마이크를 넘겨주는 식이었다. 그러자니 상당히 신경을 쓰면서 강약과 내용의 중요성을 조절해 가면서 연설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엄연히 야당 후보였다. 야당의 지도자가 연설한다는 것은 곧 내 지지연설을 뜻했고, 그에 대한 환호가 곧 나에 대한 환호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연설은 단 몇 번으로 끝나고 말았다.

마지막 연설

내가 안양, 안산, 광명에 이어 유세장에서 김대중 씨를 네 번째 만난 것은 6월 19일 의정부 정당 연설회에서 였다. 역시 같은 수준으로 연설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경기도지사 후보인 나와, 의정부시장 후보 등을 지지연설해야 할 그 자리에서, 좀체로 후보지지를 호소하는 내용은 나오지를 않았다. 안양 평촌에서와는 전혀 달랐다.

그리고는 계속 남북문제랄지 김영삼의 실정에 대해서만 연설을 하고 맨 마지막에 명단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도지사에 장경우 후보, 시장에 누구, 시의원에 누구 누구… 이런 식으로 명단을 쭉 읽더니 이 사람들을 지지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으로 끝내버리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나는 김대중 씨의 유세 일정이 빡빡했기에 '지쳐서 그러시는 모양이다'하고 그냥 넘겼다. 그런데… 그 이틀 후인 6월 21일 부천에서 다시 정당합동연설회가 열렸다. 부천이야말로 경기도에서도 유달리 호남사람이 많았던 지역이었다. 그 주변지역의 지역구가 4개인데 그 중 세 의석이 민주당 의원일 정도로 민주당의 본거지나 다름없었다.

그런 지역에서 김대중 씨가 온다고 하니까 거의 3만 이상이 운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처음부터 좀 이상했다. 정당연설회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어떻든 후보들의 유세장이 되어야 할텐데…박지원 씨의 찬조연설이 끝나자 원혜영의 찬조연설로 이어지고, 그쯤에서는 나에게 마이크가 와야만 하는데 다시 안동선 씨에게 마이크를 넘겨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안동선 씨가 연설을 하는 도중 김대중 씨가 입장을 하는 게 아닌가.

당연히 순서는 김대중 씨의 연설로 이어졌다. 물론 부천시장 후보와 나에 대한 지지 발언은 거의 없었고 자신의 정치철학과 김영삼 정권이 실정을 비관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마침내 40여 분의 연설이 끝났다. 그런데 김대중 씨의 연설이 끝나면 대중들은 이제 일어서기 마련이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유권자들이 뒤에다 대고 연설을 할 수도 없는 문제였다.

원가 이상한, 좋지 않은 직감이 왔다. 게다가 지금 생각해도 참 어처구니없는 것은 김대중 씨가 연설 도중에 '나는 사실 이종찬 씨를 희망했다. 그러나 어차피 장경우 의원으로 결정났으니 민주당과 나를 봐서 장경우 의원을 찍어 달라'는 식의 말을, 그러니까 나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는 것은 분명한데 거기에 굳이 이종찬 씨 얘기를 끼워 넣는 것이 아닌가!

아니, 지금 한창 뛰고 있는 후보의 상처를 다시 들먹일 필요가 뭐가 있는가! 정말 아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유권자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머리 속이 여간 복잡해지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그 때 김대중 이사장의 경호를 맞고 있던 김옥두 의원이 나를 끌고 가더니 김이사장의 차 옆좌석을 권했다. 일단 타라고 하니 나는 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김이사장은 시장하셨던지 닭튀김을 먹으면서 나에게 권하고는 일상적인 얘기를 한참 주고받았다.

"앞에서 연설을 못하셨다구요?"

'예…어떻게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다음에 도착하는 고양시에 가면 먼저 시작하세요!"

거 참 희한한 일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 때 내 연설을 방해했던 이들이 누구였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그게 결코 우연이라거나 어찌 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은 분명 아니었다는 점이다. 아무튼 그것만은 명백한 사실이다.

드디어 고양시에 도착했다. 저녁 때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는데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침 내가 막 연설장으로 들어서자 비는 조금 진정되었다. 김대중 씨는 차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나는 연설을 시작했다. 앞서 부천에서 어처구니없게도 연설을 못한 울분도 있겠다, 나는 정말 얘기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연설을 하다 보면 유난히 잘 될 때가 있고 잘 안될 때가 있기 마련인데 그 날은 울분 때문이었는지 연설이 참 잘 되었다.

얼마나 그렇게 했을까…연설을 마무리 지어달라는 쪽지가 왔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무시하고 내 연설을 계속 해 버렸다. 그러자 저쪽에서는 안되겠다고 판단했는지 '으샤 으샤'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저 끝에서부터 입장을 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김대중 씨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김대중 씨가 막 연단 가까이에 오는 순간! 그 옆에 이종찬 씨 부부가 서 있는 게 아닌가! 경기도지사 출마 문제로 서교호텔에서 만난 이후, 그리고 후보로 확정된 후 선대위원장을 맡아달라고 의원회관을 찾은 후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비록 상황이 이상하게 흐르면서 서로 연락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어떻든 내가 후보로 경정되고 그 어려운 선거전에 돌입한 이후 한 번도 오지 않더니 막상 김대중 씨와 동행해서 오는 걸 보니, 솔직히 서운함이 밀려왔다.

그러나 워낙에 경황이 없었을 때이고 황망중이다 보니 나는 그냥 왔나보다 하고 지나쳤다. 나중에 전해들은 얘기지만 김대중 씨가 그 유세장으로 이종찬 씨 부부를 불렀던 것이었고, 그 유세가 끝난 후 함께 저녁을 했다고 한다. 물론 나와는 연단 앞에서 잠깐 스친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결국 이 날의 고양 연설을 끝으로 나는 유세장에서 더 이상은 김대중 씨를 보지 못했다. 더 이상의 지원 연설은 없었다는 얘기다.

후일 들은 바에 의하면 국민회의 신당창당이 결정된 것이 6월 16일이었다.고 한다. 19일의 의정부에서의 성의없는 소개, 그리고 21일 부천에서 아예 연설 기회마저 갖지 못한 일까지… 일련의 일들이 일어난 이유를 나는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이미 민주당을 깨고 이기택 계와 이별을 한 후 분당하기로 결정이 난 후였던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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