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중원 변호사
그러나 네 일은 네가 챙겨라.

 

 

 

 

마르세유는 항구다.

BC 600년경에 생긴 이 항구 도시는 여전히 낡은 도시의 은밀한 뒷골목을 숨기고 있다. 노아유 구역의 가장 오래된 구시가지 쪽으로 올라가면 부서진 계단의 층계를 따라 썩은 냄새가 코를 막히게 하는 하수구 물이 넘쳐흐르고, 길가에는 산더미처럼 쌓인 쓰레기들이 썩고 있었다.

그곳에는 5, 6층 높이의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기 때문에 골목에서는 하늘이 잘 보이지 않았고, 바닥의 공기는 온갖 악취로 가득 차 있었다. 이 냄새는 가끔 바람이 골목을 스며들 때만 골목의 좁은 하늘로 날아갈 뿐 밑바닥에는 냄새가 그대로 고여 있었다.

수많은 북아프리카 이민자들과 아랍 이민자들, 피에 누아르들이 모여 사는 그 거리의 건물들은 한결 같이 오래되어 칠이 벗겨진 외벽에 두껍게 때가 끼어 거무칙칙하였고, 일부 건물은 곧 무너질 것처럼 퇴락했다.

길가 쪽에 붙어 서있는 낡은 건물의 창문들은 유리창 대부분이 깨어져 있거나 철망이나 쇠창살로 막혀 있다. 햇빛이 겨우 건물 꼭대기에 있는 굴뚝의 검은 연통만 잠깐 비추다 사라지기 때문인지 뒷골목 쪽 건물의 맨 아랫부분은 항상 눅눅하고 더럽게 얼룩져 있었다.

그 골목에는 깡마른 고양이들이 서로를 갈기갈기 찢을 듯이 증오에 가득찬, 또는 애원하고 호소하는 듯 한 목소리로 울어대며 어슬렁거리고 있었고, 털이 보기 흉하게 빠져버린 늙은 개들이 으르렁거리며 뼈다귀를 질근질근 씹고 있었다.

그 구시가지의 북쪽 끄트머리와 구불구불한 좁은 길을 통하여 연결되어 있는 아프리카 거리에는 마그레브 지역의 이민자들이 집단으로 모여 살았다.

그곳에는 얌과 카사바와 같은 아프리카 식품을 파는 작은 가게와 아프리카식 스트레이트파마를 전문으로 하는 미장원, 아랍인들이 주로 입는 품이 넉넉한 젤레바와 이슬람식 베일을 파는 가게, 꿀이 줄줄 떨어지는 사탕류를 내놓고 파는 찻집, 메카 순례만을 전문으로 하는 여행사, 허름한 아프리카 이민자 숙소, 나이지리아 사람이 경영하는 아프리카 바도 있었다.

그 바는 요란한 색칠을 한 내부 장식에 비하면 몹시 어두침침하였다. 등받이가 없는 높고 붉은 의자가 길게 놓여있는 마호가니로 된 스탠드 앞쪽에는 밴드에 맞춰 몸을 비비고 춤을 출수 있도록 좁은 공간의 플로어가 있었다.

아프리카, 서인도 제도, 예멘, 키프러스, 그리스에서 온 선원들로 늘 만원이었고, 선원들은 아름다운 갈색 피부의 아비시니아 여자들과 함께 자메이카의 레게음악에 맞춰 몸을 한껏 비비꼬며 춤을 추었다. 모두들 고함을 질러대고 제정신인 사람은 없었다.

진한 붉은 립스틱을 립 라인에 덧칠한 윤락 여성들이 단골처럼 드나드는 곳이었다. 그곳은 입구 쪽 덧문이 달린 문이 열릴 때마다 시끄러운 목소리, 음악 소리, 분노와 탄식, 요란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고, 함께 지독한 담배 냄새와 압생트 냄새, 마리화나 냄새가 풍겨 나왔다.

우리도 한때는 그곳의 단골손님이었다. 우리는 함께 어울려 알코올 냄새가 역겹게 풍기는 트림을 쏟아내며 자주 술을 마셨고 거리낌 없이 마리화나도 피웠다. 그녀들과 밤늦게까지 히히거리며 어울렸다. 우리는 대개 새벽녘이 되어서야 비틀거리며 술집을 나섰다.

그리고 누군가 굵은 색연필로 풍만한 흑인 여자의 몸을 외설스럽게 그려놓은 낙서 밑에 ‘이 술집에 들어오려는 자, 모든 희망을 내려두고 가라’ 라는 글귀가 써진 담벼락에 오줌을 갈기고, 가끔 그곳에서 심하게 토하였다.

그 골목에서 나는 몇 달을 잠시 지낸 적이 있었다. 이프 섬 선착장에서 관광객을 상대로 액세서리 노점상을 할 당시 말리의 통북투에서 밀입국한 투아레그족 사람, 하딤을 알게 되어 그의 지붕 밑 작은 다락방에서 몇 달을 함께 지낸 것이다. 그는 나보다는 3년쯤 먼저 밀입국해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는 피부가 따뜻하고 깊은 검은 색이였다. 헐렁한 청바지에 검정 티셔츠를 입은 탄탄한 몸에서는 남성미가 물씬 풍겼다. 하딤은 어두컴컴하고 지저분한 그 골목의 비밀스런 구석을 모조리 알고 있었다. 그에게 그 거리는 너무 좁게 느껴졌고 언제나 똑같은 거리였다.

 

하딤은 사하라 남쪽 사헬지대에서 자랐다. 그러나 한때는 비옥한 사바나였던 곳은 몇 년째 가뭄이 들자 이제 사막으로 변모하였다. 잡목마저 누렇게 시든 채 바람에 바스라졌다.

그곳 투아레그족은 더 이상 유목민이 될 수 없었다. 어디에서도 물과 목초지를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너무 건조한 기후 때문에 오직 땅콩을 재배하여 온 가족이 그 수입으로 겨우 입에 풀칠할 수 있었다.

유목민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몇 년 동안 심한 가뭄이 계속 되면서 그나마 수확이 급감하자 그의 가족들은 먹고 살기 위해 가장 가까운 도시인 통북투로 이동하였다.

투아레그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자본주의 문명을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증오하였지만 그것은 마침내 그 종족의 뿌리까지 침투해 있었다.

그들은 해골처럼 삐쩍 마른 채로 궁색한 천막과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통북투의 빈민촌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영양실조와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콜레라와 결핵, 말라리아, 기생충 감염, 에이즈 등이 기승을 부렸다. 도시로 함께 몰려온 염소 떼가 골목을 어슬렁거리면서 모기와 파리 떼가 눌러 붙어있는 쓰레기 더미를 헤집고 다녔다.

사막의 태양은 먹을거리 또는 일자리를 찾아 길거리를 헤매는 동족들의 머리 위로 무자비한 햇살을 인정사정없이 쏟아 부었다. 그 도시 역시 사막의 모래바람을 피할 수는 없었다. 모래먼지로 뒤덮인 길거리에는 금방이라도 허물어져 버릴 것처럼 보이는 진흙 벽돌로 지은 낡은 집들이 띄엄띄엄 서 있었다.

도시의 주변을 흘렀던 나이저 강의 지류는 완전히 메말라서 모래에 묻힌 채 강의 흔적만 남았다.

그 도시에는 송가이족과 투아레그족,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흑인 부족과 아랍 족들이 불안스럽게 뒤섞여 있었고, 테러조직, 반군 단체, 밀수꾼, 말리의 정부군들이 프랑스 영토보다 더 넓은 광활한 말리 북부 사막지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부모님 이외에 5명의 형제와 4명의 여자 형제가 더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혈기가 넘쳐흘렀지만 통북투에서는 어떠한 기회도 붙잡을 수 없었다. 그곳의 삶은 항상 불안정했고 위태위태하였다.

사하라는 냉정하고 잔인하였다.

그는 가족들을 남겨두고 천신만고 끝에 홀로 프랑스로 온 것이다. 그는 프랑스에서 열심히 일해 모은 돈 대부분을 통북투의 가족에게 정기적으로 송금했다. 그 돈이 가족의 생명줄이었다.

그 역시 통북투에서 식료품 가게를 차릴 수 있을 만큼 어느 정도 목돈이 마련되면 하루빨리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는 그때 가족들과 사막이 눈앞에 어른거려 거의 병이 날 지경이었다.

 

그 당시 우리는 처음 만나는 그 순간부터 서로에게서 강렬한 고향의 냄새, 사막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사막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은 어느 곳에 살든지 사막에 대한 강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투아레그족의 심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둘 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투아레그 말을 실컷 재잘거리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더 큰 목소리로 빠르게 투아레그 말을 지껄이며 웃고 떠들었다.

 

우리는 밤이 이슥해서 그날의 노점상 장사가 끝나면 자주 그 술집으로 갔다. 그날, 술집 안은 후덥지근했다. 사람들은 여느 때처럼 소리치고, 웃음을 터뜨리고, 무슨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귀가 멍멍할 정도로 몹시 시끄러웠다.

그때, 프랑스 해군 수송함의 늙은 수병이 술에 취해서(서너 명 되는 그의 일행도 역시 몹시 취해 있었고 약간 흥분한 상태에 있었다.) 공공연히 시빗거리를 찾고 있었다. 그들은 술잔을 거세게 부딪치며 마구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수병의 팔뚝은 온통 혀를 날름거리는 아프리카 블랙맘마의 문신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 겁 없고 당당해 보이는 짐승은 상대방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때 그 수병이 갑자기 소리쳤다. “더러운 아프리카 개새끼들…… 깜둥이 놈들…… 역겨운 냄새가 나는 놈들. 깜둥이들이 목욕을 해봤자 비누만 닳아 없어지지. 당장 프랑스에서 꺼져버려! 너희 놈들이 백인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어. 너희 집으로 어서 돌아가란 말이야. 아프리카로…….”

필연적으로 거친 말싸움이 시작되었다. 하딤은 결코 밀리지 않았다. 그러자 그 자식이 하딤의 얼굴에 가래침을 내뱉었다. 그 순간 하딤이 맥주잔을 깨서 그의 얼굴을 길게 그어버렸다. 피가 줄줄 흘렀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때, 아주 잠깐 동안 술집 안에 쥐죽은 듯한 침묵이 지나갔다. 춤을 추던 사람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곧 난장판이 벌어졌다. 주먹과 발길질이 격렬하게 오가고, 작은 테이블들이 뒤집어지고, 술잔들이 날아가서 바닥에, 벽에 부딪쳐 파편이 튀었다. 고함 소리, 신음 소리, 치고받는 소리, 알아들을 수 없는 온갖 욕지거리 등이 난무했다. 인간의 광기가 휩쓸고 있었다.

여자들은 몸을 피하기 위해 구석진 곳으로, 문 쪽으로 흩어졌다.

그때 두어 명의 경관이 들이 닥쳤고, 우리는 뒷문을 통해 간신히 빠져나왔다. 우리 역시 온몸과 얼굴을 심하게 얻어맞아서 피멍이 들고 피범벅이 되어있었다.

그날의 사건 이후 그 술집에는 발길을 완전히 끊었다.

 

그는 마르세유에서 살아남기 위해, 또 말리의 가족들에게 돈을 부쳐주기 위해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거리의 청소부, 공사장 현장의 경비원, 신축 건물의 도장공, 이삿짐센터 인부, 포르노 숍의 점원, 식당 웨이터, 호텔의 벨 보이, 택시 운전사, 노점상 등.

그러나 그는 몸가짐이 항상 단정했다.

그는 한 때 자신이 너무 무력했고 장래에 대한 두려움 역시 몹시 컸지만 엄청난 수치심과 혐오감을 느껴야하는 일들, 가령 자기연민에 빠져서 느껴야하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잊기 위해서건 또는 돈을 쉽게 벌기 위해서건 마약에 관계한 일도, 좀도둑질도, 자동차 절도, 사기 행각에 가담한 일도 없었고, 사소한 일로도 단 한 번 체포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특이하게도 한때, 근 1년 동안 지독한 배 멀미를 무릅쓰고 신 항구에서 연안 여객선의 하급 선원 혹은 잡역부로 일하기도 하였다. 급료도 높았고 무엇보다도 식사와 잠자리를 배 안에서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하는 일이란 바닥이나 화장실을 청소하고 선실의 침대를 정리하고 배의 식당에서 그릇을 닦고 음식을 나르는 일이다. 때로는 떼가 눌러 붙은 갑판을 화학물질 세제로 문질러 닦고 가끔 배를 도장할 때는 지독한 페인트 냄새를 맡으며 그 일을 해야 했다. 그는 농땡이 치거나 적당히 꾀를 부릴 줄 몰랐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치고 어깨에 통증이 오고 허리가 끊어지게 아플 때까지 일했다.

그 배의 선장이나 고급 선원들은 그리스 또는 스칸디나비아 출신 백인들이었고, 청소부 겸 잡역부였던 하급 선원들은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이 주류였는데, 선원들은 지루할 정도로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함께 지냈다. 그러나 선원들 사이는 은연중에 또는 노골적으로 인종차별주의적 분위기가 역력했다.

그러나 하딤은 의기소침하거나 자신의 처지를 내색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조금씩 임기응변의 처세술과 상대를 적당히 다루는 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배가 부두에 정박하면 그날 밤에는 그와 유독 친했던 스페인의 마요르카 섬 출신의 흑인 선원과 함께 부두 노동자와 하급 선원을 상대로 하는 술집으로 갔다. 항구의 뒷골목 눅눅한 모퉁이에 자리 잡은 지저분하고 어둠침침한 무허가 술집으로 가서 값싼 술을 연거푸 들이켜고 흠뻑 취하곤 했다.

 

어쨌거나 큰돈이나 목돈을 모을 수는 없었다. 그는 가족을 프랑스로 데려올 수는 없었다. 불법 이민 브로커에게 줄만한 거액의 돈도 없었고, 가령 가족이 마르세유에 도착해도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불법 체류자 신세에 외각 변두리 판잣집에서 살며 온갖 궂은일을 해야 할 것이다.

때로는 아주 비합법적인 일까지. 불법 직업 소개업자를 통해 기껏해야 청소부나 잡역부가 될 것이고, 아니면 여동생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성매매에 몰리게 될 게 너무나 뻔했다.

가터벨트와 브래지어만 걸친 채 또는 란제리 차림으로 지나가는 차를 세우고 자동차 뒷좌석이나 클럽의 화장실, 돈을 주고 빌린 뒷방에서 잠깐씩 하고 돈을 받는 일. 거기에서 조금 나은 일이란 바가지를 뒤집어씌우는 술집에서 여급으로 일하는 것이다.

열 명 쯤 또는 예닐곱 명의 아가씨들 (하딤은 그 중에는 에이즈 양성 반응을 보이는 아가씨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이 어두침침한 한 쪽 구석에서 잡담을 하면 진을 치고 있다가, 손님이 들어오면 합석을 하여 가짜 위스키, 포도주와 터무니없이 비싼 안주를 주문하고, 그 술 취한 봉이 원하기만 하면 술집의 뒷방에서, 화장실에서 펠라티오를, 또는 바로 옆에 있는 싸구려 호텔 방으로 슬며시 옮기는 것이다.

그래서 몽땅 벗기고 술집 주인과는 5:5로 자기 몫을 챙기는 것이다. 가끔 술이 덜 취한 손님이 술값 시비를 하면 그때는 거구의 흑인 경비원이 그의 목덜미를 낚아 채 뒷골목으로 던져 버렸다.

그는 나이를 먹고 늙어 가게 될 것이다. 지금도 매일 늙어가고 있지 않는가. 나이가 점점 들어서 육체노동을 감당할 수 없게 되면. 그는 생각한다. ‘나는 결국 거렁뱅이, 아니면 주정뱅이가 되겠지. 누더기를 걸친 채 온몸이 멍들고 피가 흐르는 얼굴로 발을 질질 끌며 골목을 헤매겠지.

그때는 혼자 떠들어 대거나, 중얼거리거나, 소리를 지르고 욕지거리를 내뱉겠지. 아프리카! 아프리카! 하고 외치겠지. 그리고는 별 수 없이 굶어 죽을 거야.’

그는 또다시 생각했다. ‘난 뼛속 깊이 사하라의 인간이야. 사막이 고향이고 아늑한 집인 거지. 투아레그는 결국 텅 빈 사막으로 돌아가는 거야. 사막에서 태어난 사람은 사막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거든. 유목민은 어디를 떠돌든 늘 고향으로 돌아오게 돼있어. 그들은 더 쉬운 삶을 찾아서 다른 곳으로 떠날 수도 있고, 더 나은 삶을 위해 사막을 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못하는 거지.

사막은 아무리 황량해도 우리의 심장이고 영혼이며, 영원한 고향이니까……. 그들에게 다른 곳에서의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야. 그들은 사막을 떠나기보다는 차라리 그 모든 비극과 불행을 떠안고 살아가지……. 프랑스를, 마르세유를 그만 떠날 때가 온 거야. 지금 떠나야만……. 벌써부터 이글이글 타오르는 사막의 뜨거운 태양이 그리워지는군.’

그래서 그는 얼마간의 돈이 모이자 그가 말리로 돌아가기로 선택하였다. 어렵사리 취득했던 영주권도 사회보장제도의 혜택도 포기하였다.

그가 마르세유를 떠나던 날, 한여름 날씨는 아주 지독했다. 찌는 듯이 무덥고 끈적끈적했기 때문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러나 그의 냉정한 얼굴에 슬프거나 기쁘거나 어떤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 온갖 풍상을 겪으며 15년이나 살았는데. 다만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으로 어떤 불가해한 감정이 일시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먼 길을 지겹도록 걸었던 긴 여행이 마침내 끝났기 때문이었을까. 그리고 2년 전에 먼저 사막으로 돌아간 모세하난 이브라함을 떠올렸다.

그는 능통한 프랑스어를 이용해서 팀북투에서 관광객의 가이드 또는 직접 여행사를 차릴 수도 있었지만, 팀북투에는 관광객이 더 이상 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랜 기간 극심한 가뭄으로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지고, 주류 집단인 투가레그족과 송가이족, 소수계인 아랍인도인들이 아옹다옹 다투고 있는 팀북투에 관광객이 더 이상 오지 않았다.

특히 프랑스 영토보다 더 넓고 광활한 말리 북부 지역은 테러 조직, 반군 단체, 밀수꾼들이 산재해 있어서 위험한 지역으로 미국이나 서방 정부들은 자국민들에게 여행을 자제해 달라고 당부하고 있었다.

그는 말리의 수도 바마코로 가서 상점이나 공예품점이 밀집한 구역인 중심가에 처음에는 작은 식료품점 겸 잡화점을 열었고, 그 상점이 자리를 잡고 확장을 거듭하면서 가족들을 모두 바마코로 데리고 왔다. 그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고 그의 대가족은 모두 힘을 합쳐 상점 일을 돌보며 잘 살고 있다.

그는 인종적 편견을 이겨냈을 뿐만 아니라 악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만적인 서구 문화를 뿌리치고 아프리카로 귀향하였으니, 진정한 성공한 투아레그 또는 아프리카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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