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중원 변호사
죽은 종교에는 이단이 없다.
— A. 소레

인간의 신조란 다른 것이 올 때까지
어느 하나가 우세해졌다가,
이것이 무너지고 다른 것이 승리하니,
외로운 이 세상은 언제나
최신의 동화를 원하기 때문이리라. 
                                            — 압달라 알마아리


신의 대리인은 화려한 옷을 입고 값비싼 보석을 박은 관을 쓰고 있다. 그는 미사를 집전하며 회중들 앞에서 거만한 얼굴로 한껏 거들먹거리며 신의 이름으로 설교한다.
(그러나 1000년 전인지, 500년 전인지를 거슬러 올라가서 그가 추기경이었는지, 교황이었는지, 그 당시 세금 징수원에 불과하였던 어느 주교인지, 그냥 사제였는지 그의 신원을 도대체 알 수 없다. 다만 군주론의 모델이 되었던 잔혹한 발렌티노의 부친이었던 타락한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그러나 그가 이 설교를 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다른 사람은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악필인 그가 쓴 원고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게 불태워져서 사라졌다고 하고, 서고의 화제 때 불가피하게 소실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가 살인, 강간, 근친상간, 약탈, 반역 등의 죄로 고소당한 후 직접 태웠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교황청의 견해를 대변하고 있는 그 설교의 개요는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 왔다. 아니면 지금도 로마 교황청이나 어느 수도원의 지하실 서고에 그에 관한 기록과 설교집이 먼지를 뒤집어 쓴 채로 그대로 묻혀있는데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우리 신은 절대 유일신이니라. 다른 신은 없느니라. 그 신이 말했느니라. ‘나 하나님밖에 누가 있다더냐. 나는 정의를 세워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이니 나밖에 다른 신은 없도다.’ 신이 만물의 창조주이고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인간은 신의 종자이니라. 그러므로 신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아주 하찮은 존재, 그러니까 벌레나 지렁이밖에 되지 않느니라. 너희들에게는 이념도, 이성도 필요 없도다. 그것들을 모두 머리 속에서 지워 없애야 할 것이야. 알아들었느냐. 그래서 인간이건, 인간 사회의 모든 것, 심지어 국가와 사회까지도 죄다 신의 영광을 위해, 신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존재하느니라. 그러므로 신을 경배하라. 신을 믿으라, 믿지 않으면 신의 처벌을 받을 것이니, 죄 중에 제일 큰 죄는 믿지 않는 죄이니라. 우리가 의지하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다. 우리 수많은 신도들의 집단적인 믿음. 우리 모두가 믿으면 진리가 되고 진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심하면 안 될 것이다. 절대로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면 모든 게 뿌리 채 무너진다. 마법이 사라진다.
그냥 믿어라. 그것이 진정한 신앙이다. 신은 결코 이성을 통해서는 깨달을 수가 없느니라. 이성을 통해 알려고 고집을 부리지 말라. 그것은 불경한 짓이니라. 신을 두려워하라. 이성은 신이 인간에게 보낸 선물이 아닌 것이다. 이성은 영원히 변치 않는 신성이 될 수는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둘 더하기 둘은 다섯이 되는 법이다. 진리가 무엇이더냐, 진실이 무엇이더냐, 그것은 하찮은 것, 낡고 낡은 관습일 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진리고 진실이다. 신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지 않는다. 믿음이 중요한 것이다. 진리와 믿음이 충돌하면 믿음이 우선인 것이다. 오직 맹목적인 믿음이 있을 뿐이다. 증명은 불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신성한 믿음을 부정한다. 믿음이 없으면 신은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상 숭배를 해서는 안 되느니라. 감히 나를 놀리느냐, 골탕 먹일 속셈이었더냐. 우리 신 이외의 신은 모두 우상에 불과 하느니라. 그건 미신이니라. 기억하라.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
그런데 우상 숭배를 하는 이교도들이 누구인지, 그들의 정체를 알아야할 것이다. 지금 아시아의 사막을 지배하고 있는 이교도들을 말하고 있느니라. 그러니까 바벨탑의 교훈을 되새겨야할 것이다. 하나님에게 싫증을 내고 전쟁을 벌이고자 한 사악한 인간들, 그들은 감히 하나님의 실재를, 하나님의 실체를, 신의 권위를 의심하고 신을 직접 만나려고 시도하였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에 굴러다니는 단 하나의 진흙 벽돌까지 그러모아서 바벨탑을 쌓고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계획하였으니 당연히 하나님이 대단히 분노하였고 번개와 벼락을 쳐서 그걸 쓰러트려 버렸다. 잔해의 일부는 불타버리고, 일부는 땅속에 묻히고, 지금은 황량한 사막 한 가운데 밑 둥만 남아 있는데 그게 바로 지구라트라는 거다.
이제부터 인간들은 언어가 서로 다르게 되어 원활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게 되었으니 분쟁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다른 한편 다양한 이교도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 어쨌거나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니 이교 신앙과 우상 숭배는 필연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어깨에는 그 우상을 깨부수고 우리 하나님 밑으로 모든 인류가 함께 모이게 하는 지상 과제가 부과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함께 그 어려운 과제를 수행해야만 한다. 신이 그렇게 명령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함마드, 그는 사기꾼이요, 간질병 환자, 악마에게 사로잡힌 자, 양심 없는 권력가, 사이비 예언자, 적그리스도 아니었드냐. 이교도들은 거짓말 책이라고 할 수 있는 터키의 성경을 읽고 있지 않았더냐.
그리고 지중해의 동쪽 네게브 사막에 기원을 둔 또 다른 이교도들이 있느니라. 그들은 아버지와 형을 속인 사악한 거짓말쟁이이고 사기꾼인 야곱의 자손이었다. 그래서 야곱은 그들의 조상이고 그들을 상징한다. 그자들은 적그리스도이니 우리에게는 그저 원수일 뿐이다. 무구한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천하의 대역죄를 진 죄인들이 과연 누구였더냐? 로마인이었느냐, 그러나 그건 아니다. 바로 그들이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그들이 하나님의 자식이 아니라 악마의 자식이라고 하였느니라. 하지만 그 자들은 오만과 독선으로 가득 찬 끈질긴 민족이고 철저히 저항하는 족속들이니라. 그래서 로마의 장군들이 그들 세계의 중심인 살렘을 파괴하고 불을 지르고 폐허로 만들어 버렸느니라. 여기에는 신학적 차원의 질문이 숨어있느니라. 왜 하나님은 살렘의 파괴를 원하셨을까? 그 민족은 무슨 죄를 지었는가? 아직도 계약은 유효한 것일까? 그때 하나님은 주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은 그 사악한 족속들의 멸망을 계획한 것이다. 그들이 먼저 하나님을 배척하였으니 이를 견디지 못한 하나님이 분노를 폭발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천년이 지나서 십자군 전쟁 때 또다시 그 사악하고 가소로운 자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하였느니라. 그것들은 모든 굴욕에 굴복한다. 굴복을. 인간 이하인 하위 종족이기 때문이다. 그건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 있느니라. 그건 어쩔 수 없이 예정된 이교도들의 운명이었다. 누가 알겠느냐. 역사는 반복하고 있으니 장차 천년왕국을 세우려는 헛된 망상에 빠진 어떤 광신자 폭군이 나타나면 다시 집단 학살이란 천벌을 내리지 않겠느냐.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세상 끝까지 정복하고 지배할 것이다. 
그러나 진짜 우리의 적은 내부에 있느니라. 유대교에는 카발라가 있고 그 저주스러운 이슬람에는 수피즘이라는 신비주의가 있지 않느냐. 그리고 그것들은 여전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왜 이단이 생기겠느냐, 이단자는 파괴자인데 말이다. 악마가 끊임없이 이단자를 사주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단자를 박멸해야 한다. 그들은 살신자殺神者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우리에게는 마니교와 그노시스파라는 이단자가 있었고 보고밀파는 그들의 후예이었느니라. 그들이 말했지 않느냐, 사타나엘은 신의 아들이며 타락한 천사이고 그리스도의 사악한 형이며 우주의 창조자이고 잔혹하고 부당한 피조물의 왕이며 우주의 관리자라고 말이다. 그는 위대한 우리 신의 적대자이다. 적그리스도이다. 사타나엘은 말했다. 세상은 사악한 신에 의해 창조되었고 악과 고통만이 승리한다고. 그래서 모든 군주와 세상의 권력자는 어두운 심연에 복종하고 예루살렘은 악마의 도시이며 세례 요한 성인은 어둠의 전령이라고.
그래서, 그들 이단자들은 잔인하게 학살당하고 화형에 처해졌다. 씨를 말려버린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이단이 언젠가는 나타나지 않겠느냐. 살아있는 종교에서 이단은 불가피한 것이다.
너희들은 이미 삼위일체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신성한 수태를 통해 태어나신 성모의 아들, 당신을 단 하나의 진정한 하나님으로 모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들고 있는 이 빵 덩어리와 성배에 들어있는 포도주는 구세주 그리스도의 진정하고 완벽한 살과 피가 아니겠느냐.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는 신 중에 신, 진정한 신이다. 지금 우리에게 진정한 신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느니라. 나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여! 우리가 주님의 적에 맞서 싸우는 것은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드높이기 위한 것입니다. 야훼 신은 그놈들, 유대인만을 편애하는 그들의 신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니까 말이다. 그들에게 말하라, 우리의 진정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너희 신을 버리고 와서 우리의 신만을 경배하라. 너희 신은 너희들을 결코 보호할 수 없느니라. 개종하라! 개종을! 개종을! 개종을! 그렇지 않으면 너희와 너희 신에게는 오직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니라.’ 우상에 바친 고기를 먹는 것보다는 굶어 죽는 편이 더 낫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무조건 우상을 파괴하라. 우상에 불을 질러라. 조금도 주저하지 말라. 

그는 중년의 남자인데 살이 너무 쪄서 몸을 가누기 조차 힘들고 잘 손질한 검고 세련된 턱수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얼굴에는 개기름이 번지르르 하고 입술은 쉼 없이 나불거리고 있다. 그는 목소리에 감정을 실어서 음의 높낮이를 적절하게 조절할 줄 안다. 그래서 어떤 소리는 높고 오만했으며 어떤 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가끔 자신도 모르게 흥분할 때는 몹시 거칠고 시끄러웠다. 그러나 신의 대리인은 해소할 길이 없는 욕구 불만으로 가득 차있었다. 때로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그의 내면에는 여전히 권력과 명예욕, 야욕, 탐욕, 욕정, 온갖 욕망으로 들끓고 있었다. 그는 이제 거친 목소리를 약간 낮췄다. 그러나 그 저음의 목소리는 여전히 위협적이다.

그리고 말이다. 여자들아! 불쌍한 여자들아!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라! 무조건 남자에게 복종하라. 신 다음으로 남자에게 복종하라. 복종하고 또 복종하라. 신도 남자이고 아버지이니라. 아담이 부르짖었도다. ‘이것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불리리라! 그러니 너희는 인간이 아니라 남자의 부속물이니라!'
그러나, 이브는 괘씸하게도 아담을 배반하였느니라. 더 연약한 그릇이었던 여자에게 사탄이 찾아와 듣기 좋은 말로 유혹하였으니 이브가 먼저 사과를 따먹었고 아담에게도 먹으라고 강권한 것이다. 그랬으므로 남자인 아담은 여자의 청을 거역할 수 없었지 않았겠느냐. 여자는 남자에게 평생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여자들이 결혼할 때면 자기 남편을 고우나 미우나 한결 같이 섬기겠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지혜의 왕인 솔로몬을 기억할 것이다. ‘이제 너는 슬기롭고 명석하게 되었다. 너 같은 사람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으리라.’ 그러나 솔로몬도 별 수 없었다. ‘솔로몬은 늙어 그 여인들의 꾐에 넘어가 다른 신들을 섬기게 되었다.’ 그러니 남자들이여 여자들을 경계하라, 무서워하라, 여자는 사탄이니라.
전능하신 하나님, 참으로 감사하옵나이다. 저를 여자로 만들지 않은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들아! 겸손하라! 오만해서는 안 되느니라! 육욕을 버려라. 그것은 육체와 영혼을 모두 불살라 버리니 참으로 무서운 죄악이니라. 그리고 몇 푼 안 되는 돈을, 육체적 안락을, 허망한 명예를 버려야 하느니라.
이 놈의 설교도 지겹구나. 하루 이틀이여야 말이지.
너희들은 구구한 설명이 없어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무조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라! 최후의 심판! 죽음! 지옥과 천국을 기억하라! 그러나 믿지 않으면 결국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지옥은 어둡고 더러운 감옥이니 버림 받은 영혼과 악마들의 거처이다. 지옥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유황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으니, 지옥 불에 떨어지면 타오르는 불길에 할퀴고 벌겋게 달궈진 창살에 찔린 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할 것이다. 지옥에는 오직 악의만이 번뜩인다. 그때 죽음의 대왕은 너희들 목에 밧줄을 묶어 끌고 갈 것이다. 그는 너희들 머리를 자르고, 심장을 찢고, 내장을 끄집어내고, 뇌수를 핥고, 피를 마시고, 살을 먹고, 뼈를 씹어 먹으리라. 그래도 너희들은 죽을 수 없느니라. 너희들 몸이 산산이 잘려질지라도, 그것은 다시금 살아날 것이다. 거듭되는 난도질은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을 줄 것이다.
그러나 빠져나가는 문, 비상구도 없느니라. 지옥에서는 고통에 못 이겨 자살하려고 해도 그것도 불가능 하느니라. 그러니까 지옥에서는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라는 인간적 고뇌조차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지옥이 어떤 곳인지 이제는 알겠느냐. 너희들은 절대로 그런 운명에 처해서는 안 될 것이야.
그렇다. 그러니까 말이다.
이승에서 자기 살해를 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니 오해하지 마라. 알겠느냐. 자발적 죽음은 변절이고 비겁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악마의 소행인 것이다. 인간은 생존본능을 선천적으로 타고 났기 때문에 자살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행위이고, 우리에게 생명을 부여하신 신이야 말로 우리의 주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신의 노예이기 때문에 자살은 신에 대한 불경한 짓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신의 피조물, 신이 만든 것을 빼앗을 권리가 없느니라. 우리는 공동체의 일원이고 그 안에서 각자 맡은 바 임무가 있는 법인데 자살은 사회에 대한 침해이니라. 우리는 국가와 사회에, 교회에 자기존재를 빚진 셈이니라. 자살은 우리의 모든 흥을 깨고 만다. 알아들었느냐. 다시 말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심판할 수 없다. 자살 그 자체가 회개와 속죄의 가능성을 말살하기 때문에 가장 큰 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강간을 당한 경우에도 피해 여성은 자살할 수 없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사랑하지 못한다. 자살을 하면 불행을 피할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은 이교도들은 착각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오늘날 철학이 남용되고 있느니라. 허접 쓰레기 같은 철학을 던져버려라.
위대한 철학자 피타고라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성 아우구스티누스, 아벨라르, 둔스 스코투스, 성 부르노, 성 보나벤투, 바르톨로마이우스 푸무스,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중세 교부 철학자들, 단테, 토마스 모어, 오르페우스교, 카르타고 공의회, 트리엔트 공의회, 종교재판, 성왕 루이 법전, 하나님의 종복들인 교황들, 추기경들, 주교들, 수도사들, 기타 성직자들, 모든 도덕주의자들, 신학자, 법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반대하였느니라.
그러나, 삼손의 죽음, 수많은 모든 순교자들의 죽음은 그건 위대한 희생이지 자살이 아니니라. 절대로 오해하지 말라. 그런데 로마 시대 카토의 자살은 그가 시험을 이겨내지 못한 비겁자요, 허영심에 물든 이교도이기 때문에 따라할 것이 아니니라. 세네카, 루크레티우스, 브루투스, 카시우스,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 그들은 술 취한 무뢰한, 철면피, 발광한 미친개 같은 이교도들이고 무신론자 아니었더냐.
그리고 자살을 찬양한 침울한 염세주의자들인 마니교도, 비타협파인 도나투스파는 이단 중에서도 이단이고 사악한 다이몬들이었다. 그랬으니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마니교도들을 미개인들이 사는 머나먼 아시아로 추방해 버렸고, 평생을 바쳐 도나투스파와 싸우고 마침내 격멸해 버렸지 않았느냐.  
아무튼 말이다, 사람에게 자살보다 더 불경하고 저주 받을 만한 죄는 아무것도 없으니 자살자는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지옥에서 죽지도 못하고 영벌을 받아야 하느니라. 어떠한 구제수단도 있을 수 없다. 더욱이 세속법은 신체모독형을 선고하고 남은 재산을 몰수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일찍이 자살, 동성애, 근친상간, 간음, 수간을 우상 숭배 그 이상으로 신성모독으로 간주하였다. 그러한 행위는 오직 이교도, 무신론자, 회의주의자들, 짐승만도 못한 인간들만이 자행할 수 있는 있느니라.
그렇다. 내가 말한다. 내가 명령한다. 나는 침묵할 수 없다. 망설이지 말라. 지금 빨리 예약하라. 등록하라.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하였다. 지금 당장 신이 거처하시는 신성한 곳으로 돌아오라. 성소는 신이 거처하는 곳, 에덴동산, 생명수가 솟아나는 우물, 진정한 포도나무, 사과가 열매를 맺는 낙원이다. 성당 밖에는 은혜도, 구원도 있을 수 없다. 성당의 가르침은 신성한 것이요, 절대로 틀릴 수가 없는, 절대 진리인 것이다. 최후의 심판이 지금 눈앞에 닥쳐오고 있다. 영원한 벌이 기다리고 있다. 신의 진노가 너희가 모르는 사이에 내려칠 것이다. 신을 두려워하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노니 구원을 받을 유일한 길은 신을 믿는 수밖에 없느니라.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이야말로 근원적인 믿음인 것이다. 성상에 예배를 하라. 그것은 돌덩이, 쇠붙이가 아니고, 그 속에 성령이 깃들어 있다. 그 앞에서 기도하라. 무조건 경배하라. 신을 의심하지 말라, 그것은 신성모독이니라. 누구나 믿으면 천국의 집에 들어갈 것이니, 천국에는 질병도 없고, 가난도 없고, 사망도 슬픔도 없고, 젊음을 되찾아 얼굴에서 모든 주름살이 사라지고, 세금도 한 푼 없다.
그리고, 나를 믿으라! 나를 따르라! 나는 참신앙의 성유물함을 보관하는 사람, 하늘과 지상의 중개인이니라. 나는 신의 말씀을 전하여 너희들을 먹이고, 빵을 나눠주리라. 내가 신의 확실한 대리인이니라. 그래서 세례식, 결혼식과 장례식은 물론이고 왕과 황제의 대관식까지도 내가 주재하느니라. 알겠느냐! 너희는 신과 직접 만나거나 얘기할 수는 없느니라. 신은 너희들에게는, 하찮은 너희들에게는 신의 비밀을 털어놓는 법이 없느니라. 오직 나에게만 살짝 귀띔을 하느니라. 나를 통하라. 그러려면 재산과 영혼을 나에게 바쳐야 하느니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 등짝에 피가 흐르도록 채찍질을 할 것이고, 나의 날카로운 칼날이 너희 목을 내리칠 것이다.
가롯 유다, 그가 누구이더냐. 카이사르를 배반한 브루투스와 함께 두고두고 인류에게 회자되는 배신자 중에서 배신자 아니더냐. 우리 주님을 은 삼십 냥에 팔아먹은 자. 돈이 탐이 나서 돈이 생기는 줄 알고 주님을 따라다닌 천생 장사꾼이 아니더냐. 그 배신자는 결국 돈벼락을 맞고 배가 터지고 창자가 쏟아져 나와 비참하게 죽었느니라. 돈은 요물, 괴물, 악마가 아니더냐. 돈을 멀리하라. 그러므로 내게 그 괴물을 맡겨야 하느니라. 내가 그 괴물을 처리할 것이다. 그런데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 보다는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이 더 쉬운 법이다. 주님이 부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소유한 모든 것을 포기하면 하늘나라에서 무진장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나니, 천국은 가난한 자를 위해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있느니라. 가난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너희들은 가난해야 하느니라! 그러므로 황금을 보기를 돌처럼 하라! 황금을 버려라! 황금을 내게 바쳐라! 그것은 하나님의 재산이니라! 내가 너희를 위해서 그 재산을 관리해야 하느니라!

설교자는 눈부신 말솜씨로 설교를 마무리하였다. 그러나 회중들은 지금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안과 혼돈, 육체적인 피로와 오한 속에서 그의 설교를 듣고 있던 무지한 사람들은 이제 막연한 두려움이 무서운 공포로 바뀌면서 저승의 수문장이 자기 가까이 다가와 있다고 생각하고 전율하였다. 그러면서도 마지못해 열광적인 박수갈채를 보냈다.

200년 전인지, 300년 전인지 계몽주의라는 신 새벽의 여명이 밝아 오고 있다. 사람들이 중세라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한다. 이제 종교재판과 마녀재판, 화형식의 망령이 사라졌다. 시대가 바뀌었으므로 설교자는 이제부터는 겸손하게 말했다. (다만 그가 칼뱅파인지 루터파인지 영국 국교도인지 동방정교회 소속인지, 로마 가톨릭인지, 심지어 그노시스파인지는 알 수 없다.) 단순한 건물과 장식이 하나도 없는 소박한 교회 안이다. 그는 초라한 복장에 왜소한 몸집이지만 공손한 자세로 한동안 합장을 했다가 다시 두 손을 떼고 이제는 가볍게 비비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을 부드럽게 하고 목소리 역시 더욱 낮춘다. 그는 더 이상 권위주의적 성직자가 아니다.

제가 지금부터 진실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는 무엇인가? 그는 회중을 설득하고 이해시키고자 하는가, 아니면 흥분시키고 분노케 하려고 하는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백 년 전만 하더라도 종교 재판소의 이단자 심문소의 재판과 화형식이 무서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였겠지요. 저도 연약한 인간이니까요. 누가 화형대의 불꽃을 아름답다고 찬탄하였는가요. 제 살과 뼈, 내장이 화염 속에서 녹아내리는 광경을 상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합니다. 새까맣게 타버린 살 냄새를 맡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래서 가끔 악몽을 꾸게 됩니다. 불에 훨훨 타는 악몽 말입니다. 가톨릭 교리에 심각한 회의를 품고 사제복을 벗어던진 사람, 조르다노 브루노는 화형식에 처해졌고 한 줌 재가 되어 바람에 날아가 버리지 않았던 가요.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예수는 신이 아니고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고말고요. 예수는 신의 아들이 아니고 인간의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는 공적 사역 기간 동안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스스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인간의 아들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아버지는 신이 아니라 목수 요셉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성모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 아니라 요셉의 정액으로 잉태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부는 신이 아니라 인간 요셉이어야만 합니다. 물론 이 말은 제가 처음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예수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의지를 이 세상에 전하려는 사명을 가진 하나님의 사자이고 선지자이었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은 모두 한결같이 신이 아니라 인간이었습니다. 동양의 공자도, 인도의 붓다도,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도, 유대 땅의 모세도, 아라비아의 무함마드도 말입니다. 
히브리 민족은 인간의 한계를 훨씬 초월했던, 신적 인간인 모세마저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 즉 예언자로 여겼지 신으로 간주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에 대해서도 현명한 사람 또는 진리의 친구라고 하였지 신으로 간주하지는 않았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인간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 수 있었던 것이지요. 붓다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에 대해 무관심하였습니다. 다만 바른 지식을 향해 다가가는 자기 노력에 의한 방법밖에는 인간을 구원할 다른 방법이 없다고 가르쳤지요. 무함마드는 자신은 신이 아니라 일개 하찮은 인간에 불과한 존재라는 걸, 그래서 육욕을 억제할 수 없어서 10여명의 여자를 거느렸다는 사실을 인정하였지요. 이 얼마나 솔직 담백한가요. 그러나 그는 예언자가 되었고 위대한 인간으로 칭송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 나는 로마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유독 예수를 신으로 만들었지요.
하나님은 ‘나는 시작이요, 마감이다. 나밖에 다른 신은 없도다.’라고 하였는데, 예수도 하나님이고 하나님도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두 사람이나 있는 게 아닌가요.
신의 본질적 특성인 즉, 불사불멸인데 인간은 필사필멸이 아닌가요. 예수가 신이라면 어떻게 해서 제자의 밀고에 의해 그따위 나무 십자가에서 허망하게 죽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더욱이 성모 마리아가 동정녀였고 오로지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하였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요셉은 예수의 아버지가 아니란 말인가요. 그의 정액에 의해 예수가 태어난 것이 아니라면 기껏해야 의붓아버지가 아닌가요. 성경은 예수의 형제가 네 명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등이지요. 또 예수님에게는 누이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형제가 여섯이라는 설도 있으니 그 둘은 유스도, 사무엘이고, 두 명의 누이가 있었는데 리사와 리디아가 그들이지요. 가톨릭교회는 마리아가 평생 동정녀였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신약성경에 언급된 예수의 형제와 누이들은 사촌이라고 보고 있고, 동방정교회는 이들을 이복형제로 보고 있습니다. 또는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하기 전 사망한 전처가 낳은 자식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신교는 마리아가 평생 동정녀는 아니었으며 이들은 예수의 친형제이고 친누이였다고 믿습니다. 참으로 제멋대로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네스토리우스는 삼위일체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가 보기에 예수는 온전한 인간에 불과하였지요. 다시 말하면 예수는 인간이지만 가끔 신성이 깃들인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것이지요. 그가 말했습니다. ‘나는 어린 소년인 하나님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이단으로 배척되어 아시아 쪽으로 쫓겨 갔습니다. 아리우스 역시 삼위일체설과 예수의 신격을 부인하고 신은 언제나 하나뿐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예수는 신의 사자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그 역시 이단으로 몰려 아라비아의 사막 쪽으로 쫓겨났지요. 그러나 아리우스의 주장은 수세기 후 지금은 세계적 종교가 된 이슬람교의 창시에 많은 영감을 부여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는 순수한 인간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목수였던 아버지와 함께 매주 엿새를 목수로 일했습니다. 주로 건축현장에서 목재와 돌을 날랐습니다. 주춧돌을 놓고 지붕을 덮고 문설주를 달았습니다. 벽에 회반죽을 바르거나 모자이크 바닥을 깔았지요. 그러므로 예수는 목수답게 검은 수염이 턱 밑을 덮고 있었고 어깨는 떡 벌어지고 피부는 햇빛에 그을리고 손에는 굳은살이 박혀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보다 연상의 여자였지요. 그러나 예수도 인간이었으니 젊은 시절 그녀 젖가슴의 달콤하고 따뜻한 향기를 흠뻑 들어 마시며 잠에 빠져들기도 했을 것입니다. 둘의 육체가 하나가 되었을 때는 얼마나 희열을 느꼈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자식인들 없었겠습니까. 왜, 아니겠습니까.
예수에게는 모두 열두 제자가 있었지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예수도 인간이었기에 유독 페두루를 편애하였고, 요한을 귀여워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유다가 왜 예수를 배신하였을까요? 젊은 유다는 질투심과 소외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인간의 무서운 질투심은 어쩔 수가 없지요. 악과 불행의 근원이지요. 그러니 질투는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게 합니다. 배반은 물론이고 살인까지 말입니다. 인류의 선조인 카인은 순전히 질투심 때문에 동생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저는 유다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이스라엘의 해방을 염원했던 유다는 열심당원이었습니다. 그는 메시아인 예수가 로마의 압제로부터 유대 땅을 해방시켜 주기를 열렬히 바랐습니다. 그러나 너무 인간적이고 허약한 인간 예수에게 실망했을 뿐만 아니라 그래서 심한 배신감까지 느낀 것이지요. 그는 유대인의 해방을 위한 하나의 계기가 될 계획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를 밀고하고 로마 총독에 의해 사형이 집행되면 그 사건은 온 유대인을 전율과 분노에 몰아넣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반란이 급속하게 전개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산헤드린의 재판정에서, 사형이 언도되고 집행되는 과정에서도 그때 예수는 너무 무능하고 무력했지요. 그랬으니 반란의 불꽃을 지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유다는 절망했습니다. 유다는 자신의 계략이 실패로 돌아가자 예수에 대한 사랑과 자기 연민의 감정을 안고 자살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어찌 유다를 원수처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부터 신이라면 공적 사역 기간 이전이었던 근 30년 동안에 예수는 무엇을 하였다고 추론할 수 있겠습니까. 왜 전지전능한 신이 거의 평생 동안 미천한 직업인 목수였단 말입니까. 신이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는데 말입니다.
그 당시 로마의 역사가인 타키투스는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를 사형시킨 상황을 꾸밈없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역사적 사실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해서는 도저히 그 진위를 밝힐 수 없을 만큼 너무나 말들이 많지요. 어떻게 이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는 그때 인류의 죄 때문에 죽었다고 하지만, 왜, 더욱이 기독교의 운명 예정설에 의하면 인간은 각자 미리 정해진 자신의 운명에 따라 삶을 살아갈 책임이 있는데 예수가 다른 사람의 운명까지 떠맡아야 하지요? 이 세상 모든 인간들이 온갖 죄악에서 구원을 받아야만 하는 어린 양이라면 말입니다, 우리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가요? 당신의 죄는 무엇이고 내 죄는 무엇이란 말입니까?
다시 말씀드리자면, 부활과 관련해서는 의심스러운 사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식물이건 동물이건 모든 생물은 반드시 죽습니다. 생 속에는 필연적으로 죽음이 들어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헤라클레이토스는 말했습니다. ‘만물은 유전하며 머물러 있는 것은 없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예수는 인간이었으므로 죽었습니다. 그런데 인류가 450만 년 전에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수억의 인간이 태어나서 죽었는데 오직 한 사람만 부활했다는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수 억분의 일. 정말 기적이 일어난 것일까요. 1,700년 전 골고다 언덕에서 일어난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적. 예수가 부활했다는, 암흑의 시대인 1,700년 전의 주장이 지금까지 유효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인간 이성에 대한 심각한 모독행위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활을 입증할 역사적 증거는 하나도 없다는 것만은 말씀드려야겠지요. 역사가들은 골치가 아파서 이 문제를 그저 외면하고 있습니다. 부활이야 말로 기독교 신앙의 토대인데 말입니다. 그렇지요.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있을 수 없고, 부활이 없으면 그들 교회가 존재하여할 의미가 없어져 버리지요. 부활이야말로 그들 종교의 대들보이고 초석이지요. 그러니 신학적 관점에서 누가 창작한 것이라고 봐야겠지요. 어쩌겠습니까.
그러나 그들 교회의 진정한 초석은 돈과 재물입니다. 황금입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외쳐대지요. 재산을 바쳐라. 십일조를 바쳐라. 그러나 십일조는 구약시대의 것입니다. 지금은 구약시대가 진즉 문을 닫았지 않았습니까. 저들은 신약을 강론하면서도 구약의 것을 슬그머니 집어넣었습니다. ‘십일조를 바쳐라, 십일조를 바쳐라, 십일조를 바쳐라, 십일조를 바쳐라.’
그런데 그 거대하고 화려한 성전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예수는 다 헤진 옷을 입고 맨발로 걸어 다니며 문전걸식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예수는 주눅이 들어 그 성대한 성전 안으로 들어오실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무슨 돈으로 큰 성전을 지었을까요. 여러분의 피땀 어린 돈을 성전 건축이라는 미명 하에 빼앗다 시피 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 건물은 단지 죽어있는 돌덩어리 아닌가요. 그 건물에 아무리 호화로운 것, 금붙이를 붙여 놓고 장식을 하여도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요. 무슨 깨우침을 주는가요. 우매하고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러니 그 거대한 성전에 속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이 땅덩어리가 바로 성전인 것입니다. 우리 가슴 속에 교회를 지어야 합니다. 그래서 황금에 중독된 부패한 인간들을 단죄하여야 합니다. 도둑질하는 자칭 사도, 간음하는 사도, 사기 치는 사도, 더럽고 추한 짓으로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 자들을 우리는 신의 이름으로 심판해야 합니다.
그리고, 왜, 어떻게 해서 인간 예수는 로마 가톨릭 성당에 걸린 성화에서처럼 정말 미남이고 근사하게 생긴 젊은이여야만 하는가요. 그리스 영웅처럼 너무나 잘생긴 남자. 그들 화가 중에서 누가 목수였고 노동자였던 예수의 실물을 보기는 한 것인가요. 나사렛 예수는 집안의 맏형으로 거의 평생을 가업인 목수 일을 하였습니다. 왜 목수의 일을 하는 예수의 모습을 그린 기독교 성화는 단 한 장이 없는가요.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인 예수가 그 천한 목수 일을 했던 것을 숨기고 싶었던 것일까요. 노동이야 말로 인간의 행위 중에서 가장 신성한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인간이었기에, 사형을 집행하는 로마 병사들이 머리에 가시관을 씌울 때, 단단하고 날카로운 가시가 피부를 깊숙이 찔렀고, 가시가 두개골까지 누르면서 주위의 신경이 심하게 욱신거리고, 얼굴에 피가 철철 흘러서 예수는 심한 고통을 느끼고 신음을 하였습니다. 병사들이 플룸바타이라는 작은 납추를 단 채찍으로 채찍질을 하는 동안에는 살점과 근육이 뜯겨나갈 때 극심한 고통으로 울부짖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동안 폐 주위에 서서히 체액이 고이며 숨을 쉬기도 어려운 고통에 시달릴 때에는 피로, 추위, 배고픔, 갈증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마지막으로 ‘목이 마르다.’고 말하였습니다.
십자가 옆에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예수의 아내 막달라 마리아 또 다른 마리아가 지키고 있었지요. 다른 제자들은 혼비백산해서 다 도망갔는데 말입니다. 여자들은 강인하지요. 모성애 때문이지요. 어쨌거나 그 당시 유대 땅에서는 여자의 경우 마리아라는 이름이 너무 흔했다고 합니다. 남자들의 경우에도 예수 역시 흔한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그때 인간 예수는 기껏 환영을 보았을 뿐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속은 것은 아닐까요. ‘네가 바로 나의 아들이다.’라는 말에.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있으면서 마지막 순간에 하늘을 바라보며 마침내 그걸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인간들아, 신을 용서하기 바란다. 신은 지금 자신이 한 짓을 알지 못하고 있느니라.’
나사렛 예수는 역사적으로 부재자가 아니라 실재자입니다. 예수는 더할 나위 없이 참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하나의 관념이거나 신화가 아닙니다. 심지어 악과 부정을, 간음과 살인을 할 수 있는 그리스 신들처럼 그러한 인간이었습니다. 영원한 형벌을 받아 한없이 깊은 구렁텅이에 빠질 수 있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은 혁명가로서 위대한 인간이었지만 동시에 가난하고 불쌍한 인간이었으니 골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던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1,700 여 년 동안의 기독교의 발전을 돌이켜봅시다. 그들은 종교 권력을 넘어 세속 권력까지 쟁취하고 유지하려고 하였지요. 탐욕적인 로마인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교리가 선택되고 해석되었습니다. 그들은 파렴치한 위선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앞세워서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의 원주민을, 북아메리카의 인디언을 학살하고 노예로 삼아서 착취하였습니다. 이는 예수를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성모독이지요.
그런데 예수는 누추한 마구간에서 태어나 거의 평생을 목수 일을 하였습니다. 공적 사역을 한 짧은 기간 동안에는 무일푼으로 문전걸식을 하며 맨발로 걸어 다니고 가난하게 살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찬양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는 왜 그리 거대하고 화려함의 극치인가요.
기독교는 예수가 창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꿈과 이상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 대신 로마인들이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잔인하고 화려한 종교가 탄생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삼위일체설을 공인하고, 제멋대로 예수의 생일을 조작하여 크리스마스 축제일을 만들고, 학살을 일삼고, 진리를 왜곡하고,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고, 종교재판과 마녀재판, 화형식을 거행하고, 성 베드로 성당을 건설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물론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지금이라도 초기 가난했던 기독교의 순수성으로 돌아갈 수 없을까요. 우리는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그의 인간성을 철석같이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너도 나도 교회로 와서 죄들을 고백하고 회개하며 용서를 빌지 않겠습니까.
예수는 나이 삼십에 이르자 비로소 핍박 받고 있는 유대사회의 거대한 부조리에 눈을 떴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거대한 악에 맞서 부조리한 사회의 변혁을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소외된 인간들, 불순하다고 해서 외면당했던 주변 사람들, 문전걸식하는 거지들, 나병환자, 매춘부, 사마리아인들의 편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 사회의 최대 권력자인 바리새파의 대제사장과 제사장, 서기들, 율법학자들에게 도전하였습니다. 율법을 맹목적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율법 지상주의에 맞서 근본부터 뿌리째 재정의하고자 시도하였습니다. 그는 긍휼과 용서, 사랑이라는 혁명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는 선동가요, 거짓 스승이오. 위험천만한 사기꾼이라고 몰아 붙였지요. 그들의 권위를 갉아먹고 자신들의 삶과 기득권을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예수는 대역죄로 십자가형에 처해졌던 것입니다. 예수야 말로 군대도 없고 칼도 없고 재물도 없고 조직도 없이 맨 몸으로 대담하게 복음을 설파하고 온 세상에 새로운 신앙을 말하고 사랑과 희망의 메시지를 보낸 진정한 항명자…… 반항자…… 이단자…… 혁명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스스로 자신의 머리에 왕관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가 바보였을까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는 용서하는 겸손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중세의 반항자, 항명자, 이단자였던 보고밀파는 잔인하게 학살 당하고 화형에 처해졌습니다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신자들이었습니다. 혁명가인 인간 예수를 숭상하고 신처럼 믿었지요. 그들은 살아있는 인간들에게 가해진 폭력과 불법행위가 과연 누구의 책임인지 자문자답하였습니다. 그들은 그 당시 억압받는 농민계급을 대변했고 모든 지배적 사회계급과 지상의 권력자에게 대항했습니다. 마치 예수처럼 말입니다.

교회에 모인 일부 회중은 진즉부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계속 예수님을 모욕하는 발언으로 일부 성도들을 분노케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리고 교회를 나서며 가르침을 뱉었다. ‘이건 신성모독이야, 진짜 신성모독이야. 이단자야, 이단자. 저 놈이야 말로 화형대에 올라가야만 하지. 그리고 영혼은 지옥으로……’
이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기대하고 있을까. 칭찬과 박수갈채를 기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이단적 설교이었기에 어느 정도 불길한 예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도 그를 존경하고 진심으로 따르는 몇 몇 신도들은 눈물을 머금은 채 그의 말을 경청했고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독자인 여러분과 필자인 나를 포함한) 우리는 알아야만 한다. 이단은 소수파가 믿는 것이고 그것은 강한 집단이 핍박받는 약한 집단의 교리에 붙이는 명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하는 것처럼 종교 교리 역시 내가 주장하면 정통이고 남이 주장하면 이단인 것이다. 이 명언은 영국 주교 윌리엄 워버턴이 말했다.

하나님은 당연히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그 존재를 증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당연한 것으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으니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 너무 많은 철학적 이론이나 사변을 늘어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건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궤변일 뿐입니다. 인간의 마음의 평화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신을 믿는 진정한 인간은 삶보다 죽음을 사랑하고 죽음에서 기쁨을 얻습니다. 우리는 죽어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품안에서만 존속하고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은 따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품 안에 있고 하나님은 우리 품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인가요. 인간이 누구인가요. 여기 모인 우리가 누구인가요. 인간이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인간 아니겠습니까. 이것이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가 주장하는 궁극적 진리의 요체인 것입니다.
아버지시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으로 어찌 하나님의 참된 뜻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저들을 구해주소서. 저들에게 지혜를 주시고, 저들을 인도해주소서.
그들은 함께 기도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과 함께 살다가 하나님 곁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과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그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사오니, 굳게 결심하오니 용서하십시오. 주의 은총으로 도와주소서.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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