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외국어대학교 태국어과 김홍구교수
반정부 시위대의 선거 보이코트 속에서 치러진 지난 2일 태국 조기총선의 투표율은 예상대로 극히 저조했다. 전국적인 투표율은 45.8%로 2011년 총선 때의 75%에 훨씬 못 미쳤다. 방콕의 투표율은 2011년 71.6%에서 26.1%로 뚝 떨어졌다. 전체 77개 주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34개 주에서만 투표율이 50%를 넘었다. 그 대부분은 현 집권 여당인 프어타이당의 텃밭으로 불리는 북부와 동북부로 각각 51%와 55%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지역 투표율도 2011년 총선 당시의 77%와 71%에는 한참 못 미치고 있다.

아직 최종 투표 결과가 언제 발표될지는 정확히 예상할 수 없지만 일단 프어타이당이 압승할 것으로 보인다. 프어타이당은 지역구 260석, 비례대표 60석 등 모두 320석 정도 획득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앞으로 후보 등록과 사전투표가 무산된 선거구에서 재선거를 실시한 뒤 선거 결과가 확정될 예정이어서 최종 의석수는 다소 가변적이다. 프어타이당은 2011년 선거에서 지역구 204석과 비례대표 61석 등 모두 265석을 차지한 바 있다.

선거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반정부 세력은 벌써부터 절차상 하자가 많다는 이유로 "이번 선거는 무효"라는 입장이다. 제1 야당 민주당은 헌법재판소에 선거 무효 소송을 제기할 방침이다. 이번 총선이 같은 날 일제히 실시돼야 한다는 헌법 108조에 어긋난다는 이유에서다. 현재 후보 등록이 무산된 남부 지역 28개 선거구와 12월26일 사전투표가 취소된 83개 선거구는 오는 23일 투표를 다시 실시할 예정이다.

태국에서는 이미 선거 무효 판결의 전례가 있다. 헌법재판소는 2006년 4월2일 총선을 무효화했다. 그 이유는 선관위가 투표일을 공정하게 정하지 못했다는 것과 기표소의 위치가 잘못되어서 옆 사람이 투표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헌법재판소 판결에 앞서 옴부즈맨은 당시 집권 여당인 타이락타이당이 군소 정당을 고용해 출마시켰다고 고발했다. 선거법에 따르면 단독 출마 선거구에서는 유효 투표의 20% 이상의 표를 획득해야 한다. 따라서 20% 이상의 득표율을 달성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된 지역구에서 타이락타이당이 군소 정당을 고용해서 출마시켰다는 것이었다. 이번 선거에서도 16개 선거구는 단독 출마 선거구였다.

앞으로 정국의 향배는 일차적으로는 헌법재판소를 비롯해 부패방지위원회, 선거관리위원회 등 독립기구의 역할에 달렸다고 볼 수 있다. 이들 기구들은 2006년 쿠데타 후 만들어진 2007년 헌법에서 그 기능과 역할이 크게 강화된 바 있다.

2007년 헌법의 특징 중 한 가지는 사법화를 두드러지게 강화했다는 점이다. 이런 현상을 일컬어 뚤라깐피왓 이라고 부른다. 이는 정치적 문제를 사법부에 의존함으로써 많은 문제점을 초래했다. 이후 정치의 사법화는 탁신 계열 정권 집권 시 중요 판결에서 사법부나 헌법재판소 같은 독립기구들이 반정부 대리인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푸미폰 국왕을 중심으로 한 군, 관료 등 기득권 네트워크는 정치적 위기의 분수령이 되는 시점마다 예외 없이 사법부 카드를 이용하여 정치에 개입하고 있다는 의심을 사게 됐다.

특히 지난 1월 태국의 정치 불안이 극에 달했을 때를 전후하여 헌법재판소와 부패방지위원회 및 선거관리위원회 등은 잉락 친나왓 정부의 정당성을 약화시키는 몇 가지 사건에 개입했다.

헌법재판소가 상원법 개정안(현재의 일부 선출 일부 임명에서 전원 선출로의 개정)이 위헌이라고 판결한 후 부패방지위원회는 국회에서 이 법안을 통과시킨 308명의 상·하원 의원들을 조사해 고발하기로 결정했다. 비록 잉락 총리는 고발 대상에 오르지 않았지만 이번 선거에서 재선된 의원들은 그 신분에 심각한 영향을 받게 될 수도 있게 되었다. 현재 잉락 정부가 2조 바트를 차입하여 메가 프로젝트를 추진하려는 데 대한 위헌 여부 청문회도 헌법재판소에서 진행 중이다.

부패방지위원회는 쌀 수매 정책에 대한 실패를 물어 상무장관 등 관련자들을 기소하기로 결정했을 뿐 아니라 정책을 총괄했던 잉락 총리를 추가 조사하기로 결정했다. 조사 이유는 쌀 수매로 인한 막대한 세수 손실과 부정부패, 중국과의 정부 대 정부 쌀 수출 계약서의 허위 작성 혐의 때문이다. 이 같은 사건에서 잉락 정부에 불리한 판결이 나온다면 그 정당성을 크게 훼손시키고 반정부 운동에 중요한 모멘텀을 제공할 것이 틀림없다.

일부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은 2일 총선일이 발표되자마자 정국 불안 심화 우려가 있다고 선거 불가론을 주장하더니 총선 연기를 놓고 정부와 대립 관계에 놓였다가 헌법재판소에 선거일 연기에 대한 권리를 누가 갖고 있는지 문의했다. 헌법재판소는 예정된 조기총선을 연기할 수 있다고 판결하면서 다만 잉락 총리와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이 함께 논의한 후 결정해야 할 사안이라고 밝혔다. 결과적으로는 예정대로 총선이 실시되었지만 반정부 세력은 헌법재판소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이번 선거는 불법 선거라고 주장하게 됐다. 재선거를 앞두고 선거관리위원회와 헌법재판소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게 될 것이다.

잠잠한 것 같이 보이는 군부의 동향도 정국 향배를 가늠하는 데 여전히 중요하다. 지난 10월 말부터 시작된 방콕 시위가 심각성을 더해 가면서 군의 입장도 변해 왔다. 초기에는 군이 개입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그 후 쁘라윳 짠오차 육군사령관은 "쿠데타 가능성의 문은 열려 있지도 닫혀 있지도 않다. 상황에 달렸다"고 밝혔다가 얼마 전에는 “사회 갈등이 폭력화되거나 해결이 불가능해질 경우 군이 나서서 이를 해결해야 한다”고 밝혔다. 폭력 사태가 발생하는 등 시위가 격화되면 군이 보다 적극적인 대응을 하겠다는 의지를 점층적으로 강도 있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위기가 심각해질수록 군부는 반정부적인 자세를 확연히 보이고 있다. 군은 지금도 유혈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으며 친, 반정부 양측이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촉구하면서 군은 어느 편도 아닌 국가와 국민 편에 설 것임을 강조했지만 사실은 반정부 국민민주개혁위원회를 편들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얼마 전 국민민주개혁위원회 시위 현장에서 경찰에 의해 붙잡힌 괴한들의 정체가 해군 현역 군인임도 밝혀졌다. 그들은 쑤텝을 보호하기 위한 임무를 띠었다고 알려졌다.

선거가 있기 전날 방콕 북부 락씨 교차로에서 총선을 저지하기 위해 투표함과 투표용지 배달을 막고 있던 반정부 시위대와 총선을 지지하는 친정부 시위대 간에 총격전이 벌어져 수 명이 부상당한 사건이 있었다. 사용된 무기가 군으로부터 반입된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군은 이를 부인하기도 했다. 군의 의심받을 만한 태도를 놓고 한 태국 일간지에서는 인상적인 표현을 했다. 군이 총격전이 난무하는 현장에서 ‘미소를 머금고 앉아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다시 말하면 사태 악화는 군 쿠데타의 명분을 만들어준다는 의미일 것이다. 선거 직후 미 국무성에서는 쿠데타 발발 가능성에 대해서 우려를 표했다. 군은 부인하고 있지만 선거 무효 운동의 상황 전개에 따라서는 군의 개입은 언제라도 가능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앞으로의 정국 전망을 하는데 있어서 헌법재판소, 부패방지위원회와 군부의 동향을 주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김홍구/ 부산외국어대학교 태국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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