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중원 변호사
슬픔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날 하늘에는 낮게 먹구름이 잔뜩 끼어서 날씨는 우중충하였습니다. 그러나 비는 아직 내리지 아니하였고 약간 거센 바람만이 남쪽 바다를 일렁이게 하였습니다. 2007년 6월 14일. 초여름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작은 통통배에 서서 두 수녀님은 하염없이 소록도를 뒤돌아보면서 흐르는 눈물을 것 잡을 수 없어 작고 예쁜 노란 손수건으로 연신 눈시울을 훔치고 있었습니다. 20대 꽃다운 처녀 시절부터 40년을 넘게 살았으니 소록도는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배는 10여분 만에 육지에 닿았습니다. 소록도와 녹동 항은 지척거리에 있습니다. 두 수녀님은 아침 일찍 아무도 모르게 섬을 떠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두 수녀님은 나이 들어 거동이 불편해서 더 이상 돌볼 수 없게 되자 고국인 오스트리아로 정확히 48년과 45년 만에 귀국하게 된 것입니다.

 

마리안(71세) 수녀님은 1959년에, 마가레트(70) 수녀님은 1962년에 소록도에 각기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그 무렵 오스트리아 의 고향에서 간호학교를 나온 두 수녀님은 수녀 회를 통하여 소록도 병원에 나환자들을 돌봐 줄 간호사가 없다는 딱한 소식을 듣고 자원해서 머나먼 이국땅을 밟은 것입니다.

두 수녀님이 소록도에 처음 왔을 무렵에는 문둥병 환자가 6,000여 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은 창살 없는 감옥인 소록도에 강제로 갇혀서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렵 소록도 병원은 가난한 국가 형편 때문에 재정적 지원이 빈약하여 치료약도 제대로 없었고 나환자들을 돌봐줄 의료진도 갖춰져 있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그 무렵, 그 후로도 오랫동안, 소록도에는 불법행위가 판을 쳤습니다. 강제로 수용된 것도 억울한데 남자들은 허약한 몸으로 대부분 오마도 간척사업이나 공사판에 동원되어 매일 매일 고된 노동일에 시달려야 했고, 나환자들이 결혼하기 위해서는 먼저 강제적으로 단종수술을 받아야 했으며, 어쩌다가 임신이라도 하게 되면 섬 밖으로 안 쫓겨나기 위해서는 강제로 낙태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두 수녀님은 처음 소록도에 당도했을 때에는 평생을 지내리라고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 치료해주고 돌봐주려면 평생 이 곳에서 살아야겠구나 하고 이내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해야 할 일은 지천이었고 돌봐야할 사람은 끝이 없었습니다. 두 수녀님이 팔을 걷어붙이고 환자들을 직접 돌보기 시작한 것이 이제 40여 년이 넘었습니다. 꽃다운 20대 처녀가 수천 환자의 손과 발이 되어 살아가며 어느새 일흔 할머니가 돼버린 것입니다.

두 수녀님은 환자들이 말리는데도 장갑도 끼지 않은 채 나환자들의 곪은 상처를 만져주고 꼼꼼히 약을 발라줬습니다. 그 무렵 한국 간호사들은 환자들을 혐오하고 무서워해서 위생복을 입고 위생장갑에 마스크까지 끼고 환자들에게 약을 줄 때에는 핀셋을 사용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 본국 수녀회가 매달 부쳐오는 생활비까지 쪼개 환자들의 우유와 간식비로 쓰기도 하고, 저녁에는 죽도 쑤고 과자도 구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은 섬 안에 있는 일곱 개 문둥이 부락을 일일이 돌았고, 한센인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영아원을 운영하면서 이들의 교육과 자활정착사업에도 헌신했습니다.

 

두 수녀님은 환자들과 소통하기 위해 우리말과 한글까지 깨우쳤습니다. 처음에는 우리말과 한글이 배우기가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었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아주 능숙하게 우리말은 물론 전라도 사투리까지 구사하게 되었습니다. 두 수녀님이 쓰는 전라도 사투리는 아주 구수하고 정다웠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파란 눈의 두 수녀님이 쓰는 전라도 사투리를 들으면서 파안대소하며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수녀님은 참으로 한 없이 겸손하였으며 하느님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얼굴을 알리지 않은 베풂이야말로 참된 베풂이라고 믿어 의심치 아니하였습니다. 그래서 10여 년 전 오스트리아 정부가 주는 훈장은 두 수녀님이 처음에는 한사코 거절하여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가 그 먼 섬까지 찾아가 그 사정을 간곡히 설명하고 겨우 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수녀님들이 환갑이 되었을 때에는 병원 측이 마련한 회갑 잔치마저 “교회에 기도하러 간다.”며 도망 아닌 도망을 갔습니다.

 

두 수녀님이 녹동 항에서 서울행 시외버스에 올랐을 때에는 40여 년 전 소록도에 처음 올 때 가져왔던 해진 가방 하나씩만 달랑 들려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알려질까 봐, 무슨 송별식이 같은 것이 있을까봐 이른 새벽에 조용히 남몰래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편지 한 장만을 남겼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은인들에게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고, 우리들이 있는 곳에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이야기 하였는데, 이제 그 말을 실천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많이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감사하며, 저희들의 부족함으로 마음 아프게 해드렸던 일이 있었다면, 이 편지로 용서를 빕니다.”

 

작은 사슴처럼 슬프고 아름다운 소록도에는 지금은 늙고 오갈 데 없는 환자 600여명만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환자들에게 온갖 사랑을 베푼 두 수녀님이야 말로 살아있는 성모 마리아라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두 수녀님이 작별인사도 없이 섬을 홀연히 떠난 무렵에는 섬 전체가 슬픔에 잠겨 모두 일손을 놓고 성당에 모여 열흘 넘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두 수녀님은 지금은 오스트리아 시골에 있는 낡은 집 서너 평 남짓한 방 한 칸에 살고 있습니다. 소록도가 바로 고향 같았기에 이곳은 도리어 낯선 땅처럼 느껴진다고 합니다. 방을 온통 한국의 소품으로 장식해 놓고 매일 밤 소록도 꿈을 꾼다고 합니다. 방문 앞에는 우리말로 직접 쓴 글이 액자에 담겨 걸려있습니다.

“지금도 우리 집, 우리 병원 다 생각나요. 바다는 얼마나 푸르고 아름다운지… 하지만 괜찮아요. 마음은 소록도에 두고 왔으니까요.”

 

한센병

한센병은 나균에 의해 감염되는 제3군 법정 전염병으로 나병이라고도 한다. 주로 피부에 나타나는 침윤 구진 홍반 멍울 등과 지각마비를 가져오거나 말초신경을 주로 침범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기타 부위의 조직에 침범하기도 한다.

1871년 노르웨이의 의사 A.G.H. 한센이 나환자 나결절 조직에서 세균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여 유전병이 아니라 전염병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기존의 나병이라는 명칭 또한 차별과 편견이 서려 있다고 하여 최근에는 통상 한센병으로 불리 운다.

한센병은 치료받지 않은 환자에게서 배출된 나균에 오랫동안 접촉한 경우에 발병한다. 그러나 전 세계 인구의 95%는 한센병에 자연 저항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나균이 피부 또는 호흡기를 통하여 체내로 들어오더라도 쉽게 병에 걸리지 않는다. 특히 1941년 특효약 답손(dapsone)이 발명된 이후 완치가 가능한 질병으로 분류되었다.

1956년 4월 16일 로마회의에서 나환자에 대한 차별적 법률폐지, 나병에 대한 계몽교육 강화, 나환자의 조기발견과 조기치료, 격리수용주의 시정, 나환자 자녀 보호, 나병 치유자 사회복귀 지원 등을 촉구한 ‘나환자의 강제격리 수용을 반대하고 사회 복귀를 결의하는 결의서’, 이른바 로마 선언이 채택되었다.

1970~1980년대부터는 2~3종의 약을 복합적으로 단기간 내에 강력하게 투여하여 치료하는 복합화학요법(MDT)을 사용하여 대부분이 완치되고 있고, 최근에는 나균을 배출하는 환자의 경우도 리팜피신(rifampicin) 600mg을 1회만 복용하여도 체내에 있는 나균의 99.99%가 전염력을 상실한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전체 한센병 환자 중 극히 일부 환자만이 전염원이 되며 약제 투여가 시작된 후에는 전염원이 될 수 없다. 초기 발견 시에는 쉽게 치료가 돼 오늘날에는 일반 피부 질환자와 같은 자유로이 생업에 종사하며 진료를 받고 한센병은 비록 3군 법정 전염병으로 지정되었지만, 격리가 필요한 질환이 아니고 성적 접촉이나 임신을 통해서도 감염되지 않는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MDT 요법을 사용한 결과 나균의 99.99%가 멸균되고, 재발률 또한 현저히 낮아져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한센병은 완치되는 질병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러나 한센병은 피부과 영역의 질병이면서도 역사적으로 특별하게 취급하는 이유는 나균은 만성적으로 세대 증식을 하며, 9개월에서 20년에 이르는 긴 잠복기를 가지고 있고, 나균은 인간의 신경을 특이하게 침범함으로써 신경 손상에 따른 얼굴과 손발 등이 심하게 뒤틀리는 불구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한센병은 조기에 발견하여 치료함으로써 단기간 내에 후유증 없이 완치시킬 수 있다. 하지만 조기 치료의시기를 놓치면 병의 치료 기간도 길어지고 병의 진행으로 인한 후유증이 심각할 수 있다.

이 병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구약의 레위기 13장에 의하면 문둥병으로 확진이 될 경우 제사장은 그 사람을 부정한다고 선언해야 했고, 부정한 사람은 진 바깥에서 혼자 살아야 한다. 그리고 2,000여 년 전, 예수가 공적 사역을 하였던 시기에도 이 병에 대한 기록이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20세기가 도래하기까지) 영원한 불치병이었으므로, 그래서 치료가 불가능했던 시대에는 문둥병 또는 천형병天刑病이라고 하였다.

 

죄명은 문둥이

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죄이올시다.

아무 법문의 어느 조항에도 없는

내 죄를 변호할 길이 없다.

 

국가의 폭력, 불법행위의 성립

먼저, 원고들이 승소했다는 말씀을 드릴 수 있어서 저도 매우 기쁩니다. 판사도 공무원이기는 합니다. 국가로부터 월급을 받고 있지요. 그러나 국가가 몹쓸 짓을 저질렀다는, 자괴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무고한 사람들에게 가혹한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저희들이 국가를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만 뒤늦게나마 여러분께 깊이 머리 숙여 사죄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 당시 시대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해도 소용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판결 이유를 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자세한 것은 판결문이 송달되면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 사건 쟁점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원고들은 주장합니다. 국가는 자신이 운영하는 국립소록도병원 등에 원고들을 강제로 격리 수용하면서 그 병원 의사 등이 원고들에 대하여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강압적으로 단종 또는 낙태수술을 시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원고들은 그러한 불법행위로 인해 입은 정신적 고통으로 인한 손해를 국가가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피고인 국가는 단지 한센인들에 대한 치료와 생활지원 등을 목적으로 하여 병원을 설립하고 운영하여 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로 원고들 본인의 진술이나 전문증거에만 의존하여 내려진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만으로 원고들이 강제로 단종 또는 낙태수술을 받은 피해자라고 인정하는 것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설령 당시 국가 소속 의료진들이 원고들에게 단종 또는 낙태수술을 해 주었다고 하더라도 이는 모두 당사자들의 동의를 받은 것으로서, 당시의 의료 수준 아래에서 한센병의 전염을 예방하고, 병원의 수용 한계 등으로 고려한 부득이한 조치였으므로 위법성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다음으로, 단종 낙태 피해 원고들이 국립소록도병원 등에서 정관절제수술 또는 임신중절수술을 받았는지 여부를 살펴보겠습니다.

원고들이 정관절제수술 또는 임신중절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내용의, 한센인피해사건의진상규명및피해자생활지원등에관한법률에 따른 진상조사위원회가 작성한 피해자 신고서, 본인 진술서, 보증인이 작성 제출한 피해사실 확인 보증서, 원고들의 소송대리인이 원고들의 진술을 청취하여 기재한 진술서의 각 기재는 원고들 스스로의 진술 및 원고들과 부부관계 또는 이웃이나 친지인 사람들이 주로 원고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진술하는 것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원고들의 진술은 모두 자신들의 인생에서 결코 잊기 어려운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으로서, 각자의 진술들이 대체로 구체적이고 그 경위에 관한 설명 또한 설득력이 있으며, 정관절제수술과 임신중절수술은 모두 몸에 흔적이 남는 것으로서 그 수술을 받았다는 점 자체에 대하여 거짓말을 하기는 어렵다고 할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 이래 국가가 한센인의 치료 및 격리수용을 위해 운영한 국립소록도병원 등에서 1990년대까지도 공식적인 규칙이나 예규, 정책 등에 의하여 부부가 동거하는 경우 정관수술을 받을 것을 원칙으로 한 사실, 국립소록도병원 운영규정에도 한센인들의 임신, 출산 금지 조항이 명기되어 있는 등 국립소록도병원 내에서 출산이 금지되어 있었던 사실, 의사 또는 간호사, 한센인 중 일정 정도 의료교육을 받은 의료보조원 등에 의하여 1992년까지 공식적으로 정관절제수술이 이루어진 기록이 있고, 1980년대 후반까지 낙태수술이 공공연히 이루어진 사실 등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하여 한센인 스스로도 한센병은 전염성이 강한 질환으로서 특히 자식에게 전염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인식하고, 심지어는 유전되기도 하는 질환이라고 오해하기도 하였습니다.

나아가 이러한 격리수용 정책은 일반인들로 하여금 한센인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조장하는 것이었음과 동시에 한센인들에게는 열등감과 외부 사회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 주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설령 원고들이 결혼하기 위해 정관절제수술 또는 임신중절수술을 받는 것을 원하거나 승낙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는 진정한 의사에서의 동의 또는 승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즉 국가가 정관절제수술을 조건으로 부부동거를 허용하고, 임신에 대하여 비난을 가하면서 퇴소당하지 않는 조건으로 임신중절수술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원고들로서는 사실상 그 조건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국가 소속 의사 등이 단종 낙태 피해 원고들에게 정관절제수술 및 임신중절수술을 한 것이 위법한지, 적법한지 여부를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국민은 신체의 자유를 가지며, 신체의 자유는 정신적 자유와 더불어 헌법이념의 핵심인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자유로서 모든 기본권 보장의 전제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체의 자유의 일부로 이해되는 ‘신체를 훼손당하지 않을 권리’는 그 성질상 생명권과 더불어 인간 생존의 기본적 권리이며, 이는 신체의 자유 중에서도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하고, 모성의 보호를 위하여 노력할 의무가 있으며, 모든 국민은 보건에 관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습니다.

원고들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누려야할 위와 같은 헌법상 권리를 단지 한센병을 앓았거나 앓은 적이 있다는 이유로 국가가 법률상 정당한 근거 없이 침해할 수 없다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할 것입니다.

한센병 환자들에 대한 단종수술은 1915년경 일본에서 전염병 예방과 우생학적 이유를 내세워 최초로 실시되었습니다. 국립소록도병원에서는 1936년경 기존에 남녀 별거제를 엄격히 실시하던 방침을 바꾸어 ‘단종법’을 실시할 것을 조건으로 하여 부부 동거제를 허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해방 후에도 한동안 계속되어 1960년대 초반까지도 강제로 단종수술을 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양소 수용환자 준수사항’을 제정하여, 남 환자와 여 환자를 엄격히 구분하여 수용하고, 부부생활을 희망하는 자는 거세 수술자에 한하여 인정하고 이를 위반하는 자는 처벌한다는 등의 규정을 두고, 그 무렵부터 다시 정관절제수술을 시행하여 수술을 받은 자에 한하여 부부가 동거할 방 내지 공간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리고, 젊은 부녀자에 대하여 매월 정기적으로 임신 여부에 대하여 의사 및 간호사의 검진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입원 중 병원 내에서 출산은 금지되었고, 통상 임신한 환자가 출산을 원할 경우 퇴원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퇴원을 원하지 않을 경우에는 임신중절수술을 시행하였습니다.

이후 위와 같은 출산금지 조항은 2002년 10월 24일에 이르러서야 국립소록도병원 운영세칙에서 완전히 폐지되었습니다.

그런데, 부부가 동거하고 자녀를 갖는 것은 인간 본연의 욕구이자 천부적인 권리이며, 이는 결코 죄악시될 수 없는 행복추구권의 기본적인 내용입니다.

결국 국가 소속 의사 등이 원고들에 대하여 정관절제수술 또는 임신중절수술을 한 것은 국가가 정당한 법률상 근거 없이 국민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신체를 훼손당하지 않을 권리와 태아의 생명권을 침해하는 것임과 동시에 자손을 낳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어 행복을 추구할 권리와 사생활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훼손한 것입니다. 개인의 존엄을 기초로 한 혼인과 가족생활을 보장할 의무와 모성의 보호를 위하여 노력할 의무, 보건에 관하여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지요. 그러니 어느 측면에서 보아도 위법함을 면할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센인들에 대한 일반인들의 냉대와 멸시는 그들에게 사회로부터 배제되고 인간으로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심한 정신적 고통과 모욕감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국가는 사회적인 차별과 편견에 의하여 고통 받고 살아온 한센인들에 대하여 이를 해소하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이에 편승하여 한센인들을 엄격히 격리하고 자녀마저 두지 못하게 함으로써 원고들을 비롯한 한센인들에게 심한 열등감과 절망감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정관절제수술과 임신중절수술은 원고들이 갖고 있는 인간 본연의 욕구와 기본적인 행복추구권을 정당한 법률상의 근거 없이 제한하면서 오히려 원고들에게 죄의식을 갖게 하고 수치심을 느끼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인권적이고 반인륜적인 성격이 강합니다.

국가의 불법행위로 인하여 단종 낙태 피해 원고들 대부분이 노후를 보살펴 줄 자식도 없는 처지가 되어 외롭고 쓸쓸한 노년을 보내게 되었으므로, 금전으로나마 그 고통을 보상해줄 필요성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녁밥을 먹던 중 그녀(김△△)의 손에서 숟가락이 떨어진 건 1944년 늦은 봄이었다. 그녀가 6살인가 7살인가 되었을 때였다. 그들 5남매가 아버지와 저녁밥상 앞에 앉았을 때였다. 가난한 농사꾼이었던 아버지는 그녀에게 숟가락을 다시 쥐여 준 다음 그녀를 외면한 채 묵묵히 밥그릇을 비웠다. 그날 밤 늦게 어머니의 흐느낌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아버지도 그랬는데…… 어린 것이 불쌍해서 어떻게…… 이게 웬 날벼락이요. 유전병이 틀림없어요. 나를 빼먹고 딸년한테 내려간 거예요.

그때 아버지는 깊은 한숨만 내쉴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그때부터였다. 얼굴에 벚꽃의 분홍색이 나타나고 속눈썹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절망적인 분홍색 또는 자주색은 병이 완쾌된 다음에도 얼굴에 아련하게 남아있으므로 평생을 두고 따라다니는 이 병의 고유한 색깔이다.

그녀가 지나갈 때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문둥이, 문둥이야. 저건 쳐다만 봐도 전염이 될 수 있어. 정말 재수 없어. 침을 뱉어, 침을. 그 무렵이었다. 어머니 손에 이끌려 고향인 벌교읍을 떠나 외할아버지가 계시는 소록도에 들어간 것이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바다 건너에 그곳이 있었다.

1945년. 그해 해방이 되고나서 어수선한 틈을 타 그들은 섬을 탈출했다. 그녀는 소록도에서 나와 줄곧 외할아버지와 함께 고흥의 외딴섬에서 살았다.

외나로도를 오가는 돛을 한껏 펼친 무명의 고깃배들이 호수처럼 맑은 바다를 가로질러 띄엄띄엄 지나갔다. 배들은 그 작은 섬을 잊어버린 듯 소리 없이 지나갔다.

할아버지는 그 섬과 분명히 어떤 연고가 있었다. 외할머니의 고향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할머니는 고흥에서 벌교로 시집을 왔다고 했으니까. 아무튼 할아버지는 그 섬을 잘 알았다. 그 섬에는 여름이면 살모사 같은 뱀들이 지천이었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살모사가 좋은 거여. 옛날부터 문둥병에는 특효약이라고 소문이 났거든. 문둥이는 우선 건강해야 하니까.

그래서 여름에는 입에서 비릿한 냄새가 풀풀 날 만큼 지겹도록 살모사를 많이 잡아서 삶아 먹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때 매일 바닷갈매기의 울음소리와 날갯짓 소리를 들었고, 염소를 키우며 살았다.

할아버지는 자기 나이를 기억하지 못했다. 손가락과 발가락은 진즉 기형이 되어 소나무 뿌리처럼 휘어져 있고 그나마 양쪽 손 모두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과 가운데 손가락만 남기고 나머지 손가락은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눈썹은 다 빠지고 얼굴은 흉측하게 뒤틀려 있어서 콧구멍과 콧구멍 사이의 코 벽은 완전히 휘어져 뻗어 올라가다 코끝에 이르러 방향을 오른쪽으로 비틀었다. 이빨은 달랑 구리로 만든 두 개가 전부였다. 그러나 매순간 봉초 담배를 능숙한 솜씨로 헌 종이에 말아서 피었고, 고흥 읍내 밀주 집에서 만든 싸구려 독주를 너무 좋아했다. 그 소주는 양잿물을 섞어서 만들었다고 소문이 나있었지만 할아버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딸꾹질을 할 때마다 술 냄새가 두 개의 구리 이빨 사이로 흘러나왔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어쩌겠노…… 내 눈썹이 빠지면서부터 반쯤 미쳐서 정신머리도 반쯤 빠져버렸지. 우리 먼 조상 중에 단단히 죄를 지은 사람이 있었을 거야. 그래서 하늘이 천벌을 내린 거야. 너희 엄마를 건너뛰고 너에게 내려왔고…… 자손대대로 내려갈 거야. 너나 나나 태어난 게 잘못인 게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데. 천 년 만 년 대대로…… 이를 어찌할꼬. 예수님께서 우릴 깨끗이 낫게 해주시던가, 아니라면 우리 집안의 씨를 뿌리 째 말려달라고 기도를 하고 싶구나. 소록도에는 끝장난 사람들이 죽으러 들어오는데 사실은 사람이 아니라 문둥이들이지. 내가 죽으면…… 이마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애를 남겨두고 내가 어찌 눈을 감을꼬.

어떤 문둥병 환자가 예수님께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간청했습니다. 주여, 주님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낫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불쌍히 보셨습니다. 그래서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니, 깨끗해져라. 그러자 바로 그 사람의 문둥병이 나았습니다.

그러나, 몇 년 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쩔 수 없이 벌교에 있는 부모님이 계신 집을 다시 찾았다. 가족들의 눈빛이 너무나 차가웠다.

아버지가 말했다. 이년아, 여기가 어딘데 기어들어왔느냐, 여기는 네가 올 곳이 못 된다. 네 집도 아니고 너는 우리 식구도 아니야. 그렇지 않아도 문둥이 집이라고 동네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는데…… 우리까지 쫓겨날 판이니…… 가대가 정리되면 네가 찾아 올 수 없는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될 거다.

그때 다시 아버지에게 억지로 이끌려 트럭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임시 집합소인 광주 송정리에 도착하니 350명 정도의 문둥이들이 모여 있었고 보름 뒤 녹동항에서 배를 타고 지긋지긋한 그곳, 소록도에 다시 들어갔다.

 

자갈밭 길이다.

문둥이풀아.

떫디떫은 길이지만 가거라.

해가 저물기 전에 가거라.

 

그때가 1950년 봄으로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었고 그녀가 12살 때였다. 어린 여자아이에게 외할아버지도 없는 소록도는 너무 외롭고 쓸쓸하고 무서웠다. 만나는 사람마다 얼굴이 일그러지고 손과 발이 뭉그러져 있는 어른들 뿐이었다. 빈대와 벼룩과 이가 밤마다 만신창이가 된 연약한 그녀의 몸을 인정사정없이 물어뜯었다. 전쟁 중에 있기 때문에 먹을 것도 변변히 없었다. 보리농사와 보리타작을 거들었지만 하루하루 연명하기 힘들었다. 얼마나 많이 굶었는지. 고향에서는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했고 그곳에서는 소록도 녹생국민학교를 입학하기는 했지만 몸이 너무 허약하고 만날 기침을 하여 그나마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독신사에 머물며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살아갈 수 있었다.

또다시 몇 년간이 흘러갔다. 시간은 도도한 강물처럼 흘러갔다. 이웃집 마음씨 좋은 할머니가 소개를 했다. 같은 마을에 사는 문둥병 환자였다. 나이가 열두 살이나 넘게 차이가 났지만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듬직한 남자에게 의지해야만 했다.

그런데, 어느 날 홀연히 수수께끼 같은 어둠 속에서 여리고 상처받기 쉽고 순수한 그녀 앞에 그 남자가 껑충껑충 뛰쳐나왔다. 그녀는 그 남자의 얼굴을 이미 알고 있다. 비록 그때까지 서로 말을 나눈 적은 없었지만. 몇 번씩이나 멀리서 흘깃 훔쳐본 적이 있었다.

구름 사이를 뚫고 나온 태양이 조용한 남쪽 바다에서 금빛으로 빛났다. 하늘이 우리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 중 하나인 구름. 얇은 구름 조각 뒤로 파란 가을 하늘이 비친다. 하늘 가득 펼쳐진 반투명 구름은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그러므로 흘러가는 구름은 희망과 원망, 향수의 영원한 상징이 된다.

바닷가에서 갈매기가 날개를 한껏 펼친 채 허공을 유유히 맴돌고 있다. 갈매기를 애무하는 바람소리가 속삭이듯이 낮아지고 발밑에서 바다는 잔잔하게 누워있다.

할머니가 말했었다.

이 섬까지 들어온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비밀이 많은 거야. 고향이나 이름까지 숨기니까……. 우리는 서로 그런 걸 묻는 일도 없고 말하는 일도 없는 거지. 그러고 나서 죽어서 납골당에 들어간 다음에야 말을 하는 거라네. 그러나 그 사람은 심지가 굳은 사람이야. 첫 눈에 척 알아볼 수 있었거든. 나이가 좀 들었어도 괜찮은 사람이야. 사람은 혼자서 살 수는 없는 게야. 우리 늙은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젊은 사람들은 꼭 붙어서 살아야 하지 않겠어. 여자는 남자에게 의지해야……. 내가 잘 소개할 테니까.

한창 때이지, 남자 품이 그리운 나이가 된 거야. 유방이 꽃봉오리 같이 부풀어 오른 것 좀 봐……

그녀는 여자로서 이미 성숙했다. 그녀는 이제 육체적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무서운 나균도 그 욕망을 앗아갈 수는 없었다. 지고의 욕망, 순수의 욕망. 왜 아니겠는가. 여자의 허벅지에서 사무치는 저 난폭한 관능. 모든 생명력의 근원. 인간의 원초적 욕망인데. 뜨거운 욕망.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욕망.

남자가 여자의 다리, 허리 젖가슴을 더듬는다. 살갗의 감촉이 감미롭다. 그는 여자의 넓은 골반 속으로 깊이 들어갔고 허벅지가 조여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남자가 거칠게 숨소리를 내뿜는다. 이마엔 땀방울이 방울방울 맺혀있다.

그들은 사흘 밤을 함께 잠을 잤다. 뜨거운 갈망의 분출. 얼마나 황홀했던가, 황홀, 극치의 쾌감.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을 수 있었던 기나긴 겨울밤들.

남자가 말했다.

사내와 계집이 헌 신짝에 짝을 맞추는 것이…… 어쩌면 울고 싶은 하늘이 마련한 뼈아픈 경사가 아니겠느냐. 이 병은 사람에게 참으로 관대한 거야. 아무리 지독한 양성 환자라고 해도, 사지가 온통 허물어져나가도 상처가 여기까지 침입해 들어오는 일은 절대로 없거든. 그게 조물주의 조화인 거지.

그런데, 네가 알아야 할 게 있다. 육지에서 말이야, 한 번 동거한 적이 있었던 거야. 공사판 함바집에서 만났거든. 여자가 뭔가 눈치를 챈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도망을 갔어, 아주 멀리. 나는 그때까지 내가 문둥이인줄 꿈에도 몰랐었지. 내가 너무 억울해서 가슴에 칼을 품고 끝까지 찾아다녔지만 찾을 수가 없어서…… 그때 못 찾은 게 다행이었지. 찾았으면 둘 다 죽었을 테니까……

그리고 그들은 정상적인 사람들처럼 자식을 갖고 싶었다. 도저히 어쩔 수 없었다. 내 자식을.

하지만 소록도 병원은 일찍부터 결혼하려는 남성 한센인들에게 단종수술을 엄격하게 시행하고 있었다. 자식에게 유전되어 전염될 가능성이 있다는 거였다. 유전병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졌는데도 말이다.

야만과 폭력. 운명을 가장한 억압. 굴레와 멍에.

원생들의 무표정한 침묵.

그들은 그 비열한 폭력에 대해 철저히 복종하고 불가사의한 무반응으로 대응했다. 원래 그런 식으로 적응해 왔으니까. 자신의 병을 용서받지 못한 가엾은 문둥이들이므로.

…… 어떻게 할 것인가? 죄지은 문둥이가 자식은 뭐 할라고. 불알을 잘라버리라고. 잘라…… 잘라…… 잘라버려.

병원에서는 젊은 여성들을 매달 주기적으로 검진했다. 임신 사실을 들키면 육지로 도망을 가든지, 강제적으로 낙태를 해야만 했다. 감시의 눈초리가 무서웠지만 그래도 몰래 아이를 가지기로 했다. 그녀를 버린 가족을 잊어버리고 새 가족을 만들고 싶었다. 남자가 단종수술을 받기 며칠 전 잠을 잤는데 기적이 찾아 온 것처럼 임신이 된 것이다.

기적의 사흘 밤. 생명이 잉태하던 밤. 하늘이 생명을 허용했던 밤. 성모 마리아의 밤.

기쁨 때문인지 아니면 슬픔 때문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두 사람은 자꾸만 눈물이 치솟았고 그리고 함께 환하게 웃었다.

어쨌거나 아이와 함께할 미래를 꿈꾸며 행복했다. 그러나 검진 시기가 오면 꼭꼭 숨었고 외출할 때는 불러오는 배를 꽁꽁 동여매고 다녔다. 그런데 넉 달 뒤쯤 병원에서 눈치를 챈 것 같았다. 불러오는 배를 어쩔 수 없었다. 육지로 탈출하여 아이를 낳기로 했다.

남자는 눈시울이 젖어든다.

남자는 목소리가 먹먹해진다.

남자가 말했다.

가거라, 가거……. 그대는 더 이상 문둥이가 아니다. 완전히 나았다는 말이다. 그대가 왜 문둥이냐? 다른 사람들하고 틀릴 게 아무 것도 없다. DDS는 좋은 약인 거야. 눈두덩에 분홍색은 죽을 때까지 남겠지만……. 태어나기만 하면 사람은 어떻게든 살게 되어 있는 법이다. 이 병은 유전병이 아닌 것으로 이미 밝혀졌어. 자식들은 괜찮은 거야. 자식을 키우며 이를 악물고 살아야지.

나는 몸의 질병보다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거야. 여길 떠나고 싶지만 바깥세상이 두렵다. 너무 두려워……. 그 멸시를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느냐. 나갈 수도 없고 나가지 않을 수도 없으니……. 그래서 여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높은 철조망 울타리가 둘러쳐진 강제수용소이지만 피신처란 말이다. 피신처.

나는 건강하니까, 평생 노가다 일을 했으니 견딜 만하다, 여기저기 공사판에서 일을 하면 된다. 여기서 살다가…….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말이다, 여긴 다시 들어오지 마라. 보고 싶겠지. 잊어버려…… 잊으라고.

1961년 4월의 어느 봄날 저녁, 섬 거리가 온통 벚꽃 무리로 뒤덮였다. 그 분홍색이 사람에게서도 벚꽃에서도 넘쳐났다.

바닷가는 파도가 밀려와 조약돌을 어루만지고 뒤로 물러났다.

보리밭에 나갔던 사람도, 득량만 쪽 바다에 나갔던 사람도 집에 돌아와 있을 시간이었다.

밤이 되면서 짙은 어둠이 내렸다. 그녀는 남자와 함께 동생리 마을의 집을 출발하였다. 무슨 미련이 남아있는지 몇 번이고 뒤돌아보면서. 마을은 죽은 듯이 잠들어 있다. 철조망 지대를 통과하였다. 화장장, 납골당, 제재소, 연탄공장, 벽돌공장, 연합예배당과 중앙리 공원 광장의 탑을 지나쳤다.

탑에는 한하운 시인의 ‘보리피리’가 새겨져 있다.

보리 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ㅡㄹ 닐니리……

그 앞에서 남자와 헤어졌다. 남자가 어둠 속에서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서있다.

사람들의 왕래가 끊어진 때를 틈타서 배를 기다렸다. 해협 건너 손에 잡힐 듯 한 녹동 항이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 보인다. 그녀는 숨 막히는 순간 참을 수 없을 만큼 억눌린 감정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 배를 어루만져본다. 바다 건너에서 마지막 통통선이 다가오고 있다. 그때 순시소 순찰원 2명이 그녀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배의 난간을 붙잡고 배에 오르려는 순간 머리채를 잡혔다. 그녀는 구슬픈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넘어졌다.

이년이 어디로, 도망가려고. 꼼짝 마, 꼼짝. 나쁜 년.

신발이 벗겨진 채로 멀리 떨어진 소록도 병원 치료본관으로 끌려갔다.

다음날, 강제로 낙태수술을 받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수술대의 차가운 감촉 때문에 깨어났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대체 기억이 나지 않았다. 머리가 어지러울 뿐이었다. 아름다운 생명체가 곱게 자라고 있었던 자리엔 무거운 통증만 남아 있었다. 의사는 그녀의 자궁 속을 샅샅이 긁어내 버렸던 것이다. 쌍둥이야. 간호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짧은 한 마디를 남기고 수술실을 나가버렸다.

그 후 허구한 날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진한 아쉬움이 그녀의 가슴을 떠나지 않았다. 짙은 어둠 속에서 빗줄기가 워낙 심하다. 사방은 대지를 두들기는 빗방울 소리와 바람 소리와 파도 소리뿐이다.

상처받은 영혼.

늦가을이 되었다. 온통 단풍이 소록도의 낮은 산들을 물들였다. 그러나 그 쓰라린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 고통을 도저히 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더 이상 육지로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이 사그라졌다. 그 대신 머나먼 바다로 떠나고 싶었다. 남서풍 바람이 불어오고 저 멀리서부터 밀려오는 파도 소리에 귀뚜라미의 노래 소리가 섞였다.

소록도의 푸른 밤.

아무것도 잊을 수가 없어, 내 쌍둥이 자식을 만나러 가야만 되지, 자식들이 날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거야, 울면서 젖을 달라고, 우릴 버리지 말라고, 엄마! 엄마! 엄마! 우린 어떡해, 어떡해.

바람이 윙윙거리고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다. 먼 바다에서부터 달려온 거친 파도들이 검은 바윗돌에 부딪치며 괴성을 내지른다. 밤, 바람, 비, 파도. 그녀는 맨발이다. 섬에 들어오고 나서 처음으로 일망무제 바다가 펼쳐져 있는 섬 뒤쪽 해안가 절벽 위로 올라갔다. 발밑으로 검푸른 바다가 죽음의 제단처럼 누워있다. 그녀는 맥없이 뛰어내렸고 그리고 바다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억센 해초들이 하늘하늘 춤을 추며 그녀의 팔과 다리를 어루만졌고 그녀는 밀려드는 파도를 뚫고 바다 밑까지 내려갔다.

 

…… 암흑 속에서 영원히 잠을 자며 누워있고

……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머나먼 여행

 

다음 날 날이 밝았다. 안개가 자욱하게 서린 소록도 남쪽 바다에서 나비 한 마리가 돌연히 날아올랐다. 가을바람에 간신히 날개를 퍼덕인다.

 

연약하고 아름다운 나비. 별을 쫓는 나비의 염원.

나는 죽어서 나비가 되리라.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게.

 

그 나비가 천천히 날아서 그녀의 아담한 벌꿀 색 벽돌집 맞배지붕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나비는 부드러운 아침 햇살에 날개에 아직 붙어있는 물기를 말리면서. 나비가 다시 날아오른다. 그러나 차마 떠나지 못하고 몇 번인가 집 주위를 빙빙 돌았다. 그리고 가을 하늘 속으로 한 점, 점이 되어 사라졌다.

남자가 입을 꾹 다문 채 나비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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