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총재의 백의종군 - 민주당은 어디로?

3일 후 이기택 총재는 서울로 올라왔다. 소식을 듣고 전화를 해보니 생각보다는 많이 안정되어 있었다. "놀러가도 좋습니까?" 라는 말에 이기택 총재는 선선히 오라고 했다. 막상 만나보니 얼굴도 생각만큼 많이 상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이제 정치 마감해야지!"

"… 그래도 어떻게 소생 방법을 찾아 봐야지요… 다 늙은이도 아닌데 그 나이에 안방에서 쉬실 겁니까?"

"아냐! 이틀 정도 후에 백의종군 선언할까 하는데… 강창성 부총재랑 당신이 당을 잘 꾸려보라구!"

"저야 원내도 아니고 제가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말하기로 하면 강창성 부총재도 마찬가지지…"

"그렇죠.저만 해도 삼선까지 했다고는 하지만 원외이다 보니 지금 조달력이나 뭐 이런 것에 한계가 있는데… 안되죠."

"그럼…이부영밖에 없네?"

"만약 주신다면 그렇죠… 그러나 주신다 해도 당을 위해서는 집단지도체제가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나는 그만두겠어. 이제 백의종군 할거야."

그런데 바로 그 며칠 후 신문에 이기택 총재와 조순 씨가 만났다는 기사가 났다. 그렇다면 문제가 또 달랐다. 조순 씨의 명망성으로 놓고 벌 때, 이부영 씩나 맡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일단 나는 이기택 총재를 만났다.

"만나셨어요?"

"아니!"

"… 참내. 신문이 바보입니까?"

"아무튼… 안 만났어."

"… 어쨌거나… 그래 어떡하실래요?"

"조금 더 생각을 해 봐야겠어."

"만나긴 만났군요?"

"허허허… "

"어떻게… 그 양반 대통령 나갈려고는 하던가요?"

"모르겠어!"

이틀후 이기택 총재는 정식으로 총재직을 사퇴하고 평당원으로 백의종군 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당시 부총재가 나와 강창성, 하경근, 주중현, 이부영 씨 등 5명이었는데 그 중에서 제일 연장자인 강창성 씨가 총재 권한대행이 되었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이부영 씨는 '좋다, 당권에 도전하겠다. 전당대회를 하자'고 선언했다. 나는 11명밖에 없는 당에서 무슨 경쟁을 하느냐 싶어 집단지도체제를 하자는 입장이었다. 사실 이부영 씨가 한다고 해도 이기택 씨 계열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잘 끌려갈까도 싶고… 문제는 문제였다. 이기택 씨도 생각이 같았는지 나에게 물어왔다.

"이부영이 해서 당이 끌려갈까?"

"지금 현재로선 이부영 씨와 경쟁할 사람도 없고,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문제긴 문제입니다."

"이봐! 당신이 조순에게 정말 뜻이 있는지 좀 알아볼 수 없어?"

"… 그러죠."

조순의 세 번째 선택

나는 더 이상 미룰 것 없다 싶어 조순 씨에게 직접 전화를 했다. 조순 씨와는 국회 예산결산위원회 간사 때 만난 인연 말고도, 경기도지사 선거 때 조순 씨가 민주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나오면서 만난 인연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전화를 하자마자 굉장히 반겨하면서 '당장 오늘 만나자'는 게 아닌가! 이건 분명히 뜻이 있다는 얘기였다. 그런 뜻을 확인한 이상 이리저리 잴 것도 없다 싶었다. 만나서 잠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직접적으로 물었다.

"아니 신문에 대선 후보 운운하는 얘기들이 막 나오던데… 언제, 그런 결심이 서신 겁니까?"

조순 씨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리고는 거두절미하고 하는 말이,

"장 부총재! 나 좀 도와주십시오."

"그럼… 결심이 서신거군요?"

"그럴려고 그럽니다."

"아니… 언제 그런 결심을 하셨습니까?"

"얼마되진 않아요… 주변에도 자꾸 사람다운 사람이 없다면서 권유를 하는데… 그러면서도 나는 내가 혹시 나무는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싶어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보는 중이었는데, 보름 전 신한국당 경선과정을 보면서, 야 이거 집권여당에 문제가 많구나. 그렇다면 나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꼭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기보다는 뭔가 그런 측면에서 대안이 될 수 있지 않느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출마 문제에 관한 한 더 물어 볼 것도 없었다.

"그럼, 민주당을 택하실 겁니까? 아니면 제정구 씨 등의 얘기대로 국민후보로 해서 새로 정당을 만드실 겁니까?"

"글쎄요… 새로운 당 만들기가 어디 쉽습니까? 저야 도와주신다면 좋구요."

"요전에 이총재님 만났다는 얘기가 들리던데… 만나셨습니까?"

"만났죠."

"그 대 그런 얘기는 하셨습니까?"

"그런 얘기는 안했어요!"

정말 모든 문제에 조순 씨는 너무 솔직하다 싶을 정도로 분명하게 말했다.

나는 더 물어볼 것도 없다 싶어 일단 자리를나와 이기택 씨에게 전화를 했다. 그렇다고 또 가뜩이나 총재에서까지 물러난 사람에게 그런 저런 결정권까지 월권하는 것 같아 내가 직접 만났다고 하기도 뭐했다. 일단 조순 씨의 진정만 전하면 될 게 아닌가.

"아무튼 확실합디다! 확실하게 나갑니다!"

"그래? 확실한거야? 만났어?"

"본인을 만난 거나 똑같습니다. 아무튼 확실합니다."

그 이틀 후 조순 씨와 이기택 총재가 만났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이기택 씨는 차 한잔하자며 나를 불렀다. 가보니 강창성 씨도 와 있었다.

"주순에게 다 줬어!"

"무슨 얘깁니까? 뭘 줍니까?"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모든 것이 그렇게 속전속결로 이뤄지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 만나신 건 어떻게 되었습니까?"

"내가 세 가지를 얘기했는데… 하나는 후보만 하고 당은 내가 맡는다. 또 하나는 김대중 씨와 할 때처럼 공동대표를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후보도 당도 다 갖는다. 그러니 이 세 가지 중에 뭘 택하시겠습니까, 했지."

"뭐라고 하신던가요?"

"세 번째였어!

"그래서요?"

"그래 그러라고 했지 뭐. 어차피 내가 백의종군하기로 했는데 줄테면 다 줘야지 그럼 어떡하겠어?"

정말 강창성 씨와 나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어떻게 그런 문제를 상의 한 마디 없이 결정하나 싶어 서운한 마음도 밀려오고… 그러나 포항선거 패배 후 이기택 씨는 뭔가 자포자기하는 기분이었고, 그 상황에서 앞 뒤 잴 것 없이 그냥 성큼 다 내어준 것이었다.

어쨌거나 조순 씨의 세 번째 선택으로 우리는 한순간에 갑자기 미아가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조순의 무혈입성

그로부터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1997년 8월 30일 전당대회를 통해 조순 씨는 민주당의 총재이자 대통령 후보로 말 그대로 무혈입성을 했다. 단 20여 일만에 민주당이 통째로 주순 씨에게 넘어간 것이다.

그러나 나를 포함해 민주당 내에서는 다 박수를 치며 이를 환영했다. 가뜩이나 작은 당에서 포항 선거에서까지 패배한 후, 대통령 선거는 다가오는데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당시까지만 해도 조순 씨의 인기도가 24%를 넘나드는 상태였기 때문에 조순 씨의 입성은 당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당이 새롭게 정비되면서 부총재들은 그냥 부총재로 남아있기로 했고 새 사무총장에 이규정 씨가 내정되었다. 그런데…그 혹에서 우리들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포에 사무실을 따로 차려 특별팀이 꾸려지는가 하면 정책팀이 또 따로 있고 하는 식이었는데 조순 씨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하는 일들이었다. 말 그대로 우리는 갑자기 '구경꾼'이 되어 구경만 하는 꼴이 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잘만 된다면이야…' 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내색하지도 않고 지켜볼 뿐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마침내 해프닝이 벌어졌다. 대통령후보 지명대회 날, 자리를 보니 조순 씨의 제자들이 왼쪽에 앉고 우리는 우측에 앉도록 되어 있었다. 통상적으로 놓고 볼 때 주인이 밀려난 꼴이었다. 그것도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조순 씨가 연설을 마치고 내려와서 사람들과 악수를 하는데 드디어 그 해프닝이 벌어졌다.

어떻든 그래도 전 총재고 하니까 이기택 씨와 제일 먼저 악수를 나누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조순 씨가 막 이기택 씨와 손을 잡으려는 순간,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조순 씨의 손을 탁 잡고는 저쪽으로 끌고 가 버리는 것이다.

이유는 이기택 씨가 구시대 정치인이니 그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면 안된다는 것이었는데… 우리들이 놀란 것은 둘째치고 이기택 씨야말로 얼마나 충격을 받았겠는가.

"아니 그럴려면 민주당에는 왜 들어왔어?"

이런 소리가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이래저래 울적한 마음으로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데 이기택 씨는 계속 얼굴이 펴지질 않았다. 대단한 충격을 받은 게 분명했다. 어떻든 그 일을 계기로 이기택 씨와 조순 씨는 굉장히 서먹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고, 이기택 씨는 외국으로 나가 버렸다. 그렇다고 잡기도 참 뭐했다. 상황으로 보아 남아있다가는 더 안좋은 일을 당할 수도 있겠다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다른 것은 다 괜찮아도 이것만은 안되겠다 싶어 그 이틀 후 그 날 그 해프닝을 벌인 사람을 불러다, 아무리 정치에 아마추어라고 해도 그럴려면 당에 나타나지도 말라며 호되게 비판을 했다. 그런저런 과정을 보고 있자니 걱정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한창 잘해보겠다고 하는데 나서서 뭐라 하기도 그렇고 가만히 앉아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조순의 솔직한(?) 고민

대선기획단이 꾸려지자 이제 또 나를 불렀다. 당시 김원기 씨 등이 중심이 된 통추 사람들이 민주당으로 오네 안 오네 하는 말들로 상황이 좀 복잡했는데 그런 저런 일들 속에서 또 나를 부르는 것이다. 나는 조순 총재와 단 둘이 만나서 얘기를 시작했다.

"좋습니다. 당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해야죠. 그런데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 째, 일단 제가 맡으면 그 다음부터는 모든 일은 제가 계획하고 제가 결정합니다. 누가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말하겠다면 저는 절대로 못합니다."

"아, 그거야 그렇게 해야죠."

"둘 째, 선거에는 돈이 들어갑니다. 동에 대해서 상의할 수 있는 사람을 붙여 주십시오."

돈 얘기가 나오자 조순 총재는'그 문제에 관한 한 저도 괴롭습니다' 하면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어렵다 하시더라도 그것만큼은 해 주셔야 합니다."

나는 일단 그 말을 던져놓고 일단 대선기획단의 일을 시작했다. 또 그 복잡한 선거 일이 시작된 것이다. 새벽부터 나가서 후보의 아침 일정을 만들기 시작해, 밤늦게까지 종합계획을 세우고, 또 TV토론에 나가는 일들을 해 나가는데… 참 알 수 없는 건 돈에 대한 대책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전체 당원수련대회를 해야 하는데 그 연수복을 마련할 돈이 없어 천만원이 넘는 돈을 내가 개인적으로 융통해야만 할 정도였다. 그 와중에 인기는 자꾸만 떨어져 가고…

그런데 드디어 조순 총재의 마음이 흔들리는 걸 직감할 수 있는 계기가 왔다. 그 우여곡절을 다 겪으며 당원수련대회를 청평에서 개최하기로 해 놨는데 이제 갑자기 조총재가 안 오겠다고 나오는 것이다. 당원들은 청평에 와서 다 기다리는데 정작 후보가 안 오겠다고 하니 참 나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또 조순 총재는 한 번 안 오겠다고 하면 아무도 못말리는 성격이 있었다. 뭐 여러 가지 이유를 달긴 했지만 나는 그걸 지켜보면서 직감했다.

"아, 이 양반 끝까지 안 간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을 리는 없다 무엇보다 아무리 선거를 한 번도 치러본 적이 없는 조순 씨였다 해도, 선거는 어떻게 치러도 최소한의 자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는 없었을텐데… 그러나 막상뚜껑을 열고 난 후 자금이 딸리고 인기마저 떨어져 가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판단되었다.

기자들은 자꾸 '진짜 사퇴하느냐'를 물어오는데 그렇다고 할 수도 없고… 안개만 피우면서 끌고 나가자니 참 그것도 못할 일이었다. 솔직히 경기도지사 선거 같은 경우 패배할것을 예측하면서 뛴 힘든 선거였음에도 오히려 그 선거보다 이런 선거가 더 힘들지 않나 싶을 정도였다.

나는 안되겠다 싶어 조순 총재와 롯데호텔에서 단 둘의 대화시간을 마련했다. 조총재의 솔직한 대화법을 잘 알고 있는터라 나 역시 이리 저리 말을 돌릴 필요도 없이 첫 마디부터 "어떻게 할 겁니까?" 하고 물었다. 그런데 역시 조총재는 정말 솔직했다.

"제가 더 이상은 끌고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지금 당장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됩니다."

"장 부총재! 제가 돈이 없어요. 후원회가 모이고 한다고는 하는데 잘 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나는 정말 이번만큼은 또 피곤한 일에 끼여들지 싶지 않았건만 내 팔자가 어디로 가랴… 어차피 벌어진 일, 얘기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떻든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자, 이제 그럼 얘기를 해 봅시다. 지금 세 후보가 있습니다. 먼저 김대중 후보의 경우, 민주당이 내건 기치가 양김세력 청산이고, 그것이 바로 민주당의 도덕성인데, 그 민주당을 깨고 나간 김대중 후보의 경우는 안되는 것 아닙니까?"

"그거야 그렇죠."

"그럼 이제 남은 사람은 둘입니다. 어느 쪽에 마음이 있으십니까?"

"이인제 후보는 약속을 못 지킨 사람 아닙니까? 그 쪽은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회창 후보 역시 도덕성에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도 사실이죠."

"저는 세 후보가 규합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해야겠죠?" 일단 제가 그 쪽으로 방향을 잡아보도록 하죠."

그 다음부터 '건전세력 결집'이라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회창 후보와 이인제 후보를 차례로 만났다. 그런데 나도 상당히 기대를 했던 이인제 씨와의 만남이 있고 난 후 웬일인지 조순 총재의 안색이 좋질 않았다. 물어보니 당시까지만 해도 인기도가 높았던 이인제 씨가 좀 뻣뻣하게 나온 모양이었다.

그래도 모교의 선생님이고 하니까 '선생님! 제가 젊고 혈기가 앞서다 보니 경선 거부도 하게 되고 그랬는데 같이 좀 도와주십시요' 하면서 대충 했으면 되었을 일을, 꼬박 꼬박 '조선배님!' 하면서 그랬던 모양이었다. 만약 그렇게 했으면 조순 총재의 성격으로 봐서 분위기가 또 급선회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어떻든 이인제 씨에 대해서는 불쾌감만 안고 돌아온 셈이었다.

그 얼마 후 마침내 민주당과 신한국당은 합당을 했다. 이제는 또 옛날 친정식구라 해서 또 내가 그 과정에 끼여 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나라당이 탄생되었다. 나는 내가 굳이 원하지도 않았건만 다시 여당으로 돌아온 셈이었고, 그러나 다시 한 달 만에 선거에 패배하면서 다시 야당이 되었다. 어차피 나는 야당 할 팔자였던 것일까…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돌고 돌아 다시 만난 친정 식구들. 정말 노랫말처럼 희미한 옛 사람의 그림자를 다시 만난 것과 같았다. 그런데 5년 동안의 세월이 흐른 지금, 내가 바라보는 옛 사랑은 낯설 때가 많다. 무엇보다 야당이 되었건만 아직도 야당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다.

정치에 입문한 지 18년째! 생각해 보면 신기할 정도로 한국 정치의 가장 큰 회오리바람 속에 언제나 내가 서 있었던 것 같다.

13대 여소야대 정국에서 백담사 청문회에 이르기까지가 그랬고, 3당 합당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변화 속에서 합당에 따른 당내 정리문제며 또 3당의 각 계보의 융화문제며 각서 파동에 이르기까지 실무적인총괄을 담당해내야만 했다.

민정계의 구심점을 마련하자며 나섰던 경선 광정에서 또 실무자이다 보니 가장앞장서서 YS에 맞서야만 했고, 탈당 후 새한국당의 창당과 이종찬 후보의 대선 참여와 사퇴, 그리고 야권통합 운동을 한다며 뛰어다니다 마침내 민주당에 입당하기까지, 나는 또 역시 언제나 협상 테이블의 역할을 맡아야 했다.

이제 좀 편해지나 싶었더니, 경기도지사 사건에 휘말렸다. 그것도 휘말리는 정도가 아니라 당내 갈등의 한 가운데 나를 올려놓고 양쪽의 칼날이 내 몸 위를 긁어대는 것과 같았다. 하필이면 내가 그 경계선 한 가운데 올려질지 어찌 상상이나 했단 말인가! 원하지도 않았던 일들에 휘말리는 건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한 사람의 정치인이 받을 수 있는 상처란 상처는 다 받고, 이제 좀 핑계 삼아 쉬어보나 했더니 다시 민주당 재건에 또 나서야만 했다. 그리고 구당파와의 협상, 개혁신당과의 협상, 그리고 통합 민주당의 탄생까지 온갖 뒤치다꺼리란 뒤치다꺼리는 다 내 앞으로 몰려오는 꼴이었다.

원외로 남아 있는 상황인데도 97년 대선에서는 다시 또 조순 씨의 영입과 신한국당과의 협상 테이블에 나서야만 했다.

이쯤 되고 보니 내가 일을 몰고 다니는지 일이 나를 쫓아다니는지 나도 가끔 그것이 알 수 없을 정도다. 뭔가 깨지고 붙고 하는 일이 벌어지면, 꼭 불려가서 그 이음새를 잇는 첨병이 되어야 했으니 생각할수록 얄궂은 내 운명을 탓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속에서 나는 내 정치 생활 18년을 말하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하겠다.

"뭔가 열심히 하다가 엉뚱하게 당하고, 그 와중에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또 이상하게 일이 몰려와 다시 열심히 하다가 또 당하고…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양파 껍질 벗기듯 한 껍질씩 정치의 속살에 다가간 것 같다.

군더더기 후일담

승리 뒤에는 언제나 견딜 수 없는 허망함이 찾아오고 패배 뒤에는 언제나 새로운 열정이 솟아나면서 위안이 찾아온다. 그것은 왜 그런가? 아마도 승리가 우리로 하여금 똑같은 행동을 지속하도록 부추기는 반면 패배는 방향전환의 전주곡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패배는 개혁적이고 승리는 보수적이다. 사람들은 이런 진리를 막연하게나마 느끼고 있다. 영리한 사람은 가장 멋진 승리를 거두려고 하지 않고 가장 멋진 패배를 당하려고 노력했다. 우리의 실패는 이르면 이를수록 좋고, 우리를 물이 없는 수영장에 뛰어들게 해 줄 다이빙대는 높을수록 좋다. 명철한 사람의 삶의 목표는 동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교훈을 줄만한 참패에 도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승리로부터는 배울게 없고, 실패를 통해서만 배우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미』라는 소설로 세계적인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프랑스의 젊은 작가'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자신의 천재성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열네 살에 썼다는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의 '승리'항목의 전문이다.

나는 것을 내 정치생활 18년 동안의 얘기를 풀어 놓은 '정치. 희망과 절망의 10가지 사건'의 군더더기 후일담으로 남겨놓고 싶다. 어쩌면 이것은 지금까지의 내 삶 전체의 후일담이 될지도 모르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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