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중원 변호사
첫 번째 그림

12월 중순 경 ○○지청 김△△ 검사실의 풍경화.

겨울의 낮은 짧다. 희미한 석양의 햇빛이 창문에 걸려있다. 멀리 남쪽 바다에서부터 불어온 바람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바람이 바다의 짠 냄새를 실어왔다. 은행나무의 샛노란 낙엽이 유리창을 툭툭 쳤고 한 두 잎이 유리창에 달라붙었다.

검사실 아가씨는 검사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SNS를 보는데 정신이 없다. 검색창에 해시태그로 ‘섹’이라는 글자를 입력하자, 일탈족들이 올린 남녀를 불문하고 옷을 벗어젖힌 사진부터 성기 노출 사진, 성행위 동영상까지 그야말로 음란의 바다가 펼쳐지고 있었다.

서기는 책상 위에 수사기록을 펴 놓은 채 살펴보는 척 했지만 머릿속은 어젯밤 늦게까지 마누라가 길게 횡설수설했던 이야기를 되새기고 있다. 그게 무슨 뜻이었지? 무슨?

검사는 두툼한 겨울 잠바를 입고 소파의 상석에 앉아있다. 분위기는 경색되어있고 긴장감이 흘렀다. 피고소인은 중년 초반인데 벌써 머리가 반쯤 벗겨지고 코에 안경을 걸친 채 무릎에 손을 올려놓고 다소곳이 앉아있고, 그 건너편에는 얼굴이 누르스름하고 비열해 보이는 지주(그가 고소인이다.)가 앉아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턱에 가는 흉터가 있고 콧방귀를 뀔 때마다 그 흉터가 보일 듯 말듯 길게 늘어졌다.

두 사람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 곁눈질로 흘끔거리며 서로 쳐다보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얼른 고개를 돌렸다.

검사가 말했다. 별 것도 아닌데 서로 합의를 하시지. 그래서 끝냅시다.

고소인이 말했다. 검사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이 작자는 구속을 해야만 정신을 차릴 겁니다. 그가 말할 때는 담배 니코틴으로 누렇게 바랜 뭉툭한 앞니 사이로 약간의 침과 함께 쇳소리가 새어나왔다.

검사가 말했다. 피고소인은 어때요? 합의할 생각은?

피고소인이 말했다. 제가 뭘 알겠습니까……. 검사님이 알아서 해주십시오……. 그리고 검사를 쳐다보며 비굴하게 웃는다.

검사가 말했다.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사이 아닙니까. 그러니 싸울 필요가 없지요. 원수질 일 있습니까. 고소인이 조금 양보를…… 양보를…… 양보를 하란 말입니다.

고소인이 말했다. 어림없는 말씀입니다. 무슨 양보를…… 양보는 없습니다. 법대로 해주십시오.

검사가 말했다. 그래요, 법대로 해야지요. 돌아들 가세요.

검사는 잠시 후 불기소 결정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그림

○○지원 형사 법정.

막바지 겨울의 느지막한 오후이다. 남쪽 지방에는 벌써 동백나무가 꽃망울을 터뜨렸다. 우중충한 법정은 어두웠고 구식 온풍기가 웅웅거리며 여전히 뜨거운 바람을 뿜어내고 있다. 금요일이고 마지막 재판이어서 판사나 법원 서기 역시 홀가분한 표정이다. 방청객은 아무도 없다.

피고인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어정쩡하게 앉아있다.

판사가 말했다.

공소장에 의하면, 피고인이 돌산에서 정원용 돌을 캐면서 남은 폐석을 고소인의 산에 버렸다는 것인데 당초 수사검사가 불기소 처분을 하였지요. 그런데 이 사건은 고소인이 ○○고등법원에 재정신청을 했고, 법원은 피고소인을 기소하는 게 맞다면서 검사에게 기소할 것을 명령한 사건이지요. 그래서 이△△ 검사가 사건을 재조사한 후 피고인을 폐기물관리법 위반 혐의로 기소를 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당초 무혐의 결정을 내렸던 검사가 직접 재판에 참여를 하였군요. 뭐, 그림이 이상하기는 합니다만 법률 위반은 아니니까…….

검사가 말했다.

이 사건 재정신청의 결정문을 보면 형식 논리에 치우쳐 폐기물관리법의 법리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불가피하게 기소는 했습니다만 무죄를 선고해주시기 바랍니다.

판사가 말했다.

그렇다면, 결심을 하겠습니다. 2주 후에 선고를 하지요.

 

세 번째 그림

지금은 가장 잔인한 달, 4월이다.

달콤한 사월! 숱한 상념이 그대와 결합했구나, 마음이 합친 것처럼.

엷은 자주색 라일락꽃이 벌써 피었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은 자라나고, 기억과 욕망은 뒤섞인다.

○○지방법원 항소심 법정.

나른한 오후이고 춘곤증 때문인지 피고인은 터져 나오는 하품을 참기가 어렵다. 법정에서 팽팽한 긴장감은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다.

재판장이 말했다.

참으로 이상하지요. 판사생활 20년에 처음 보는 일이지요. 1심 법원이 피고인에게 벌금 50만원을 선고했는데 검찰 측에서 항소를 하였거든요. 그런데 담당 검사가 제출한 항소이유서를 보면, 법원이 유죄로 인정한 부분은 형식 논리에 경도된 나머지 법리를 오해한 것이라고 주장했더군요. 그러니까 말입니다, 검사가 무죄를 주장하며 항소했다 이 말입니다.

검사가 말했다.

글쎄, 말입니다. 전들 뭘 알겠습니까. 그냥 결심해 주십시오.

그때 방청석에 앉아있던 고소인이 벌떡 일어났다.

고소인이 흥분해서 말했다.

이게 무슨 경우입니까? 원, 세상에…… 그 많은 폐석을 남의 산에다가 버리고도 벌금이 50만원이면 그 법이 뭣 땜에 있는 거요. 그 뿐입니까…… 검사가 무죄를 주장하지 않나, 검사가 무죄라고 항소를 하지를 않나. 이게 말이 됩니까. 그렇다면 말입니다…… 그 검사는 검사 그만두고 아예 변호사로 나서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재판장이 말했다.

그렇지요. 그렇군요. 피해자의 항변도 틀렸다고 할 수는 없겠군요. 결심하고 3주 후에 선고 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재판장은 자기도 모르게 기지개를 펴고 하품을 하였다. 그리고 배석과 서기를 뒤따르게 하면서 법정을 떠났다.

3주 후 그 법정.

재판장이 말했다.

형을 선고하겠습니다. 피고인은 앉아있지 말고 일어나서 똑바로 서세요. 검사가 아무리 무죄 변론을 해도 소용이 없군요. 남의 산에다 무단으로 폐석을 그렇게 많이 버렸다면 처벌을 받아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폐기물관리법 제8조제1항과 제63조를 적용해서 징역 6월에 처합니다. 법정 구속하겠습니다.

피고인은 검사가 그렇게 변론했는데도 아무 소용이 없으니 억울하겠지요. 피고인은 7일 이내에 상고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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