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배 기자]뇌에서 장기기억이 형성될 때 일부 유전자는 단백질 합성 활동이 억제된다는 사실을 국내 연구진이 발견했다.

인간 뇌에서의 유전자 억제가 장기기억 형성에 중요하다는 사실을 분자적 수준에서 세계 최초로 규명, 뇌질환 치료 연구에 토대를 마련한 것.

이는 장기기억이 형성되려면 뇌에서 단백질 합성이 일어나야 한다는 기존의 통념을 뒤엎는 것으로, 기억을 방해하는 유전자를 찾아낸 셈이다.

강봉균 서울대 교수 연구팀은 “장기기억 형성에 관련된 유전자 조절에 관한 데이터베이스를 제공함으로써 관련 연구 분야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고 2일 밝혔다.

뇌의 양쪽 측두엽에 있는 해마는 장기기억을 담당하는 부위로 알려졌다. 학습한 내용이 뇌에 장기기억으로 저장되려면 이 해마에서 단백질 합성이 일어나야 한다.

실제 동물 실험에서 단백질 합성 저해제를 투여한 결과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장기기억이 잘 형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장기기억이 형성될 때 수만개에 달하는 전체 유전체 중 어떤 유전자들이 단백질로 만들어지는지, 또 유전자로부터 단백질로 합성되는 과정이 어떻게 제어되는지 등은 기술적 한계 때문에 밝혀진 바 없었다.

강 교수와 김 단장 연구팀은 이번에 수천 개의 유전자가 단백질로 만들어지는 정도를 한꺼번에 추적, 측정할 수 있는 '리보솜 프로파일링'(RPF) 기술을 도입해 장기기억이 형성될 때 뇌의 해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조사했다.

연구진은 실험용 생쥐를 특수제작한 통 안에 넣고 전기충격을 줘 공포 경험을 학습시킨 다음, 이 생쥐의 해마에서 일어나는 단백질 합성의 변화를 관찰했다.

그 결과 장기기억 형성 때 해마에서의 전체적인 단백질 합성 효율은 낮게 유지된다는 점을 발견했다.

신장이나 간, 고환 등 다른 조직에서와 달리 해마에서는 유전자가 단백질로 만들어지는 과정의 하나인 '번역' 작용을 담당하는 리보솜 단백질이 적게 생성됐던 것이다.

이는 장기기억을 만들 때 신경세포에서 단백질 합성이 매우 활발하게 일어날 것으로 본 연구진의 예측과 정반대의 현상이다.

연구진은 또 학습 직후 5~10분간은 'Nrsn1' 같은 일부 유전자의 번역이 억제된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런 유전자들은 단백질로 합성되는 경우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반대로 인위적으로 Nrsn1의 발현량을 늘리자 장기기억이 잘 형성되지 않았다. Nrsn1 같은 단백질은 '기억 억제자' 역할을 한다는 얘기다.

학습 후 수 시간 동안에는 일부 유전자들의 전령RNA(mRNA) 양이 줄어든다는 점도 밝혀냈다. 특히 이들 유전자의 상당수는 공통으로 에스트로젠 수용체1(ESR1)를 통해 활성화가 조절되는 유전자들이었다.

연구진이 학습 후 ESR1의 신호 전달을 높이자 생쥐의 기억 형성이 약해졌다. 다시 말해 ESR1의 신호 전달이 억제될 때 기억이 잘 형성된다는 뜻이다. 에스트로젠은 난소에서 생성되는 여성호르몬이다.

강 교수는 "여성 호르몬 자체가 기억 형성에 영향을 주느냐는 지금 얘기하긴 이르다"며 "이번 연구의 시사점은 다만 그 호르몬 수용체가 기억 억제작용에 중요한 네트워크에 관여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연구진이 찾아낸, 합성이 억제되는 유전자는 모두 20여개다.

연구진은 이번 연구 결과가 치매처럼 기억을 잘하지 못하는 질환뿐 아니라 특정 사건·경험에 대한 기억이 너무 강렬해 생기는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이나 우울증, 불안장애, 마약 중독 같은 각종 뇌질환의 치료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강 교수는 "장기기억을 뇌에 저장할 때 어떤 유전자들이 관여하는지를 총체적으로 밝혀내 앞으로 관련 연구 분야에서 새 도약을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장기기억이 형성되려면 단백질 생성이 중요하다는 것은 잘 알려졌었지만 일부 단백질은 오히려 생성이 억제돼야 한다는 점이 이번 연구의 중요한 성과"라며 "기억 억제 유전자들을 찾았다고도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연구 결과는 과학 저널 '사이언스' 온라인판 10월 2일자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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