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김영삼 14대 대통령 취임 선서
금융실명제는 문민정부 이전에도 정부가 2차례나 실시 방침을 밝혔다가 철회했을 정도로 반대의 목소리가 큰 정책이었다.

80년대부터 이철희·장영자 어음 사기 등 각종 대형 비리 사건이 터질 때마다 사회 각계에서는 금융실명제 실시를 요구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정경유착과 부정부패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지하 자금을 양성화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되면 은행에서 뭉칫돈이 빠져나가 금리가 폭등하고 주식시장에서 자금이 이탈해 주가가 폭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경제계를 중심으로 제기됐다.

이 때문에 정부는 5공과 6공 정권은 한차례씩 금융실명제 실시 방침을 밝히고도 이를 철회해야 했다. 금융실명제가 불러올 경제적 충격에 대한 보완책이 충분치 않다는 이유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 후 자신의 금융실명제 공약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여러차례 밝혔지만 그 시기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했다. 시기를 사전에 밝힐 경우 오히려 정책 도입에 따른 부작용이 클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김 전 대통령 취임 이후 다시 한 번 금융실명제 실시 가능성이 제기되자 금값이 폭등하고 주식시장에서 국내 투자자들의 자금 이탈이 가속화되는 등 시장의 동요 현상이 나타났다. 재계는 물론 여당인 민자당 내에서도 신중론이 제기되면서 당정이 금융실명제 도입을 유보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히는 듯 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특유의 승부사 기질을 발동해 금융실명제를 성사시켰다. 준비 작업은 취임 4개월 만인 1993년 6월 말부터 시작됐다.

금융실명제 준비 작업은 007 작전을 방불케했다. 이경식 경제부총리와 홍재형 재무부 장관은 철통같은 보안 속에 프로젝트를 지휘했다. 당시 김용진 재무부 세제실장 외에 다른 차관보들도 추진 사실을 모를 정도였다. 10여명의 실무 직원들은 경기도 과천 주공아파트와 서울 강남 휘문고 앞 사무실을 두 달간 빌려 합숙을 하며 준비작업을 진행했다. 프로젝트명은 '남북 통일작전'이었다.

발표도 '대통령 긴급명령'이라는 승부수를 통해 이뤄졌다.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8월12일 오후 7시45분 대통령 특별담화를 통해 금융실명제를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공포했다. 그는 훗날 회고록에서 "기득권의 저항을 피하기 위해선 국회에서 법으로 만들기보다 대통령 긴급 명령이란 형식이 바람직하다"고 설명했다.

금융실명제 실시 발표일은 공교롭게도 앞서 새 정부가 시행한 공직자 재산등록 마감일이었다. 공직자의 재산 내역과 일반인의 금융 거래 내역을 양성화하는 조치를 잇따라 관철시킨 셈이다. 검은 자금의 이동 경로를 차단해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겠다는 김 전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된 대목이다.

문민정부는 금융실명제 실시 이후 금융시장에서 유출된 자금이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들어갈 조짐을 보이자 1995년 1월 '부동산실명제' 도입을 발표하는 등 경제 분야 개혁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금융실명제는 금융 거래의 투명성을 높여 우리 경제의 경쟁력을 한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에 따르면 1992년 우리나라의 지하경제 규모는 국내총생산(GDP)의 29.1%에 달했지만 금융실명제 도입으로 1993년 24.3%로 축소됐다.

금융실명제는 실시된지 22년이 지났지만 지하자금 양성화와 경제 투명성 강화라는 과재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특히 차명계좌 사용을 단속할 규제가 충분치 않다는 지적이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흔히 '대포통장'이라 불리는 차명 계좌들은 정치자금 세탁이나 기업인들의 비자금 은닉처로 활용된다.

금융실명제 입안 당시 차명 거래는 무기명이나 가명 거래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문제로 취급돼 전면 금지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현재 사회 각계에서 차명계좌 전면 금지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지만 차명 거래를 일일이 파악하기 어렵고 처벌 기준을 정하기 쉽지 않다는 이유에서 현실화되지 않고 있다.

1993년 금융실명제 준비 작업에 참여한 김진표 전 경제부총리(당시 재무부 세제심의관)는 "실명법으로 차명거래를 금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며 자칫 '과잉규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전 부총리는 "금융기관 창구 직원에게 차명거래인지 실명거래인지 확인하라고 요구하는 체계는 어느나라도 없다"며 "실명제는 세법 등 관련 법에서 추구할 일이지 창구에서 실명제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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